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 인플레이션, 바이든 삼켜버리나
2022. 7. 4. 08:07
“고물가를 잡기 위한 전 세계적 고금리 정책에 따른 자산가격 조정 국면이기 때문에 우리 경제정책 당국이라고 해서 근본적인 해법을 내기는 어렵다.”
국내 ‘물가 상승’에 대한 대응책을 묻는 질문에 지난 6월 21일 윤석열 대통령이 내놓은 대답이다. 복잡한 단어를 사용해 말했지만 핵심은 단순하다.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물가가 상승하는 ‘인플레이션’이 진행 중이다.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플레이션 장기화 전망이 고개를 들면서 자산시장 전반이 침체되고 있다. 당장 영향을 받은 것은 실물경제에 선행하는 주식시장이다. 6월 30일 기준, 미국 S&P500 지수와 나스닥 지수가 연초 고점 대비 20% 넘게 내렸다. 한국 시장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3000포인트를 넘나들던 코스피가 2300포인트대로 떨어졌고, 1000포인트를 넘던 코스닥 지수도 700포인트대로 빠졌다. 특히 윤 대통령의 발언이 나온 뒤 이틀 동안 코스닥 지수는 10% 가깝게 폭락했다. 반면 개별 주식 종목이 하락할 것으로 예상하고 주식을 빌려 내다 파는 ‘공매도’는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난 4월, 코스피 기준 3.91%로 낮아진 공매도 거래 비중이 3개월 연속 오름세를 보이며 6월에는 월평균 5%를 넘겼다.
주식시장이 인플레이션의 ‘직격탄’을 맞은 건 미국이 물가 상승의 주요 대안으로 ‘금리 인상’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41년 만에 최고치인 8.6%를 기록했다. 미 연방준비제도는 기준금리를 0.75%포인트 올리는 ‘자이언트 스텝’을 단행하며 물가 방어에 나섰다.
금리 상승은 두가지 측면에서 주식시장에 직접적 영향을 끼친다. 우선 기업이 운영이나 투자를 위한 자금조달에 필요한 비용이 늘어난다. 이로 인해 성장을 위해 투자가 필요한 기술주가 일반적으로 큰 영향을 받는다.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이나 코스닥 시장이 금리 인상에 취약한 건 이 때문이다. 또 투자심리가 나빠진다. 금리가 올라가면 상대적으로 위험한 주식시장에 굳이 투자할 이유가 없다. 이윤을 보장하는 은행 예금을 선호하게 된다.
보다 거시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간접적 영향도 있다.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적 차원의 환율 문제다. 미국 금리가 상승하면 달러 수요가 올라간다. 인플레이션으로 변동성이 커지는 상황은 안전자산인 달러 수요를 높인다. 이러한 상황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는 사례로 확인할 수 있다. 6월 말 기준, 원·달러 환율이 1300원대에 육박하고 있다. 같은 시기,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4477억달러로 연초 대비 154억달러 정도 감소했다.
한국은행이 발표하는 국제금융 외환시장 동향에 따르면 올해 1~5월 외국인 증권투자자금은 약 95억달러 순유출됐다. 지난 6월 17일, 6년여 만에 삼성전자의 외국인 지분율도 50%선이 무너졌다. 한국 주식시장에 투자했던 외국인 자금이 달러화를 인출해 빠져나갔다는 뜻이다. 인플레이션→미국발 금리 상승→환율 상승→주식 등 자본시장 위축의 구조적 연결성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 연쇄효과는 경기둔화 혹은 침체다. 인플레이션이 꺾일 때까지 이런 흐름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만약 경기침체를 외부충격 없이 오직 시장 내부의 조정만으로 버틴다면 그 끝이 언제일지조차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주목받는 것이 ‘외부충격’, 즉 국제정치의 향방이다.
푸틴플레이션과 미국의 딜레마
이번 인플레이션의 근본 원인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코로나19 사태로 시장에 풀린 막대한 유동성이 물가 상승의 근원이라는 주장이 있다. 반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촉발된 상황이 인플레이션을 불렀다는 이른바 ‘푸틴플레이션’(러시아 푸틴 대통령과 인플레이션을 합친 용어)을 지적하는 주장도 있다. 현재는 두 측면 모두 인플레이션에 영향을 주고 있다. 하지만 문제의 근원이 각각 자본시장과 국제정치에 있다는 점에서 대응 방법은 차이를 보인다.
미국은 지난 5월 발생한 CPI 지수의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아직까지 해당 조치로 인한 가시적 변화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미국 소비자들이 향후 경기회복 가능성을 어떻게 보는지를 나타내는 소비자신뢰지수와 소비자심리지수가 모두 악화일로다. 이는 자본시장의 내부 조치만으로 문제에 접근했을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악순환이다. 인플레이션을 잡겠다고 금리를 인상하면 소비자 심리가 얼어붙고, 실제 소비가 위축되면서 경기침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금리 인상 외에도 시장에 인플레이션 둔화를 확신시켜줄 수 있는 정부 차원의 조치가 필요하다. 결국 ‘유가 인하’가 핵심이다.
