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ML 한계 넘어 음성·동영상 지원.. 2000년대 초·중반'인터넷 점령'
■ 기술이 지나간 자리 - (15) 플래시
픽셀 아닌 벡터 그래픽 방식으로 완성도 높은 캐릭터·게임 구현
유튜브도 초기엔 플래시 기반으로 서비스
보안 취약하고 배터리 소모량 많아 모바일 플랫폼 등장 뒤 내리막길
어도비, 2020년 12월 31일 ‘End Of Life’선언
인터넷 어디에선가 엉덩이를 실룩거리는 토끼가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엽기적인 모습을 보이는 애니메이션을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마시마로, 혹은 흔히 엽기토끼라고 불리던 이 애니메이션은 2000년대 초 한국 인터넷을 휩쓸었다. 마시마로는 당시 대학생이던 김재인 씨가 플래시(Flash) 기술을 이용해 제작한 작품인데, 마시마로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졸라맨, 오인용 등 다양한 플래시 애니메이션이 인기를 끌었다. 또 초기 온라인 게임의 상당수가 플래시로 제작되기도 했고, 파일 업로드 기능과 같은 사용자들은 크게 눈치채지 못하는 크고 작은 기능들이 플래시 기반으로 제작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아마 최근에는 플래시를 설치해달라든지 업데이트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분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많던 플래시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플래시 기술은 1996년 매크로미디어(MacroMedia)에서 출시한 벡터 그래픽 방식의 플랫폼이다. 1989년 팀 버너스리가 고안한 월드와이드웹(WWW)은 1990년대에 걸쳐서 널리 퍼졌지만, 글자와 이미지를 중심으로 표현하는 것에 중점을 뒀고, 이는 WWW를 표현하는 기본 언어인 HTML(Hyper Text Markup Language)의 설계상 한계이기도 했다. 사용자들의 욕구는 글자와 이미지를 보는 것에 만족하는 수준을 금세 넘었고, 음성, 동영상, 그리고 더 복잡한 사용자 인터랙션을 요구하는 기능들을 웹에서 수행하고자 했다. 기본 문자와 이미지 기반의 콘텐츠를 넘어서는 음성과 동영상 등을 리치 콘텐츠(rich contents)라고 불렀는데, 이 리치 콘텐츠를 지원하는 기술의 대표주자가 바로 플래시다. 이후 매크로미디어가 그래픽 회사 어도비 시스템즈(Adobe Systems)에 인수돼 플래시 혹은 어도비 플래시라고도 불린다.
플래시는 웹에서 벡터 그래픽 (Vector Graphic)을 표현하는 초기 중요한 기술 중 하나였다. 벡터 그래픽이란 이미지를 표현할 때 수학 방정식을 기반으로 점·선·면을 표현하는 방법을 말하는데, 미세한 점 하나하나의 위치를 저장해 표현하는 픽셀(pixel) 방식의 그래픽과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이다. 예컨대 마시마로가 화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표현하고 싶다고 하자. 픽셀 방식에서는 움직이는 장면 하나하나마다 1초에 60장씩의 이미지를 각각 찍어 보여줘야 한다면, 벡터 그래픽 방식에서는 마시마로를 그린 수학 공식을 조금씩 변형해서 완전히 같은 이미지를 표현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픽셀 방식에서는 이미지를 크게 보고 싶을 때 화질이 현저히 손상돼 이미지가 계단처럼 보이는 현상들이 일어나는데, 벡터 방식에서는 수학적 표현을 기반으로 그림을 표현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또 플래시는 액션스크립트라고 불리는 기술을 통해 애니메이션을 프로그래밍으로 제어할 수 있어 꽤 완성도 높은 게임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인터랙티브한 화면을 설계하고 구현할 수 있었다.
기본 HTML 환경에서 리치 미디어의 표현이 어려운 이유는 HTML의 태생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문서와 이미지를 연동하기 위해 고안된 초기의 HTML은 개별 웹페이지들의 링크를 연결하는 데 중점을 뒀기 때문에 1990년대가 되면 당연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운영체계의 다양한 기능을 사용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예를 들면 마우스를 드래그해 어떤 기능을 수행하게 한다든지, 사용자가 어떤 선택을 하면 그에 따라 이미지나 문서를 연결해 보여주는 것 이외의 기능들을 수행할 수 없었다. 특히 웹에서 파일을 업로드하거나 동영상을 보여주거나 하는 조금 더 복잡한 기능은 초기 HTML의 설계에서 전혀 고려된 사항이 아니기도 했다. 그 때문에 2000년대 중반에는 플래시를 포함한 다양한 리치 미디어 앱이 난립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5년 등장한 유튜브도 초기 상당 기간 동안 플래시 기술에 기반해 동영상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HTML의 단점을 메우며 한 세대를 풍미했던 플래시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다름 아닌 모바일 플랫폼의 등장 때문이었다. 2007년 등장해 스마트폰 시장을 활짝 열었던 아이폰, 그리고 2010년 소개된 아이패드 운영체제에서 애플은 플래시를 지원하지 않았다. 애플의 입장에서 본다면, 플래시를 지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원하기 어려웠던 것에 가까웠다. 어도비 플래시가 지나치게 강력한 기능을 제공하고 있던 까닭에 상당히 많은 시스템 자원을 사용해야 했고, 그에 따라 모바일에서는 매우 버겁게 동작하고, 또 배터리마저 급속하게 소모되는 문제 많은 앱이었기 때문이다.
