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힘에 이끌린 '김지하와 52년' 나를 깨어있게 해주었죠"

김경애 2022. 7. 4. 09:3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짬][짬] 일본 문예비평가 미야타 마리에 전 ‘중앙공론’ 편집장

지난 6월 25일 서울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열린 ‘김지하 시인 추모문화제’에서 미야타 마리에 전 중앙공론사 문예지 편집장이 ‘김지하와의 52년’ 추모사를 읽고 있다. 김경애 기자
지난 6월25일 ‘김지하 시인 추모문화제’에서 미야타 마리에(오른쪽) 전 중앙공론사 문예지 편집장이 추모사를 마쳤을 때 청중들은 기립박수로 답례했다. 이날 통역은 일본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했던 희곡작가 겸 연극연출자 김경원(왼쪽)씨가 했다. 김경애 기자

6월25일 ‘고 김지하 추모문화제’ 추모사
애증어린 회고담에 ‘감동의 기립박수’
“내가 아는 김 시인 모든 것 쓰겠다”

지난 6월 25일 오후 ‘김지하 시인 추모문화제'가 열린 서울 경운동 천도교 수운회관. 앞서 5월8일 원주에서 별세한 고인의 장례식이 가족장으로 조용히 치러진 까닭인지, 행사장은 입구까지 인파로 들어찼다. 공교롭게도 2014년 11월 고인의 출판기념회가 당시 대통령 박근혜의 축전과 더불어 집권여당 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던 바로 그 자리였다. 그 이후로 끝내 시대와의 불화를 풀지 못한 채 외롭게 떠난 고인의 해원과 상생을 위한 자리였던 만큼, 애도와 칭송으로 채워지는 여느 추모제와 달리, 조금은 긴장되고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런데 뜻밖에 기립박수가 터져 나오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추모제의 유일한 외빈으로 참석한 일본의 문예평론가 미야타 마리에(宮田毬栄) 전 중앙공론사(주오고론) 문예지 <해> 편집장의 추모사가 끝났을 때였다.

“중앙공론사의 편집자였던 내가 1970년 6월, 사무실 한구석에서 읽은 <주간 아사히>에 한국의 시인 김지하의 장편 풍자시 ‘오적' 전문이 실려 있었고, 나는 처음으로 읽는 김지하 작품의 압도적인 ‘말의 힘’에 매료되었습니다. 분노와 비웃음, 홍소의 화살이 부정과 부패에 빠진 통치자를 찌르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말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은유의 적확성, 뿜어져 나오는 웃음이 두드러지고 예리한 풍자가 전편을 채웠으며, 읽은 후에는 맑은 비애의 감정이 남았습니다. 시인 김지하의 ‘천재’(天才)를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고인보다 5살 많은 86살 고령의 그는 미리 정리해온 ‘시인 김지하와의 52년’ 제목의 추모사를 차분히 읽었다. 1971년 12월 한국에서 발매금지된 김지하의 ‘오적’ ‘황토’ 등 작품을 모아 첫번째 전집 <긴 어둠 속 저편에>를 펴내고, 1972년 ‘반공법 위반’ 체포와 강제입원·1974년 ‘민청학련 배후’ 사형 위기에 맞서 구명 운동에 나선 이래 2020년 7월 고인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내기까지. 그가 추모사를 간추려 읽는 동안 400여 청중들은 내내 침묵 속에 경청했다. 제목 그대로 반세기 넘게 이어진 두 사람의 인연은 너무나 각별했기 때문이다. 뿐더러, 한국 민주화운동사의 빛과 그늘, 그 상징적 인물인 고인에 대한 애증과 회한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자료집에 실린 원고지 40매 분량인 그의 추모사 원본은 그 자체로 한편의 일대기였지만 더 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이튿날 오후 서울 경운동 6·15남측위원회 사무실에서 미야타 전 편집장을 만나 몇 가지 의문을 풀어봤다.