5월 미국 CPI 지수의 세부 항목을 뜯어보면, 에너지 관련 상승이 34.6%로 가장 높다. 원유가격을 잡지 않으면, CPI 지수가 쉽게 내려갈 수 없다는 의미다. 문제는 국제유가가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공급 우려에 휩싸여 있다는 점이다. 원유 생산량의 빅3는 미국,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다. 2050년 탄소 배출 제로 정책을 목표로 하는 미국의 민주당 정부는 원유 생산을 위한 인프라 확대에 소극적이다. 그렇다면 사우디 혹은 러시아를 통해 원유 공급량을 늘려야 한다. 여기서 미국의 딜레마가 발생한다.
사우디에 바라는 것이 ‘인권’이냐, ‘원유’냐
사우디 왕가의 실권자는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2018년 튀르키예(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사우디 영사관에서 발생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사건의 배후로 지목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사우디의 인권 상황을 비판하며 “사우디 왕족 가문이 대가를 치르게 하고 그들을 왕따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인권, 민주주의 가치 등을 강조하는 바이든 대통령의 정적인 셈이다.
현재 전 세계에서 원유 생산을 늘릴 수 있는 국가는 사우디가 거의 유일하다. 이 때문에 오는 7월, 바이든 대통령의 중동 방문 일정에 사우디가 포함된 것을 두고 관계개선을 위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논란이 일자 바이든 대통령은 “내가 해온 것과 같은 방식으로 (카슈끄지 문제를) 다룰 것”이라며 “나는 MBS(무함마드 왕세자 약칭)를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처한 상황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오는 11월이면 미국 중간선거(대통령 임기 중간에 있는 상·하원 선거)가 있다.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은 30% 후반에 머물러 있다. 지지율 하락 원인으로는 인플레이션이 야기하는 ‘경제문제’가 첫 손에 꼽힌다. 특히 전미자동차협회(AAA)에 따르면 지난 6월 11일(현지시간) 미국의 휘발유 평균가격이 사상 최초로 1갤런당 5달러를 돌파했다. 특별한 조치가 없다면 중간선거뿐만 아니라 바이든 대통령의 재선도 장담할 수 없다.
사우디의 조력이 필요한 상황에서 미묘한 정황은 또 발견된다. 사우디와 이란은 각각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를 이끄는 대표 국가다. 두 국가는 중동의 패권을 놓고 앙금이 깊다. 사우디는 이란 제재 해제를 의미하는 핵 합의 복원(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이 달가울 리 없다. 그런데 묘한 상황이 연출됐다. 미국이 추진해온 이란 핵 합의 복원이 계속해서 교착 상태에 빠지고 있다. 지난 6월 28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이란과 미국의 협상도 결론 없이 끝났다. 이런 상황에서 이란은 러시아가 주축인 신흥경제 5개국 모임 ‘브릭스(BRICS)’에 가입 신청을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자의든, 타의든 사우디와의 관계개선을 고려해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다.
러시아 잡으려다 ‘신냉전’ 시작하나
원유 증산 측면에서 미국에 더욱 큰 난관은 러시아다. 사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없었다면 물가 상승 문제는 연착륙했을지도 모른다. 즉 전쟁을 끝내야 현 상황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문제는 미국이 우크라이나 사태를 중재할 수 없을 만큼 점점 더 깊이 연루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지난 6월 29~30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는 나토 회원국과 러시아, 중국의 대립 구도를 보다 선명하게 만들었다. 나토는 2010년 이후 12년 만에 ‘전략개념’을 재정립하며 중국과 러시아를 각각 언급했다. 중국에 대해서는 “우리의 이익과 안보, 가치에 도전한다”고 했고, 러시아는 “동맹의 안보와 유럽·대서양의 평화·안정에 가장 중대하고 직접적인 위협”이라고 규정했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나토와 러시아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나토를 위협하는 또 다른 요인으로 중국을 추가한 셈이다.
이러한 움직임에도 러시아가 실질적 타격을 입었다는 정황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미국은 러시아의 자금줄을 옭아매려고 했다. 이를 위해 러시아 재정 수입의 45% 가까이 차지하는 석유 및 가스 수출을 제재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3월 8일 러시아에서 원유, 천연가스, 석탄 및 기타 관련 제품을 수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러시아산 원유의 공급 축소가 오히려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들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공급 축소로 원유가격이 폭등하자 자국산 원유를 덤핑된 가격으로 내다 팔기 시작했다. 브렌트, 서부 텍사스(WTI), 두바이산보다 배럴당 30달러 이상 싼값에 팔았지만 폭등한 원유가격 덕분에 손해를 보지 않았다. 해당 물량은 중국, 인도, 브라질 등 러시아와 가까운 브릭스(BRICS) 국가들이 수입했다. 실제로 인도는 지난달 하루 평균 약 80만배럴의 석유를 수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0배 가까이 증가한 수치다. 인도는 러시아산 석유를 사들여 정제한 뒤 유럽과 미국에 재판매한다는 의심까지 받고 있다. 데이터분석업체인 CEIC의 통계에 따르면 러시아의 경상수지는 올해 1~5월 기준, 1103억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322억달러보다 3배가량 커진 규모다.
