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만, 88올림픽 앞두고 명동성당에서 몸을 던지다
(40) 팔레스틴 목수의 아들을 기리며
조성만 열사, 1988년 5월15일 성당서
"남북올림픽 공동 개최" 외치며 투신
이후 종교계·정치권서 통일 이슈 부각
“예수께서는 이 비유들을 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사람들은 놀라며 ‘저 사람이 저런 지혜와 능력을 어디서 받았을까? 저 사람은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리고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 동네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런 모든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생겼을까?’ 하면서 예수를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도 제 고향과 제 집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그곳에서는 별로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다.”(마태오 13,53-58)
“예수께서는 신 포도주를 맛보신 다음 ‘이제 다 이루었다.’ 하시고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셨다.”(요한 19,30)
예언자가 자신의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는 격언에는 많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의 인품과 가치는 이후의 역사가 평가한다는 의미와 함께 진정한 평가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함의입니다. 당대에 누리는 잠시의 인기와 평가가 아닌, 후대에 이루어지는 평가야말로 참된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가톨릭교회가 성인품에 올리는 분들은 적어도 사후 50년이 되어서 그 행업을 공식적으로 평가한 결과입니다. 물론 시대가 급변함에 따라 20세기 후반에는 사후 20년, 10년에도 성인품에 올리곤 합니다.
사실 선종한 이에 대한 교회의 평가는 매우 엄격합니다. 정확을 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프랑스의 잔다르크(1412~1431) 같은 분은 대중들이 성녀로 추앙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외 정치적 상황 때문에 단죄받고 25년이 지나서야 명예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려 500여 년이 지난 1920년에야 성녀로 시성되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사회의 한계와 제도 교회의 부끄러운 양면성입니다.
유서엔 “조국통일 염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리는 조성만(요셉) 청년도 잔다르크와 연계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조성만 형제의 결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맹아기에 있습니다. 그는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유서를 품고 자신의 몸을 던졌습니다. 유서는 죽음을 앞둔 생의 마지막 글입니다. 또한 자기 삶의 종합이며 거울입니다. 그러니 그의 마지막 글을 통해 한 청년의 심정이 얼마나 비장했을지 깊이 되새겨야 합니다.
1987년의 어이없는 선거 결과에 따른 절망적 분위기는 다음 해의 올림픽 열기로 덧칠되었습니다. 언론들은 단군 이래 최대의 국가적 이벤트라며 분위기를 띄웠고 거리마다 축제 전야의 흥청거림이 가득했습니다. 미완의 혁명, 완수되지 못한 민주화는 모두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듯 보였습니다.
1988년 5월 15일 오후 3시 40분께, 조성만 열사가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투신했습니다. 그날은 예수승천 축일인 주일로, 명동성당 청년들의 5월 축제 행사인 마라톤 발대식이 있었고 유가협과 민가협 회원들의 연좌농성 집회가 열려 성당 전체가 떠들썩했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현장을 지켜보았고 실신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날은 한겨레신문과 평화신문의 창간일이기도 했습니다.
조성만 열사는 전주 해성고등학교 출신으로 서울대 화학과에 재학 중인 독실한 신자였습니다. 교목이었던 문정현 신부에게 영향을 받아 그도 사제의 꿈을 키웠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우선 서울대에 진학했습니다. 그는 명동성당 청년연합회 회원으로 활동했는데 혼자 조용히 유서를 준비하고 5월 15일에 투신을 감행한 것입니다. 그는 옥상에 올라가 “군사정권 반대, 남북올림픽 공동 개최”라는 구호를 외친 후 몸을 던졌습니다.
조성만 열사의 투신 소식은 재빨리 퍼져나갔습니다. 국내 언론뿐 아니라 외신들도 앞다퉈 젊은 청년의 죽음을 전 세계에 타전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유서가 공개되자 파장은 더 커졌습니다. 그것이 장엄한 신앙 고백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유서의 일부입니다.
