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디폴트옵션 시행..수익률 '믿는 구석' 생길까
6주간 명확한 운용 지시 없으면
사전 지정한 포트폴리오로 운용
원리금보장형 쏠림 완화 기대에도
증시 부진으로 자금 대이동엔 한계
美 최근 10년 평균 수익률 8%대
한국은 2%대..지각변동 올지 주목
300조원에 육박하는 국내 퇴직연금 시장에 오는 12일부터 사전지정운용제도인 ‘디폴트옵션’이 도입된다. 디폴트옵션이란 가입자가 명확한 운용 지시를 내리지 않을 경우 사전에 가입자가 지정한 상품이나 포트폴리오에 따라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제도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미국이나 호주처럼 퇴직연금 시장이 한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평가한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의 ‘2021년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현황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퇴직연금은 295조6000억원이 적립됐다. 적립 규모는 1년 전(255조5000억원)보다 15.7% 늘었다. 퇴직연금 적립금은 지난 2019년 이후 꾸준히 15~16%대 증가율을 보이고 있는데, 퇴직연금으로 노후 준비에 나서는 이들이 많은 데다 금융사들도 치열하게 유치 경쟁에 나섰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DB형·DC형...퇴직연금 유형 뭐가 다른가요
퇴직연금의 유형별 비중을 보면 DB(확정급여)형이 171조5000억원(58%)으로 가장 많고 DC(확정기여)형과 IRP(개인형 퇴직연금)는 각각 77조6000억원(IRP특례 포함, 26.2%), 46조5000억원(15.7%)이 적립됐다. 상품 유형별로는 원리금보장형이 전체 적립금의 86.4%(225조4000억원)를 차지했고, 실적배당형은 13.6%(40조2000억원)에 그쳤다.
DB형은 외부 금융사에 보관한 퇴직급여를 회사가 운용한다. 퇴직급여를 운용하다 발생한 수익이나 손실은 모두 회사에 귀속된다. 운용수익과 무관하게 노동자가 퇴직할 때 받는 퇴직급여는 사전에 결정돼 있는데, 산정 방법은 퇴직금 제도와 동일하다. 퇴직하는 시점의 월급(퇴직 직전 3개월 평균)에 근속연수를 곱해 산정된 금액을 지급하는 형태다. 회사가 퇴직금을 전적으로 운용하기 때문에 자기가 어떤 퇴직연금에 가입돼 있는지 잘 모르는 사람은 대부분 DB형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DC형은 개인이 직접 퇴직금을 운용하는 형태다. 사용자가 매년 노동자 개인별로 연봉의 12분의 1 이상에 해당하는 부담금을 노동자 퇴직 계좌에 납입하면, 노동자가 이를 운용하는 것이다. 퇴직하게 되면 그때 회사 부담금과 운용수익을 더해 퇴직급여로 받는다. 투자 성향에 따라 원금 보장 상품과 실적배당형 상품 등 다양한 포트폴리오로 구성할 수 있다.
IRP는 은행·증권·보험 등 금융기관을 통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개인형 퇴직연금이다. 퇴직이나 이직 등으로 퇴직일시금을 수령한 사람은 IRP를 활용해 직장에 다니고 있지 않더라도 퇴직연금 가입 기간을 유지 및 연장할 수 있다. IRP는 최근 1인 가구가 많아지면서 안정적으로 노후 설계가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퇴직을 앞둔 중?장년층뿐 아니라 MZ세대(1980~2000년 출생)도 적극적으로 가입하고 있다. 특히 연간 최대 700만원 한도에 16.5%까지 세액 공제 혜택이 주어져 각광받고 있다.
디폴트 옵션 시행으로 달라지는 것은?
퇴직연금 디폴트 옵션이 시행되면 확정기여(DC)형과 개인형퇴직연금(IRP) 가입자들은 별도 운용 지시없이 총 6주가 경과하면 근로자가 사전에 정한 상품으로 자동 운용 대상이 된다.
연금 선진국인 미국과 호주, 영국 등은 일찌감치 디폴트 옵션을 적용했다. 미국은 ‘401K’ 제도를 1981년부터 운용 중으로, 최근 10년간 연평균 8.6%대의 높은 수익률을 올리고 있다. 호주는 1992년 ‘마이슈퍼’ 디폴트 옵션, 영국은 2012년 ‘네스트(NEST)’를 각각 시작했다.