또 플러그인 방식이 가진 근본적 문제인 보안 문제도 플래시의 몰락에 크게 한몫했다. 플래시는 기본적으로 웹사이트를 통해 대량으로 유포될 수 있고, 사용자가 웹사이트를 원활하게 이용하기 위해 자동적으로 설치되곤 했기 때문에 오랜 기간 해커들의 주요한 공격 루트였다. 예를 들면 특정 사이트를 해킹해 랜섬웨어(사용자가 돈을 지불하고 잠금을 풀 때까지 컴퓨터 사용을 중지하는 악성 프로그램)가 포함된 플래시를 설치해 두면 해당 사이트에 접속한 모든 이의 컴퓨터에 랜섬웨어가 손쉽게 설치되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어도비 소프트웨어가 가진 특성 탓에 200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알려진 플래시의 보안 취약점은 무려 1000가지가 넘는다.
플래시에 대한 가장 공개적이고 치명적인 공격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애플의 CEO였던 스티브 잡스였다. 2010년 스티브 잡스는 애플 공식 홈페이지에 올린 ‘플래시에 대한 생각’이라는 글에서, 플래시는 특히 모바일 기기의 에너지를 너무 많이 사용하는 데다가 매우 불안정하고, 보안에 심각한 문제가 있으며, 모바일 환경에서 무척 중요한 스크린 터치를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애플은 플래시를 절대로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매우 공격적인 성명을 냈다. 애플 외부의 반응은 애플이 자신들의 기술적인 한계를 플래시의 탓으로 돌리며, 잘 사용되고 있는 하나의 중요한 툴을 죽이고 있다는 의견이 초기에는 많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스티브 잡스가 결국 옳았음이 드러났다. 플래시의 훌륭한 기능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특히 플러그인의 불안정성과 보안 문제는 사실상 해결 방법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모바일 시장이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애플의 선언은 플래시 기술의 문제를 매우 공개적이고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애플의 발표 이후 불과 1년 뒤인 2011년 어도비는 웹 플러그인 형태의 플래시를 더 이상 개발하지 않겠다고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HTML의 새로운 버전인 HTML5의 표준화 논의는 급물살을 타게 됐는데, 스티브 잡스가 앞의 입장문에서 HTML5를 대안으로 명확하게 명시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구글 등 주요한 브라우저들도 HTML5를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HTML5는 플래시보다는 훨씬 큰 범위의 표준이지만, 플래시가 사라지는 상황에서 HTML5가 제공하는 멀티미디어 관련 기능은 충분히 플래시를 대체할 수 있었다. 유튜브도 2015년부터는 완전히 HTML5를 기반으로 동영상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전 세계 웹사이트 전반에 깔려 있는 플래시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도비는 애초 2017년에 플래시를 완전히 없애겠다는 공표를 했던 바 있는데, 2017년이 다가오자 온갖 항의가 이어져 이를 몇 년 늦출 수밖에 없었다. 십수 년에 걸친 동안 상당히 많은 웹사이트가 플래시를 기반으로 동작하고 있었고,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모든 플래시로 구현된 기능을 전부 완전히 다시 개발하는 것도 상당한 작업을 요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국내에서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플래시 퇴출을 위한 캠페인을 해야 할 정도였는데, 2019년에만 해도 민간 500대 웹사이트의 30% 이상이 여전히 플래시를 사용한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였다.
2020년 12월 31일, 어도비는 플래시가 제품의 수명이 완전히 끝났음을 알리는 EOL(End-Of-Life) 선언을 했다. 이에 맞춰 크롬 브라우저를 포함한 주요 브라우저들 역시 더 이상 브라우저상에서 플래시의 설치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공지하면서 플래시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2011년 플래시를 더 이상 개발하는 것에 투자하지 않을 것을 천명했던 어도비로서는 아마도 속 시원한 일이었을 것이고, 브라우저들도 큰 보안 문제의 원흉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어 한숨을 돌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사실 크게 아쉬워했던 이들은 사용자들이었다. 사용자들 입장에서는 기술 자체보다야, 한 시대를 함께했던 문화의 기반이 사라지는 것에 더 아쉬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인터넷 아카이브(Internet Archive)에는 사용자들의 열정적인 참여로 다른 사라진 포맷들보다 월등히 많은 8000여 개의 플래시가 등록돼 있다. 플래시는 인터넷 초창기에 웹상에서 그림과 이미지의 한계를 넘어서는 기반을 제공해준 하나의 기술적 플랫폼이자, 또 한편으로 웹에서 무엇이 가능할 것인가를 보여준 웹 문화의 캔버스이기도 했던 것이다.
박동오 사회정보학 박사, 기술정책자문
■ 용어설명 - 웹 2.0
웹의 시대구분에는 많은 논쟁이 있지만, 통상 이미지와 문자 중심의 사실상 단방향인 웹 1.0에 대비해 참여·개방·소통을 추구하며 사용자와의 인터랙션을 보다 강조한 웹 특성을 웹 2.0이라고 부른다.
플래시는 웹 2.0 환경의 핵심 도구 가운데 하나였다. 최근 차세대 웹 환경으로 웹 3.0이 언급되며 다시 회자되고 있는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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