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먼저일까, 이야기가 먼저일까[양다솔의 기지개 켜기](7)
2022. 7. 4. 08:08
좋은 작가를 만드는 법
여러 은행에서 비싼 이율로 최대한도까지 대출받고 동시에 월세까지 내느라 한 달 월급의 반을 집에 써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이쪽에서 저쪽까지 일곱 걸음이면 왕복하고 가지고 있던 침대는 들어가지도 않았으며 살림의 대부분은 버려야 했지만 문제없었다. 마루에 앉으면 시커먼 앞집의 시멘트벽이 시야에 들어왔고 마당이라고 하나 사실상 주먹만 한 땅뙈기인 것쯤 안 본 척할 수 있었다. 미음(ㅁ) 자 구조나 커다란 대청마루 같은 것이 있기라도 하다면 ‘나의 현실’과는 급격히 멀어지는 일이니 오히려 위안이 됐다.
이사 반복될수록 가난의 굴레 깊어져
깜짝 선물처럼 나타난 미니 한옥은 온갖 무리를 해서라도 붙잡고 싶은 동아줄이었다. 그렇게 한껏 부풀어진 꿈이 현실이 되기 직전 밥상을 엎듯 상황을 뒤집어 버린 건 엄마였다. 그는 마치 저주를 외는 듯했다. “월세로 시작하면 평생 월세로 살아. 쥐꼬리만 한 월급의 절반을 남지도 않을 돈에 지불하면서 너는 평생 빚더미에 쫓기고 갈수록 쳇바퀴 굴리듯이 허덕이면서 살게 될 거다.” 그의 말이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다는 걸 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독립한 지 10년에 가까운 지금, 죽기보다 가기 싫은 직장에 꼬박 2년을 말뚝 박고 버틸 줄 아는 어른이 됐다. 오롯이 전세자금 대출 연장을 위해서다.
이사를 한 후 1년간은 한푼도 저축할 수 없었다. 모두 이사 비용을 갚는 데 썼기 때문이다. 이사에는 1t 트럭과 사다리차, 성인 남자 넷과 여자 한명의 도움이 필요했다. 1인 가구라 해서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하라는 법은 없건만 실로 모든 과정을 혼자서 했다. 살던 집의 세입자를 구하고, 새로운 집을 알아보고, 등기부등본을 떼어보고, 대출을 신청하고, 계약금을 구하고, 이삿짐센터를 알아보고, 고장 난 가구를 중고로 교체하고, 이삿짐을 싸고, 이삿날 일해주시는 분들의 점심을 사는 일까지 모두 혼자였다. 혼이 나간 얼굴로 부유하듯 다녔으며 툭하면 코피가 났고 손에 구멍이 난 것처럼 물건을 잃어버렸다. 보다 못한 친구들이 이사 현장에 하나둘 찾아왔다. 모두 여자였다는 이유로 그들은 센터 아저씨로부터 “기쁨조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세상 사람들이 이런 과정을 거치고도 살아 있다는 사실에 경이를 느꼈다. 몸과 마음의 수명을 크게 단축하는 일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반복될수록 가난의 굴레에 깊게 빠져들고 말리란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이사하지 않는 삶이 바른 삶이요, 옳은 삶이고, 행복한 삶이었다.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사실이었다.
