대관령서 최상의 실내악 선보인 모딜리아니 콰르텟
비올리스트 불참으로 김규현이 대체..개성 달라져도 높은 수준은 그대로
(서울=연합뉴스) 나성인 객원기자 = 모딜리아니 사중주단이 지난 3일 강원도 평창 알펜시아 콘서트홀에서 제19회 평창대관령음악제 프로그램의 하나로 슈베르트의 현악 사중주들을 연주했다.
2003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단해 평창대관령음악제와 함께 19년째 활동 중인 모딜리아니 콰르텟은 명실상부한 최고의 사중주단이다. 소리의 균형감, 투명한 음색, 사중주의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조화로운 해석을 들려준 2008년 이후 레이블 '미라레'에서 열다섯 개의 음반을 냈다.
하이든, 멘델스존을 비롯해 전곡 연주가 흔치 않은 슈만의 현악 사중주 세 곡을 모두 녹음했고, 최근에는 슈베르트의 현악사중주 전집을 발매하기도 했다. 이들은 반더러 트리오와 함께 이번 평창대관령음악제가 초대한 악단 중 가장 주목받는 앙상블이었다.
다만, 이번 방한에는 비올리스트 로랑 마르팡이 건강상 이유로 함께하지 못해 한국 노부스 콰르텟의 비올리스트 김규현이 대신 호흡을 맞췄다. 모딜리아니만의 색채와 사운드를 기대했던 관객들에게는 아쉬운 일이었다. 사중주를 구성하는 악기 편성과 그들 사이의 역학 관계, 색채와 균형 등은 극히 민감하다. 악단의 연주자는 사실상 대체가 불가능하다. 다른 구성원들과의 관계 안에서 개성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김규현이 모딜리아니의 일원으로 합을 맞출 수 있다는 것은 한국 실내악계에도 세계적 수준의 '사중주 음악가'들이 있으며 이번 같은 유사시에 악단의 전체적인 연주 수준 유지에 기여할 수 있는 역량을 지녔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개성은 달라질지 몰라도 전반적인 수준에는 변화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모딜리아니의 슈베르트는 단아했다. 1부에는 슈베르트의 초기 사중주인 제9번(g단조)과 제10번(E플랫장조)이 차례로 연주됐다. 두 작품은 각각 1815년, 1813년에 나온 '십대 청소년' 슈베르트의 작품이다. 집에서 연주하려고 작곡한 '가정 사중주'다. 이미 베토벤의 '라주모프스키' 사중주가 나와 강렬한 연주 효과를 자랑하는 '콘서트 사중주'가 등장했지만, 슈베르트는 아직은 모차르트와 하이든, 그리고 베토벤의 초기 사중주의 영향을 주로 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두 작품에는 슈베르트 본연의 따뜻하고 천진하고 다정다감한 서정성이 순수하게 드러난다.
모딜리아니 사중주단은 여유로운 호흡으로 시종 따뜻하고도 풍성한 울림을 들려줬다. 그들의 연주는 '개별적인 것을 앞세우느라 전체적인 것을 놓치면 안 된다'던 베토벤의 말을 연상시킬 만큼 주제와 전개 과정, 악상의 구조를 선명하게 들려줬다. 불필요한 극적 과장이 없는데도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 사이의 긴장감 넘치는 대화, 첼로의 나직면서도 또렷한 음색이 일품이었다.
특별히 두 작품에서 모두 서정적인 느린 악장의 고백적 어조가 극히 아름다운 순간을 들려줬고, 9번의 미뉴에트, 10번의 스케르초와 같은 춤곡 악장에서는 리듬의 정확함과 별개로 배음의 풍성함이 유지돼 인상적이었다. 춤곡은 어린 시절부터 슈베르트의 장기였다. 이 악단의 소리는 마치 끝을 둥글게 다듬어 어떤 음이라도 적절한 울림을 머금게 하는, 말 그대로 '조탁된 소리'였다.
2부는 유명한 사중주 '죽음과 소녀'로 채워졌다. 슈베르트가 베토벤의 음악을 재발견하고, 자신의 운명을 숙고하기 시작한 1824년경의 작품이다. 1악장에서 그려지는 서슬 퍼렇고 강렬한 죽음의 모습을 모딜리아니 사중주단은 아주 개성 있게 표현했다. 강렬함, 날카로움, 공격성을 앞세우는 '헤비메탈식' 연주 대신 울림에 변화를 주는 방식이었다. 서정적인 대목에서는 비브라토를 통한 적절한 울림을 부여하지만, 죽음을 묘사할 때는 그런 울림을 없애며 죽음의 '비인간적 면모'를 드러내는 식이었다.
템포는 박진감 있었고, 적절한 템포의 변화와 음영, 강도의 변화도 매끄럽게 표현됐지만, 날카로움의 순간은 최대한 자제됐다. 단 한 번, 클라이맥스의 타격에만 허용됐다. 제2악장의 유명한 변주곡은 아주 탁월한 해석이었다.
솔로 악구를 맡는 제1바이올린(아모리 코이토)은 연약한 소녀를 제대로 그려냈고, 악장 후반부에서 소녀를 덮치는 죽음을 형상화하는 첼로(프랑수아 케이페르) 또한 인상적인 음색과 표현력을 들려줬다. 제2바이올린(루이크 리오)은 비록 잘 드러나지 않지만 탁월한 연주로 악단의 속도, 색채, 악상을 전환시키는 센스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김규현의 비올라는 노부스 때보다는 조심스러웠지만 조화로웠다. 강렬하고 다양한 표정의 스케르초, 반어적인 유희적 몸놀림과 휘달리는 듯한 빠른 템포의 피날레까지 연주는 훌륭했다. 실연으로 들어야 느껴지는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번 모딜리아니 사중주단의 슈베르트는 작곡가와 악단의 개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황홀한 순간이었다.
lied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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