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열음이 피아노의 현을 뜯자 가야금 소리가 났다

임석규 2022. 7. 4. 14:05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2일 저녁 강원 평창군 대관령면 알펜시아 리조트 뮤직텐트.

19회를 맞은 평창대관령음악제 개막 공연은 청중의 눈과 귀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독특한 예술 체험을 선사했다.

개막 공연 2부에서는 한국 출신으로 유럽과 미국 무대를 누비는 에스메 콰르텟이 코른골트의 현악 4중주 2번을 연주했다.

평창대관령음악제는 오는 23일까지 3주간 이어진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3일까지 3주간 평창대관령음악제 열려
역대 최장·최대 규모..악기로 화분 등장
손열음 등 국내외 저명 연주자 다수 참여
타악기 주자 매튜 에른스터가 4개의 빈 화분을 나무 채로 두드리며 프레더릭 제프스키의 ‘대지에’를 연주하는 장면. 제19회 평창대관령음악제 개막 공연이었다. 강원문화재단 제공

#1 크기가 다른 4개의 빈 화분이 놓여 있다. 그 앞에 좌정한 타악기 주자가 막대기 2개로 화분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케이비에스(KBS) 교향악단 타악기 주자 매튜 에른스터가 그 주인공. 손으로 연주하는 화분 리듬에 맞춰 입으로는 시를 읊조린다. 고대 그리스 <호메로스 찬가> 가운데 ‘대지의 여신 가이아에게’다. 둔탁하면서도 청명한 화분의 울림은 느릿하게 흐르더니 어느새 폭풍처럼 빠르게 휘몰아친다. 무대 뒤쪽에서 영상 자막으로 시가 흘렀다. “거룩한 대지여, 꺼지지 않는 영혼이여, 당신이 축복하는 이들이로다.”

#2 몽환적 분위기의 푸른 불빛 조명 아래 세명의 연주자가 무대에 들어선다. 검은색 마스크를 썼는데 입이 아니라 눈을 가렸다. 세명 중 한명인 피아니스트 손열음은 건반만 치는 게 아니다. 일어선 채 피아노 안쪽의 현을 손으로 긁고 뜯고 두드리자 피아노가 가야금 같은 현악기 소리를 낸다. 플루티스트 조성현은 플루트만으론 부족했는지 구음을 웅얼거리고, 휘파람까지 불며 고래 울음을 표현하느라 분투한다. 신비스러운 소리를 내던 첼리스트 김두민은 이따금 첼로 대신 타악기를 연주한다. 영상 자막을 통해 5개 악장의 흐름에 맞춰 ‘시생대·원생대·고생대·중생대·신생대’가 차례로 표시됐다.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첼리스트 김두민, 플루티스트 조성현이 조지 크럼의 ‘마스크를 쓴 세명의 연주자를 위한-고래의 노래’를 연주하는 장면. 푸른 조명 속, 마스크로 눈을 가린 세명의 연주는 행위예술을 방불케 했다. 강원문화재단 제공

2일 저녁 강원 평창군 대관령면 알펜시아 리조트 뮤직텐트. 19회를 맞은 평창대관령음악제 개막 공연은 청중의 눈과 귀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독특한 예술 체험을 선사했다. 초등학생 자녀와 휴가차 음악제를 찾은 가족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예매 관객 800여명과 현장 판매분을 합해 1천여명의 청중이 연주장을 가득 채웠다. 전국에서 초여름 폭염이 기승을 부렸지만 이곳 평창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 뜨거운 여름을 실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프레더릭 제프스키의 ‘대지에’로 문을 연 축제는 조지 크럼의 ‘마스크를 쓴 세명의 연주자를 위한―고래의 노래’로 이어졌다. 두 작품 모두 듣는 즐거움과 보는 기쁨을 동시에 제공했다. 제프스키는 지난해 6월, 크럼은 지난 2월 작고한 동시대 미국 작곡가다. 팬데믹에서 엔데믹으로 향하는 길목에 열린 음악 축제가 최근 세상을 뜬 작곡가들의 곡으로 문을 연 것은 다소 역설적이다. 손열음 예술감독은 “코로나가 끝나가면서 하나의 시대가 지나가고 다음 시대가 온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런 의미에서 최근 돌아가신 두분의 작품을 내세웠다”고 지난 5월 간담회에서 설명했다.