지난 6월26일 ‘한겨레’와 미야타 마리에 전 편집장의 인터뷰는 서울 경운동 6·15남측위원회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지난 2000년 6월15일 평양에서 이뤄진 ‘김대중-김정일 첫 남북정상회담’ 때 액자가 뒷편에 걸려 있다. 1936년생인 그는 일본 중앙언론사에서 문예지 ‘해’의 첫 여성 편집장을 맡는 등 1997년까지 30년 가까이 일한 뒤 문예비평가로 활동중이다. 김경애 기자

1970년 6월 ‘오적’ 읽은 순간 “천재 발견”
1971년말 한국 금서된 작품들 전집 출간

우선 김지하의 시를 발견하기 앞서 그의 한국과 인연이 궁금했다. “그저 시사 뉴스를 통해 전해 들었을 뿐 한국과 개인적 연고나 특별한 관심은 없었다. 다만 고교시절부터 프랑스 시민혁명에 흥미를 느껴 와세다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고, 문예지 편집자로서 자연스럽게 전 세계 문인들의 글과 행보에 관심을 갖게 됐다. ‘오적’을 읽었을 때 ‘말로, 글로, 싸우는 젊은 시인’이 너무 놀라웠다.”

그는 이어 1972년 6월 풍자시 ‘비어’로 김 시인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김지하구원국제위원회’를 꾸렸을 때 얘기도 들려줬다. “<중앙공론> 필자로 알게 된 저명한 문화인사 13명에게 <긴 어둠 속 저편에>를 보내 김 시인의 석방을 위해 도와달라고 호소했는데 딱 한 사람만 호응해줬다.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베헤렌) 대표이자 행동파 작가로 맹활약하던 반전평화운동가 오다 마코토였다.. 오다는 초기 일본 시민사회가 김 시인의 구명과 한국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데 큰 몫을 했다. 하지만 오다가 1976년 돌연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만난 사실을 알게 된 뒤 김 시인은 그와 단호히 절연했다. 2004년 김 시인이 츠루미 슌스케 초청으로 교토를 방문했을 때 오다와 화해를 주선하려 했으나 그는 끝내 오다와 악수조차 거절했다. 오다는 3년 뒤 별세했다.”

미야타 마리에 전 ‘중앙공론’ 편집장이 1971년 12월 처음 편집해 출간한 김지하 시인의 작품집 ‘긴 어둠 속 저편에’. 한국보다 앞서 낸 전집이었다. 중앙공론사 제공

1972년 ‘반공법’ 체포에 구명운동 시작
1974년 ‘민청학련’ 사형 위기 때 “악몽”
오에 겐자부로·사르트르·촘스키 등
세계적 지식인들 서명운동 끌어내

그는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 때부터 김 시인이 석방된 1980년 12월까지를 “악몽”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김 시인이 사형 구형을 받은 다음 날인 7월10일 ‘김지하 등을 돕는 모임'을 발족시키고, 김지하를 죽이지 말아라! 석방하라!'라는 한국 대통령에 보내는 호소문을 돌려 서명운동을 나선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때 일본에서는 오에 겐자부로, 엔도 슈사쿠, 마쓰모토 세이초, 시바다 쇼, 다니가와 슌타로 등이, 외국에서는 사르트르, 보부아르, 마르쿠제, 하워드 진, 놈 촘스키, 에드윈 라이샤워 등 수많은 지식인이 동참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국제적인 항의에 굴복해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1973년 4월 미국에서 나온 김지하 시인의 시집 ‘담시 오적과 비어’ 표지(왼쪽)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써준 추천사(오른쪽). 연세대김대중도서관 제공

1972년 김대중 직접 편집실 찾아와
“김 시인 옥중 메모 등 전달해 교유”

미야타 전 편집장은 이날 인터뷰에서 흥미로운 증언을 했다. “1972년 10월 유신 직전(앞서 71년 5월 총선 유세중에 당한 의문의 교통사고로 다친 다리를 치료하고자) 일본에 와 있던 김대중씨가 어느 날 <중앙공론> 사무실로 찾아와 유창한 일본어로 인사를 해 깜짝 놀랐다. 그때부터 그는 김 시인의 메모를 전해줬다. 나중엔 김대중씨의 글을 받아 <중앙공론>에 전달하기도 했다.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결성을 위해 미국을 오가던 무렵, 한번은 기념품을 사다주기도 했다. 주로 중국음식점에서 만났는데 ‘미행’과 ‘감시’를 느끼고 조심하라고 당부했지만 그는 크게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러다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 사건’이 터진 것이다.”