그동안 ‘원리금보장형 상품’ 쏠림 현상이 극심했던 국내 퇴직연금 시장도 실적배당형으로의 이동이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작년 말 전체 적립금 295조6000억원 대부분이 원리금 보장형 금융상품에 쌓여 최근 10년간 연평균 수익률이 2.7%, 지난해 수익률이 2%에 그친 국내 퇴직연금 수익률에 지각변동을 가져올지 주목된다.
국회를 통과한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에 따르면, 디폴트옵션 대상 상품은 원리금보장형 상품, TDF(타깃데이트펀드), MMF(머니마켓펀드), 부동산인프라펀드 등이다. 앞으로는 디폴트옵션 상품만으로 계좌 운용을 할 수도 있다. 단 IRP형은 가입자가 자유롭게 디폴트옵션을 지정할 수 있는데 비해, DC형은 노사가 합의해야 한다.
증시로 ‘머니무브’ 가능성 얼마나 될까요?
지난해 말 기준 DC형과 IRP의 원리금 보장형 규모는 각각 61조5000억원, 30조5000억원으로 총 92조원에 달한다. 전문가들은 이 가운데 대략 10~20% 정도는 증시로 흘러들어올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기금 운용 노하우가 축적된 국민연금의 포트폴리오를 보면, 전체 자산 928조7000억원을 ▷국내주식 16.9% ▷해외주식 26.9% ▷국내채권 35.1% ▷해외채권 6.9% ▷대체투자 13.7% 등으로 나눠 투자하고 있다.
다만 최근 부진한 증시 상황이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실제 금감원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증권사들이 판매한 퇴직연금 원리금비보장 상품의 수익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곳도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신영증권은 지난해 1분기 원리금비보장 퇴직연금 수익률이 20.7%를 기록한 데 비해, 올해 같은 기간 ?4.76%로 주저앉았다. NH투자증권(9.74%→-1.78%), 삼성증권(5.59%→-0.63%), 하이투자증권(6.09%→-4.41%) 등도 1년 만에 수익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전세계적인 인플레이션 우려 속에 금리인상의 긴축 우려감이 커지자 증시는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증시 부진이 지속된다면 디폴트옵션 시행 초기엔 가입자들이 실적배당형 상품을 선택하기보다는 예금과 같은 원금보장형 상품에 가입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최근 금리인상으로 치솟고 있는 예적금 금리도 이같은 가능성을 높이는 요소다.
한국에서도 ‘연금 백만장자’ 나올 수 있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디폴트옵션에 원리금보장 상품을 포함시킨 나라는 일본과 한국뿐이다. 정부는 이달 도입하는 디폴트옵션 운영상품을 최대 10개(고위험 3개, 중위험 3개, 저위험 3개, 원리금 보장형 1개)로 구성하도록 했는데, 여기에도 원리금 보장형을 포함했다.
이는 일본과 비슷한데, 원리금보장 상품을 배제한 미국, 호주 등 퇴직연금 선진국들과 달리 이를 포함시킨 일본에선 실제 원금 손실을 우려한 가입자들이 대거 원리금보장 상품으로 몰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본 역시 2018년 디폴트옵션을 도입하면서 복수의 상품 중 원리금 보장형 상품을 포함해 평균 수익률이 다른 나라와 비교해 크게 떨어졌다.
일본 기업연금연합회에 따르면 2017년 71% 수준이던 원리금보장형 상품 비중은 디폴트옵션 도입 직후인 2018년 76%로 오히려 비중이 커져 제도가 유명무실해졌다. 현재도 미국과 호주의 원리금보장형 비중이 한자릿수인데 비해, 일본은 절반에 달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퇴직연금이 원리금보장형으로 쏠림이 이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산운용사들은 투자자에 유리한 퇴직연금 상품을 적극 개발해 매력을 끌어올려야 하고, 개인들은 투자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공격적인 투자에 나서야 한다고 진단했다. 강창희 트러스톤자산운용 연금포럼 대표는 “제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퇴직연금 가입자들이 주인의식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밝혔다.
윤호·양대근 기자
youkno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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