2018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런던 위그모어홀 국제 현악 4중주 콩쿠르에서 우승한 에스메 콰르텟. 평창대관령음악제 개막 공연에서 코른골트의 현악 4중주 2번을 연주했다. 강원문화재단 제공

화분으로 연주한 21분 길이의 작품 ‘대지에’는 의외로 음량이 컸다. 화분 크기 차이에 따른 음의 높낮이가 빚어내는 선율과 리듬이 종교적이고 주술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는데, 청중도 색다른 체험에 숨죽인 채 빠져들었다. 이 작품은 ‘운반하기 쉬운 작은 타악기로 연주할 수 있는 곡을 만들어달라’는 타악기 주자의 요청에 따라 제프스키가 1985년 만든 작품이다. 제프스키는 ‘민중의 작곡가’로 불린다.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주저 없이 작품의 소재로 다뤘다. 칠레 민중가요 ‘단결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를 주제로 만든 변주곡이 그의 대표작이다.

이어 연주된 ‘마스크를 쓴 세명의 연주자를 위한―고래의 노래’는 ‘행위예술’을 방불케 하는 작품. 혁신적 작곡가 조지 크럼이 한 해양과학자가 녹음한 혹등고래의 울음소리에 영감을 받아 1969년에 만든 곡이다. 피아노와 첼로, 플루트의 3중주가 심연을 파고드는 듯한 신비로운 연주를 들려줬다. 연주자의 얼굴을 가려 이들이 인간이 아닌, 자연을 상징하도록 한다는 게 작곡자의 의도라고 한다. 청중이 연주자 개개인이 아니라 그들의 음악에 더 집중하도록 하려는 장치였다. 이날 푸른 조명 불빛 속 연주자 3명은 마치 심해를 유영하는 고래들처럼 보였다.

프랑스 출신 세계적인 현악 4중주단인 모딜리아니 콰르텟과 국내 출신으로 유럽 무대를 누비는 에스메 콰르텟이 멘델스존의 현악 8중주를 함께 연주하고 있다. 강원문화재단 제공

개막 공연 2부에서는 한국 출신으로 유럽과 미국 무대를 누비는 에스메 콰르텟이 코른골트의 현악 4중주 2번을 연주했다. 이어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현악 4중주단 모딜리아니 콰르텟과 에스메 콰르텟이 멘델스존의 현악 8중주로 합을 맞췄다. 좀처럼 실연을 보기 어려운 곡이라 청중이 환호했다.

개막 이틀째인 3일부터 연주회는 600석 규모의 알펜시아 콘서트홀로 옮겨 진행됐다. 오전엔 지난해 윤이상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한 바이올리니스트 카리사 추의 리사이틀 무대가 열렸다. 오후엔 최근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 전곡 15곡을 5장의 앨범으로 발매한 모딜리아니 콰르텟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14번 ‘죽음과 소녀’ 등 현악 4중주 3곡을 연주했다. 이 콰르텟의 비올라 주자가 건강 문제로 오지 못하자 노부스 콰르텟의 비올라 주자 김규현이 그 자리를 빈틈없이 메웠다.

평창대관령음악제는 오는 23일까지 3주간 이어진다. 역대 최장, 최대 규모. 18회의 메인 콘서트와 4회의 스페셜 콘서트, 5회의 연중기획 시리즈 공연이 펼쳐진다. 코로나19로 국외 연주자들이 거의 출연하지 못했던 지난 2년간과 달리 이번엔 저명한 국외 연주자들이 이곳을 찾는다. 평창음악제는 축제 본연의 열기와 생동감으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평창/임석규 기자 sky@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