(지난 5월10일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은1973년 4월 미국에서 발간된 김지하 시인의 시집 <담시 오적과 비어> 표지와 시집에 수록된 김 전 대통령의 추천사(치사)를 공개했다. 재미 민주화‧통일 운동가 임창영 박사가 김 시인의 활동을 한인 동포들에게 알리기 위해 펴낸 것으로, 그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김 시인의 전언을 전달했다는 미야타 전 편집장의 증언을 뒷받침해준다.”)

그 무렵부터 “아이가 있지 않느냐?” 같은 익명의 협박전화를 받기도 했다는 그는 가정과 일과 구명운동을 다 해내기가 힘들었고, 끝내 불화를 겪다 이혼을 하게 됐다. 이후 그가 재혼한 남편 미야타 히로토(2008년 별세) 전 <아사히> 기자 역시 ‘김대중 납치사건 추적’ 등으로 필명을 날린 한반도 전문가였다.

미야타 전 편집장이 이처럼 개인적인 고초까지 감내하며 김 시인 구명운동에 앞장선 이유는 뭘까? 그는 추모사에서 이렇게 답했다. “(김 시인이 보내온 명함 크기의 ‘옥중 메모’를 보고) 힘없는 나를 의지해야 하는 김지하씨의 외로움을 생각하면, 아무리 힘들어도 그의 신뢰에 응하고 싶어서 노력했습니다. 다른 출판 작업도 당연히 있었고 저의 30대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도 시인의 글에 감응할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해서 용기를 가졌습니다.”

1998년말 서울에서 김 시인 첫 만남
2003년 회고록 출간기념회 때도 초청

2003년 서울 인사동 학고재에서 열린 김지하 시인(오른쪽)의 회고록 ‘흰 그늘의 길’ 출판기념회 때 인사동 거리에서 함께한 미야타 마리에(왼쪽) 전 편집장과 김 시인. 미야타 마리에 제공
2004년 7월 김지하(왼쪽) 시인이 오사카 사카이시 생협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교토의 우지 뵤도인에서 함께한 미야타 마리에(오른쪽) 전 편집장. 미야타 마리에 제공

그런데 1980년 말 김 시인이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지만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998년 12월에야 이뤄졌다. 그 이유는 애초 그가 1972년 김 시인이 체포됐속됐을 때 만나러 방한을 시도했지만 유신정권 중앙정보부의해 비자 거부를 당했고, 이후 민주화 때까지 입국을 금지당해서다. 또 다른 이유는 김 시인이 2001년 인터넷매체 <프레시안>에 연재했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그런 점에서 볼 때 행운아다. 외국의 벗들이 없었으면 나는 벌써 오래전에 이 땅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지난날 어지간히도 그분들의 속을 태웠다. 그리고 소위 민주화가 되었다는 오늘 그것을 잊어버린 듯한 나의 태도는 그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릴 것 같다. (출옥 후에) 일본으로부터 여러 번에 걸친 초청에도 불응했으니 까닭은 아직 갈 때가 못됐다는 것이었다. 하긴 그랬다. 국내의 상황이 밖에서 보는 것과는 사뭇 달랐고 내 자신이 무엇인가 새로이 시작하고 있어서 그 일에 좀더 뜸을 들여야만 하는 것이었다. (…) 미야다 마리에씨는 그 사이 나로 인해 가정파탄까지 겪어야 했고, 한국에서 방한 금지인물로 등록되기조차 했다. 그러나 초청은 미흡했고, 예의를 다하지 못했으며 역시 이 회고록과 함께 내년 초쯤엔 좀더 성의있는 대접을 꼭 하리라 마음먹는다.”