주거 이전의 자유는 너무 자주 돌아왔다. 2년마다 돈이냐, 명줄이냐의 갈림길에 섰다. 집주인이 올려달라는 금액만큼 올려줄 능력이 용케 된다면 머물 수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기는 어려웠다. 연봉의 상승 폭에 비해 보증금의 상승 폭은 눈에 띄게 가팔랐다. 떠나야 했고, 그나마 채워졌던 곳간은 텅텅 비게 됐다. 이사의 이유는 많았다. 회사가 멀어서, 보증금이 비싸져서, 집의 환경이 안 좋아서. 그 무엇보다 내 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드는 집
지금의 집이 없었다면 작가가 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창문이 없었다면, 거실에 커다란 책상이 없었다면 쓸 수 없었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중소기업에 재직한 청년들에게 적은 이율로 전세 보증금을 대출해주는 제도가 없었다면 책이 나오지 못했을 거라고 100% 확신한다. 스무 살이 되면 독립하라는 말을 여섯 살부터 들어왔으니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을 했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독립하고 지금까지 한 번도 자취하는 마음인 적이 없었다. 중고로 양문형 냉장고와 세탁기를 샀고, 혼자 옮길 수 없는 크기의 식물이 즐비했으며 온갖 가전제품과 커다란 들통 냄비, 돌침대, 통나무 책상, 다도(茶道) 상이 있었다. 그야말로 평생 거기서 그렇게 살 사람처럼 살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내 인생의 풍경이 거기 있었다. 집은 밥 먹고 잠만 자는 공간이 아니라 창문 밖으로 들어온 볕도 쬐고, 바람도 쐬고, 책도 읽고 차도 마시는 공간이 됐다. 사고 싶은 책이 있으면 사고, 환기가 필요하면 가구 배치도 바꿔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순환할 힘을 냈다. 끔찍한 직장생활을 견뎌냈고, 막막한 백수 생활도 탈 없이 보낼 수 있었다. 이야기를 만드는 힘은 그사이 어딘가에서 피어났다.
그렇게 다시금 이사철이 돌아왔다. 덕분에 벌써 잠을 이루지 못한다. 코로나19 이후 경기 침체와 물가 인상으로 안 그래도 높던 집값은 천정부지로 날아올랐다. 통장 잔고와 서울의 집값은 서로 등을 지고 달리고 있었다. 직장인도 아닌 채 이사를 앞두고 있으려니 마음에 돌이라도 얹은 듯했다. 말이 좋아 작가이지 은행에서 내 신분은 무직자다. 아무리 성실하게 일한다고 해도 소속과 꾸준한 소득이 없는 신분으로 대출의 문턱을 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다양한 직업을 시도하고 N잡러가 대세로 떠오르는 요즘 세대에게는 정말이지 현실적이지 못한 환경이 아닐 수 없다. 지낼 공간도 마련할 수 없는데 누가 감히 모험을 하려 들까. 좋은 공간을 가질 수 없는 프리랜서가 얼마나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을까. 빛과 바람이 들지 않는 집에서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을까.
얼마 전 대선을 앞둔 선거운동 기간에 MZ세대의 한명으로 주요 후보와 대담할 기회를 가질 뻔한 적이 있다. 세대를 대표하는 문제이니 팔을 걷고 주변 친구들에게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를 묻고 다녔다. 한명도 빠짐없이 ‘주거 문제’를 제일 먼저 꼽았다. 모두 미래의 보금자리를 위해 현재를 기꺼이 희생할 만큼 정직하고 성실한 이들이다. 아늑한 보금자리는 한 사람의 삶을 좌우한다. ‘오늘밤은 어디서 자게 될까?’라는 생각은 무전여행을 할 때만 하게 될 줄 알았다. 삶은 여행이라는 표현이 이렇게 다층적으로 맞을 줄은 몰랐다. 내년이면 어디에서 살게 될까. 언제쯤 여행이 끝나고 집에 갈 수 있을까. 모두에게 커다란 창문과 튼튼한 책상이 주어졌다면 나올 수 있었을, 좋은 이야기들을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답이 정해진 질문을 한다. 좋은 작가가 탄생하려면 과연 집이 먼저일까, 이야기가 먼저일까.