“척박한 땅, 한반도에서 태어나 인간을 사랑하고자 했던 한 인간이 조국 통일을 염원하며 이 글을 드립니다. (중략) 지금 이 순간에도 떠오르는 아버님, 어머님 얼굴. 차마 떠날 수 없는 길을 떠나고자 하는 순간에 척박한 팔레스틴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한 인간이 고행 전 느낀 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
조성만 열사는 한반도의 현실을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팔레스틴에 비유했습니다. 그의 세례명은 요셉으로, 평생 노동자로 사셨던 요셉 성인은 예수님의 양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장하시고 활동하셨던 나자렛 지역은 소외된 땅으로 한반도를 상징합니다. 그를 통일 열사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군사정권의 재집권과 올림픽 단독 개최에 깊은 절망을 느낀 그는 “민족의 평화로 나아가는 길이 그리스도의 요청이므로 신앙인으로서 자신을 던진다”고 했습니다.
문익환 목사·문규현 신부 등 방북
조성만 열사의 투신은 1980년대 후반 통일 이슈에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1989년 한 해에만 문익환 목사, 임수경, 문규현 신부가 방북했다는 사실이 그 방증입니다. 유서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문익환 목사는 1989년 4월 2일 김일성 주석을 만나 남북 평화를 위한 공동성명을 발표합니다. 20대 청년 그리스도인의 죽음이 목사님을 감동시켜, 김일성을 찾아가 포옹하고 새로운 통일의 길을 열게 했습니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인 임수경은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독일을 통해 북한에 갔으며, 문정현 신부의 동생인 문규현 신부는 임수경을 보호하기 위해 방북했습니다. 그 일로 문규현 신부는 3년여간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사실 문익환 목사의 방북 얼마 전에 정치인의 방북도 이루어졌습니다. 국회의원 서경원이 1988년 8월 동유럽을 통해 북한에 들어가 김일성 주석을 만난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참뜻은 빛을 발하지 못하고 묻혀 버렸습니다. 서경원 의원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호된 조사를 받은 후 8년의 옥고를 치뤘습니다.
조성만 열사의 투신은 기성 종교계에도 경종을 울렸습니다. 그가 하필 명동성당에서 투신한 것은 경직된 수구의 길을 걷고 있는 가톨릭에 반성을 촉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988년 조성만 열사의 장례식은 명동성당에서 열리지 못했습니다. 가톨릭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에 대해 공식적인 추모 미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지극히 봉건적이고 과거 회귀적인 생각입니다. 사실 이 기준은 1960년대에 이미 폐지되었습니다. 죽음은 하느님의 영역이므로 사람이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의 공식적인 의견입니다.
제가 성당과 명청(명동성당 청년연합회) 회원 간의 중재에 나섰지만 결국 장례미사는 할 수 없었습니다. 명동성당의 주임신부였던 정의채 신부님은 이런 부분에 대해 그리 개방적이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절충안으로 장례미사는 생략한 채 사도예절(고별기도)만 하고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 후 조성만 형제의 유해를 모신 청년, 학생, 시민들은 서울역사박물관 광장에서 장엄하게 장례식을 거행하고 시청 앞 광장과 그의 모교인 서울대학교에서 노제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앞서간 희생자들을 기리며 수많은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광주 망월동 구 묘역에 모셨습니다. 장례식 자체가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위한 장엄한 기도였고 통일을 위한 선언과 다짐이었습니다.