미국은 뒤늦게 제재를 강화하고 나섰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러시아산 원유에 대한 가격상한제 합의를 이끌었다. 러시아산 원유에 일정 가격 이상으로 입찰하지 않는 방식의 제재다. 구체적인 시행안은 유럽연합(EU)이 마련하기로 했다. 하지만 유럽연합 내부에서도 각각의 이해관계가 달라 언제, 어떤 제재안을 도출해낼지 알 수 없다.
반면 러시아는 탄탄한 재정을 과시 중이다. 러시아 재무부에 따르면 러시아산 원유의 가격은 1배럴당 87.49달러(약 11만3000원)로 한 달 전보다 20% 가까이 상승했다. 브렌트유 가격은 지난 6월 29일 기준 1배럴당 약 113달러였다. 격차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는 러시아산 원유의 수요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의미다. 루블화의 가치 역시 같은날 기준 1달러당 51.92루블로 강세를 보였다. 전쟁 초 루블화는 1달러당 110루블을 넘나들 정도로 불안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사태에 직접적인 군사 개입을 하지 않고 있다. 사실상 ‘대리전’을 벌이는 중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사우디를 방문하면서도 우크라이나는 방문하지 않는다. 미국이 전쟁을 두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이, 흔들리는 것은 러시아나 중국이 아닌 미국의 우방국이다.
인도, 튀르키예 사례는 한국에 무엇을 말하나
인도는 미국이 추진하는 대(對)중국 견제의 핵심이다. 미국·일본·호주와 함께 4개국 안보 협의체인 쿼드 회원국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인도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두고 미국과 다른 계산을 하고 있다. 스스로 러시아산 원유 수출의 ‘뒷문’이 됐다. 이러한 인도의 행보에는 지정학적 위치를 이용한 자신감이 있다. 미국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을 남중국해 안에 가둬야 한다. 이때 인도는 중국이 인도양으로 빠져나오는 길을 봉쇄하는 ‘린치핀(핵심축)’이다. 인도는 러시아산 원유를 수입해도 미국의 제재를 받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이 있다. 인도가 브릭스 회원국이라는 점 역시 운신의 폭을 넓힌다. 브릭스 역시 경제안보로 협력을 확대하고 있는 만큼 미국이 인도의 행보를 제재할 명분도 마땅치 않다.
튀르키예 역시 비슷한 사례다. 나토 정상회의에서 튀르키예는 핀란드와 스웨덴의 나토 가입에 반대했다. 튀르키예 내부의 분리독립 세력인 쿠르드족을 지원한다는 이유다. 새 회원국 가입 시 만장일치 찬성이 필요한 나토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 설득에 나섰다. 윤 대통령과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의 면담 연기도 이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튀르키예는 핀란드와 스웨덴의 나토 가입에 찬성했다. 대신 양국에 쿠르드노동자당(PKK)과 페토(FETO·펫훌라흐 귈렌 테러조직) 관련자의 송환을 요청했다. 또 미국에는 F-16 전투기의 현대화 및 추가 도입을 요구했다. 인도와 튀르키예는 미국의 필요를 이용해 원하는 바를 얻어내고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 6월 27일 나토 참석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정상들) 얼굴이나 익히고 간단한 현안들이나 좀 서로 확인하고 다음에 다시 또 보자는 그런 정도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실상 윤 대통령은 나토가 중·러 견제를 발표하는 자리에 함께 서 있게 됐다. ‘얼굴을 익히는 자리’가 아니라 ‘신냉전’의 시발점이 될 수 있는 무대에 참석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무엇을 얻어냈을까.
한국의 5월 물가상승률은 5.4%로 14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6월에는 6%대에 이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소비자물가 상승률과 실업률을 더한 ‘경제고통지수’는 5월 기준으로 21년 만에 최고 수준인 8.4를 기록했다. 기름값은 2000원대에서 좀처럼 내릴 기미가 안 보인다. 원·달러 환율은 6월 29일 기준 1299원을 기록했다. 인플레이션을 두고 “방법이 없다”던 대통령과 달리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과도한 임금 인상을 자제해달라”고 말했다. 이왕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겠다면 환율방어를 위한 외교적 대책이라도 모색해야 할 시기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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