양다솔 작가
서울 종로구 어딘가에는 내가 거의 살 뻔한 한옥이 있다. 막 첫 직장을 구해 부천에서 강남으로 3시간씩 ‘대륙이동’을 하던 나는 세상 모든 회한과 우울을 품고 살았다. 그때 대문과 기와지붕, 대들보와 서까래, 문설주만 보고 당장 계약금을 지불했다. 운치 있는 동네의 한옥에 살다니 그야말로 꿈 같은 일이었다. 드디어 세상과 내가 주고받는 것이 비슷한 등가 교환의 관계로 접어들 수 있겠다 싶었다. 거기서라면 지옥 같은 사회생활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퇴근 후에 거실에 앉아 기와지붕에 걸친 하늘을 올려다보면 내 인생도 제법 괜찮아 보이겠거니 생각했다.
여러 은행에서 비싼 이율로 최대한도까지 대출받고 동시에 월세까지 내느라 한 달 월급의 반을 집에 써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이쪽에서 저쪽까지 일곱 걸음이면 왕복하고 가지고 있던 침대는 들어가지도 않았으며 살림의 대부분은 버려야 했지만 문제없었다. 마루에 앉으면 시커먼 앞집의 시멘트벽이 시야에 들어왔고 마당이라고 하나 사실상 주먹만 한 땅뙈기인 것쯤 안 본 척할 수 있었다. 미음(ㅁ) 자 구조나 커다란 대청마루 같은 것이 있기라도 하다면 ‘나의 현실’과는 급격히 멀어지는 일이니 오히려 위안이 됐다.
이사 반복될수록 가난의 굴레 깊어져
깜짝 선물처럼 나타난 미니 한옥은 온갖 무리를 해서라도 붙잡고 싶은 동아줄이었다. 그렇게 한껏 부풀어진 꿈이 현실이 되기 직전 밥상을 엎듯 상황을 뒤집어 버린 건 엄마였다. 그는 마치 저주를 외는 듯했다. “월세로 시작하면 평생 월세로 살아. 쥐꼬리만 한 월급의 절반을 남지도 않을 돈에 지불하면서 너는 평생 빚더미에 쫓기고 갈수록 쳇바퀴 굴리듯이 허덕이면서 살게 될 거다.” 그의 말이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다는 걸 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독립한 지 10년에 가까운 지금, 죽기보다 가기 싫은 직장에 꼬박 2년을 말뚝 박고 버틸 줄 아는 어른이 됐다. 오롯이 전세자금 대출 연장을 위해서다.
이사를 한 후 1년간은 한푼도 저축할 수 없었다. 모두 이사 비용을 갚는 데 썼기 때문이다. 이사에는 1t 트럭과 사다리차, 성인 남자 넷과 여자 한명의 도움이 필요했다. 1인 가구라 해서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하라는 법은 없건만 실로 모든 과정을 혼자서 했다. 살던 집의 세입자를 구하고, 새로운 집을 알아보고, 등기부등본을 떼어보고, 대출을 신청하고, 계약금을 구하고, 이삿짐센터를 알아보고, 고장 난 가구를 중고로 교체하고, 이삿짐을 싸고, 이삿날 일해주시는 분들의 점심을 사는 일까지 모두 혼자였다. 혼이 나간 얼굴로 부유하듯 다녔으며 툭하면 코피가 났고 손에 구멍이 난 것처럼 물건을 잃어버렸다. 보다 못한 친구들이 이사 현장에 하나둘 찾아왔다. 모두 여자였다는 이유로 그들은 센터 아저씨로부터 “기쁨조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세상 사람들이 이런 과정을 거치고도 살아 있다는 사실에 경이를 느꼈다. 몸과 마음의 수명을 크게 단축하는 일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반복될수록 가난의 굴레에 깊게 빠져들고 말리란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이사하지 않는 삶이 바른 삶이요, 옳은 삶이고, 행복한 삶이었다.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사실이었다.