미야타 전 편집장은 첫 만남이 이뤄질 때까지의 일화를 이렇게 소개했다. “1998년 겨울 김 시인이 극작가이자 소설가 가라 주로 등의 초청으로 가와사키시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신문 기사로 알게 되어 무척 놀라고 화도 났다. 그래서 ‘진짜로 구명운동을 한 단체도 모르게 오느냐. 본질을 모르는 사람 같다’고 항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답장이 왔는데 성의가 없어 결별 선언까지 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해 말 내가 서울을 방문했다. 김포공항에서 처음 만났는데 워낙 오랫동안 편지로 교류한 까닭에 자연스러웠다. 그때 처음 악수를 했는데 뼈마디가 아플 정도로 강해서 내내 잊히지 않았다.”

(가라 주로는 1972년 5~7월 김지하 시인이 국립마산결핵병원에 강제입원 중일 때 찾아와 중국으로 밀항을 시켜주겠다고 제안했던 인연이 있다.)

이후 김 시인이 1999년, 2000년 연달아 일본을 방문했을 때를 비롯해 두 사람의 만남은 10여년간 꾸준히 이어졌다. 김 시인은2003년 7월 <흰 그늘의 길>(학고재)로 제목을 바꿔낸 회고록 출판기념회 때 그를 비롯한 일본의 은인들을 정식 초대해 답례했다.

“일본 진보운동 새로운 돌파구 제공”
“김 시인 생명사상에 일본 교류 영향”

2007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6월항쟁 20돌 기념 초청 세미나에 참석 했을 때 미야타 전 편집장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깨닫게 되는 이 나라에 대한 사랑, 여기에서 사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김지하의 작품을 통해서 내 안에서 자라난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렇다면, 그를 매개로 한 한·일 문화계의 교류가 서로에게 끼친 영향은 무엇일까? “1960년대 후반 이래 1970년대 중반 베트남전 종식에 이르기까지 퇴조하던 일본 진보운동이 김지하 구명운동을 계기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깊이 관여하게 됐고 6월항쟁 등 승리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자극을 받았다. ‘평화헌법 9조 지키기운동’이 대표적이다. 한편으로 훗날 김 시인의 ‘후천개벽’ 동학과 생명사상에, ‘일본의 미래는 여성에게 달렸다’고 설파한 철학자이자 평론가인 츠루미 슌스케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츠루미 슌스케는 1972년 방한을 금지당한 미야타 전 편집장을 대신해 마산결핵병원에 강제입원중이던 김 시인을 처음 면회했다. 이 인연을 계기로 1974년 김지하 사형 반대 항의단식을 하는 등 2015년 별세할 때까지 사상적 교감을 나눴다. 특히 그가 <김지하, 최초의 말>이란 글에서 밝힌, 김 시인의 호기로운 말은 지금도 회자할 만큼 일본 진보운동 진영에 충격을 줬단다. “당신의 운동이 나(김지하)를 도울 순 없지만 나는 당신의 운동을 돕는 데 내 목소리를 보태겠다.”

(훗날 회고록에서, 김 시인은 ‘1998년 처음 일본을 방문했을 때 교토의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츠루미 슌스케의 환영사에 답사를 통해 그 말을 이렇게 수정했다고 소개해놓았다. "나는 그때 했던 두 마디를 세월이 한참이나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수정합니다. 영어로, ‘Thank you very much'입니다.")

그는 1971년 김 시인의 첫번째 책 편집 작업 때부터 주고 받았던 숱한 편지 중 일부를 추모사에서 소개했다. “새로운 세기가 됐을 무렵, 김지하씨가 병으로 입원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걱정이 되어 편지를 썼습니다. 2000년 6월26일 일산에서 (김 시인이 내게) 보낸 회신을 갖고 있습니다. ‘우주의 끝까지 함께 흰 그늘을 안고 가는 것이 우리 두 사람의 운명이다, 라고 했던 나의 말을 잊지 않고 계신 것을 확인하고, 무한히 내 마음이 넓어지는 것을 절절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 나의 지난 30년 동안 당신의 사랑과 우정을 과분하게 받고 성장한 것, 그리고 지금도 사랑받고 있는 것을 알고, 멋진 행복에 잠겨 있습니다. 마리에님!’”