통일운동의 씨앗이 되었던 조성만 열사가 세상을 떠난 지도 30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2001년이 되어서야 조성만 열사는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었고 2021년 6월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습니다. 그리고 2021년 11월엔 그토록 염원하던 ‘조성만 기념사업회’가 전주에서 발족했습니다. 조성만 군과 함께 활동했던 이들은 그가 명동에서 선종했으니 서울교구가 중심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청했으나 정진석, 염수정 두 전임 교구장은 이를 외면했습니다. 선종한 자리에 표지석이라도 세웠으면 하는 작은 바람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가톨릭 사제로서 참으로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타인과 공동체 위한 결단, 폄훼말아야
솔직하게 고백하건대 1988년 당시에 저도 조성만 열사의 헌신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온통 당혹감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민족 공동체를 향한 대단한 결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가톨릭이 오랫동안 죄악시해온 자결의 형태였지만 저는 그분들에게서 고귀성을 엿보았습니다.
죽음에는 자연사와 병사, 타살, 자살 등 여러 유형이 있습니다. 자연사와 병사는 자연 섭리이므로 누구나 수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타살의 경우는 12월 28일 무죄한 어린이 순교자 축일과 같이 제3자가 무력으로 목숨을 빼앗은 경우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대표적인 예범입니다. 1987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숨진 박종철 열사를 비롯해 숱한 분들이 역사의 굴레에서 억울하게 타살당했습니다. 예수님을 떠올리며, 그분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갖고 그 시대적 배경과 이유를 늘 고민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시대적 사명입니다.
죽음의 세 번째 유형이 자살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죽음의 동기가 사적 또는 개인적인 경우입니다. 극단의 억울함에 항거해, 또는 개인적 한계로 선택한 죽음입니다. 두 번째는 이웃과 공동체, 역사적 소명에 기초한 이타적 죽음입니다. 타인과 공동체를 위한 소명의 선택과 결단입니다. 일제가 나라를 강탈했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책임 있는 공직자들이 있습니다. 두 명의 대신, 즉 민영환과 조병세의 순절, 양산군수 향산 이만도 지사, 금산군수 일완 홍범식 지사, 시인이며 역사학자인 매천 황현 지사, 이분들은 모두 민족사에서 귀감이 되는 스승들입니다. 또한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서 “노동자도 인간”이라고 외치며 산화한 전태일 열사, 인권과 민주화 실현을 위해 결단한 서울대생 김상진 열사 등도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조성만(요셉) 형제를 기립니다. 민족의 일치와 화해, 통일을 위해 몸 바친 결단의 청년 그리스도인입니다. 미국 등 강대국의 간섭을 넘어서야 한다는 호소에 우리 모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공동체를 위해 투신한 분들을 기리는 행업이 바로 진지한 기도이자 경건한 종교의식과 장엄한 전례입니다. 8천만 겨레가 이분들의 뜻에서 교훈을 얻어 평화와 공존의 길을 열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합니다.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조성만(요셉) 청년을 기리며 기도합니다. 1980년 고등학교 1학년 시절, 광주의 참상을 전해 듣고 “진상을 규명하라”라고 외치며 친구들과 거리를 누볐던 조성만은 사제가 되겠다는 열망을 간직했습니다. 대학 입학 후 국방의 의무를 마치고 명동성당 청년회에서 활동했습니다. 가민연(가톨릭민속연구원) 회장으로 봉사하면서 교회가 바로 우리 민족의 삶 한가운데에서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제2의 강생, 토착화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동료들과 함께 실천을 다짐했습니다. 명청 선배들의 영향을 받은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헌신의 의미를 깨닫고 투신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신 승천 축일이며, 복음을 온 세상에 널리 선포하는 홍보주일입니다. 하늘에 오른 조성만(요셉)은 온 세상에 주님의 복음을 새로 선포했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묻혀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성서 말씀을 몸소 실천하며 결단했습니다. 이 청년의 고귀한 선택과 삶을 존경하며 저희 모두 예수님처럼, 순교자들과 순국선열처럼 결단의 삶을 살겠습니다.
하느님, 조성만 형제를 통해 저희 모두 새로이 태어나 새롭게 깨닫고 새롭게 살겠습니다. 저희 모두를 깨우쳐 주시고 민족의 일치와 화합을 앞당겨 실현해주소서. 이 모든 것을 성령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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