주거 이전의 자유는 너무 자주 돌아왔다. 2년마다 돈이냐, 명줄이냐의 갈림길에 섰다. 집주인이 올려달라는 금액만큼 올려줄 능력이 용케 된다면 머물 수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기는 어려웠다. 연봉의 상승 폭에 비해 보증금의 상승 폭은 눈에 띄게 가팔랐다. 떠나야 했고, 그나마 채워졌던 곳간은 텅텅 비게 됐다. 이사의 이유는 많았다. 회사가 멀어서, 보증금이 비싸져서, 집의 환경이 안 좋아서. 그 무엇보다 내 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드는 집
지금의 집이 없었다면 작가가 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창문이 없었다면, 거실에 커다란 책상이 없었다면 쓸 수 없었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중소기업에 재직한 청년들에게 적은 이율로 전세 보증금을 대출해주는 제도가 없었다면 책이 나오지 못했을 거라고 100% 확신한다. 스무 살이 되면 독립하라는 말을 여섯 살부터 들어왔으니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을 했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독립하고 지금까지 한 번도 자취하는 마음인 적이 없었다. 중고로 양문형 냉장고와 세탁기를 샀고, 혼자 옮길 수 없는 크기의 식물이 즐비했으며 온갖 가전제품과 커다란 들통 냄비, 돌침대, 통나무 책상, 다도(茶道) 상이 있었다. 그야말로 평생 거기서 그렇게 살 사람처럼 살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내 인생의 풍경이 거기 있었다. 집은 밥 먹고 잠만 자는 공간이 아니라 창문 밖으로 들어온 볕도 쬐고, 바람도 쐬고, 책도 읽고 차도 마시는 공간이 됐다. 사고 싶은 책이 있으면 사고, 환기가 필요하면 가구 배치도 바꿔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순환할 힘을 냈다. 끔찍한 직장생활을 견뎌냈고, 막막한 백수 생활도 탈 없이 보낼 수 있었다. 이야기를 만드는 힘은 그사이 어딘가에서 피어났다.
그렇게 다시금 이사철이 돌아왔다. 덕분에 벌써 잠을 이루지 못한다. 코로나19 이후 경기 침체와 물가 인상으로 안 그래도 높던 집값은 천정부지로 날아올랐다. 통장 잔고와 서울의 집값은 서로 등을 지고 달리고 있었다. 직장인도 아닌 채 이사를 앞두고 있으려니 마음에 돌이라도 얹은 듯했다. 말이 좋아 작가이지 은행에서 내 신분은 무직자다. 아무리 성실하게 일한다고 해도 소속과 꾸준한 소득이 없는 신분으로 대출의 문턱을 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다양한 직업을 시도하고 N잡러가 대세로 떠오르는 요즘 세대에게는 정말이지 현실적이지 못한 환경이 아닐 수 없다. 지낼 공간도 마련할 수 없는데 누가 감히 모험을 하려 들까. 좋은 공간을 가질 수 없는 프리랜서가 얼마나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을까. 빛과 바람이 들지 않는 집에서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을까.
얼마 전 대선을 앞둔 선거운동 기간에 MZ세대의 한명으로 주요 후보와 대담할 기회를 가질 뻔한 적이 있다. 세대를 대표하는 문제이니 팔을 걷고 주변 친구들에게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를 묻고 다녔다. 한명도 빠짐없이 ‘주거 문제’를 제일 먼저 꼽았다. 모두 미래의 보금자리를 위해 현재를 기꺼이 희생할 만큼 정직하고 성실한 이들이다. 아늑한 보금자리는 한 사람의 삶을 좌우한다. ‘오늘밤은 어디서 자게 될까?’라는 생각은 무전여행을 할 때만 하게 될 줄 알았다. 삶은 여행이라는 표현이 이렇게 다층적으로 맞을 줄은 몰랐다. 내년이면 어디에서 살게 될까. 언제쯤 여행이 끝나고 집에 갈 수 있을까. 모두에게 커다란 창문과 튼튼한 책상이 주어졌다면 나올 수 있었을, 좋은 이야기들을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답이 정해진 질문을 한다. 좋은 작가가 탄생하려면 과연 집이 먼저일까, 이야기가 먼저일까.
양다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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