“2012년 박근혜 지지 발언에 우려 전달”
2015년 원주 찾아갔으나 악수로 마지막

지난 6월25일 열린 ‘김지하 시인 추모문화제’에서 김봉준 한국화가가 만든 김지하 시인의 소상을 제막하며 행사를 시작하고 있다. 왼쪽부터 함세웅 신부, 이부영 추모문화제 추진위원장, 김봉준 화가, 미야타 마리에 전 ‘중앙공론’ 편집장, 임진택 창작판소리 연출가 등이다. 추모문화제 추진위원회 제공

그는 김 시인과 마지막 만남 때 소회도 털어놓았다. “2015년 4월10일 원주 토지문화관으로 찾아갔습니다. 2013년 ‘박근혜 지지 발언’의 배경이 의아해서 수차례 편지를 보냈으나 답이 없어 직접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으나 김 시인은 악수만 할 뿐 끝내 면담을 거절해 그날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2020년 7월8일 자신이 보낸 마지막 편지가 토지문화관에 배달된 것은 둘째 아들인 김세희씨를 통해 확인했지만 병상의 김 시인이 읽었는지는 끝내 알 수 없게 됐다고 했다. 그는 마지막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고 했다.

“(…)내가 2013년 1월에 (김 시인에게) 보낸 편지는 제 진실한 생각이었습니다. 박근혜를 지지하는 시인의 행동에 대해 ‘실망하고, 우려하고 있습니다’라는 했던 말은 시인과의 긴 세월 속에 생겨난 나의 성의였습니다. 나의 시인 김지하씨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담긴 말이었습니다. 어떻든 나는 마지막 날까지 후회하며 살겠지요. 상냥한 누나로 시인의 모든 행위를 받아들이는 게 좋았는지, 나는 끊임없이 괴로워했습니다. (…) 무엇이 김지하씨를 거기까지 몰아넣었을까요? 한국의 문학인 중에도 ‘김지하… 과거의 사람이지?’라고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과거라고 해도, 70년대는 고작 반세기 전입니다. 잊혀도 좋을 정도의 옛날은 아닐 것입니다. 김 시인과 악수할 때마다 그의 타고난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모로 누운 돌부처>에서 회상되는 소년의, 누구에게서도 구할 수 없는 고독과 겹쳐 보입니다.”

지난달 25일 천도교 수운회관 앞마당에 ‘고 김지하 시인 추모문화제’ 참석자들이 다함께 해원의 탈춤을 추고 있다. 추진위원회는 2023년 5월 8일 전후 ‘김지하 시인 1주기 행사’를 학술대회·문화공연·예술철학·동학생명사상·시서화전 등으로 다채롭게 이어가기로 했다. 추모문화제 추진위원회 제공

그는 2003년 나온 김 시인의 회고록 <흰 그늘의 길> 일본어판을 고인 생전에 내지 못한 것을 못내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잊어버리기 쉬운 사람들을 위해, 내가 알게 된 ‘김지하 시인의 모든 것’을 지금이라도 쓰기 시작해야겠습니다.”

추모사 말미에 밝힌 다짐을 환기하자 그는 “김 시인보다 한참 누나인 내게 얼마나 시간이 남아있는지 모르겠다”고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하지만, 처음 받은 메모와 자화상부터 고인의 모든 자료를 간직하고 있다는 그야말로 한·일은 물론 전 세계에서 ‘시인으로나 인간으로나’ 김지하의 내면세계를 가장 깊이 이해하는 사람인 것만은 틀림없어 보였다.

지난 27일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김 시인은 평생 나를 깨어있게 해준 고마운 사람이었다”며 그의 삶과 죽음을 회상하면서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왔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