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한 검사, 무서운 검사? ..그는 '사람을 사랑하는 검사'
[인터뷰] <슬기로운 검사생활> 펴낸 정거장 서울중앙지검 검사
[더팩트ㅣ장우성 기자] 검사의 언어는, 특히 글은 어렵고 무겁다. 김훈이 검사가 돼도 공소장을 술술 읽히게 쓸 재간은 없으리라. 그래서 검사는 대개 냉철하고 엄격한 구름 위의 ‘칼잡이’로 인식된다.
거대한 스프링클러가 된 여름하늘이 폭우를 토해내던 날, 베일 것 같은 직사각형 위엄을 내뿜는 서울중앙지검 청사에 들어섰다. 무표정한 복도에 굳게 닫힌 철문을 하나 둘 지나치니 어서 오라는 듯 활짝 열린 방 하나가 반겼다. 단정한 와이셔츠 차림의 청년 검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군가는 주눅이 들어 조사 받으러 왔을 곳인데 그의 미소 때문인지 푸근했다.
정거장 검사를 인터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그의 책 <슬기로운 검사생활>을 읽고 난 뒤였다. 십중팔구 어느 인기 드라마를 떠올리게 하는 작명 이상 강렬했다. 딱딱한 공소장, ‘징역 ◯년’에 처해주기 바란다는 건조한 어조로 기억되는 법률가가 썼다고 믿기지 않는 유려함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7년차 검사의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건과 에피소드는 대한민국에 2000명 뿐인 엘리트 중 한 명의 무용담이라기보다는 사람에 대한 고뇌와 애정이 묻어나는 고백이었다.
정거장. 본명인 그의 이름부터 다른 느낌이다. 나라를 구하는 큰 장수가 되라며 아버지가 지어주셨다. 하지만 책을 덮으면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쉬어갈 수 있다는 편안함을 주는 ‘정거장’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이름 때문에 놀림 당한 코흘리개 시절은 없었을까 염려됐지만 "리 단위 시골에서 커서 친구들이 정거장이 뭔지 몰랐다"며 유쾌하게 웃는다.
변변치는 못하지만 명색이 글밥을 먹고사는 기자인 탓에 어떻게 글을 잘 쓰게 됐는지 궁금했다. 부지런한 다독가이거나 주경야독하며 습작하는 숨은 문학청년이 아닐까 짐작했다.
"제가 글을 잘 쓴다고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초등학교 때부터 일기를 써오기는 했는데요. 검사가 된 이후에는 자주 쓰지 못합니다."
‘야마’를 뽑아야하는 기자에게 흡족한 답변은 아니었지만 겸양이라는 증거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평소 즐겨 읽는다는 박완서의 글처럼 그에게는 어색하지 않은 따뜻함이 묻어난다. 또 단순한 기교보다는 검사로서 삶을 마주하는 생각의 깊이가 정 검사 글의 매력이다.
합의금 몇 푼이 모자라서 전과자가 될 처지에 놓인 피의자에게 검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 정 검사는 중고거래 사기로 입건돼 검찰청을 나서는 대학생을 뒤따라가 ‘형으로서 주는 거니 나중에 성공하면 어려운 사람에게 쓰라’며 10만원을 쥐어줬다. 여기까지였다면 해피엔딩. 그러나 그 대학생은 반년 뒤 같은 범행으로 구속돼 다시 정 검사 앞에 앉아 펑펑 울었다.
"그를 다시 마주했을 때는 배신감이 좀 있었어요.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게 잘못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래도 백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바뀔 수 있다면 노력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었어요. 검사라는 직업에 거는 국민의 기대가 그런 것 아닐까요. 똑같은 상황이 와도 그런 선택을 할 것 같습니다."
별 죄의식없이 상비약용으로 양귀비를 키우다 대마관리법 위반으로 적발된 시골 노인들. 정 검사는 촌로들을 검찰청으로 소환하기보다는 '계장님'과 하루에 버스가 두 번 다니는 두메산골로 찾아간다. ‘검사 영감이 나를 잡으러 왔다’고 울먹이는 할머니를 달래고 타인에게 출석을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의 무게를 되새긴다. 검사 생애 처음 구속시킨 피의자의 어머니가 탄원서를 움켜쥔 채 무릎 꿇고 자식은 흐느끼는 광경에서 ‘내 손에 다른 사람의 피를 묻히는 일’의 책임감을 스스로 되묻는다.
"여러 선배들에게 배운 결과에요. 선배들이 항상 하시는 말씀이 검사에게는 종이더미 위 사건이 당사자에게 피가 마르는 일생일대 사건이라는 거죠. 사건 처리할 때 잠을 줄이더라도 조금 더 생각해보게 되죠. 재판 전 마지막으로 진실을 확인하는 곳이 검찰청이잖아요. 처음에 의식적으로 해보다가 지금은 자연스러워졌죠."
정 검사의 의젓함에는 이유가 있다. 한 번 들으면 잊지 않을 이름을 지어주신 아버지가 음주운전 피해 사망자였다는 아픔이다. 어른이 돼도 절대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선배 검사들도 술잔을 마다하는 초임검사를 나무라기는커녕 인정해줬다. 드물게 '흑기사'가 필요할 때도 있었지만. 다만 사람인데 같은 사건을 대할 때는 평정심을 잃지 않을까.
"그럴수록 더 개인적인 이유로 감정적으로 사건을 처리하지 않도록 하고 있죠. 음주 사건은 제가 맡은 여러 사건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그는 항상 성찰하려는 검사다. 사람들의 치를 떨게 만들었던 ‘안인득 방화 살인 사건’의 주임검사로서 주저없이 사형을 구형했지만 극형이 어루만지지 못하는 여백을 되돌아보고, 말기암 피해자에게 삶의 의지를 불어넣어준 레브라도리트리버를 개소주로 만든 지적장애인 앞에서는 '내가 반려동물을 키우기 때문은 아닌지' 사건기록을 몇 번이고 들춰보는 그런 검사다. 언론에 등장하는 일부 권력지향적인 검사보다 정 검사 같은 사람냄새 나는 말없는 검사들이 대다수라면 검찰은 국민의 사랑을 잃지않을 것이다.
"국민께서는 검사는 냉정한 사람,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실제 검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건 속에서 진실을 확인하고 자 하는 사람들이죠. 사람을 많이 만나는 직업이다보니 사람에 대한 애정이 깊을 수밖에 없고요. 차갑기만 한 사람들은 아니라고 알아주시면 좋겠어요."
차갑지않은 정거장 검사의 포부는 이름만큼 '대문자'스럽지는 않다. 인사철 검찰을 떠나는 선배 검사들이 이프로스(검찰 내부망)에 가장 많이 남기는 말을 떠올린다. '큰 과오없이 검사생활을 마무리하게 돼 감사하고 다행이다.' 그도 자신을 만나는 사건 당사자가 억울한 일을 겪지 않도록 하고 먼훗날 과오없이 검사생활을 마무리하는 게 꿈이다.
엘레베이터까지 배웅 나와준 그를 뒤로 하고 검찰청을 나설 때 세상을 삼킬 듯 무서웠던 비는 그쳐있었다.
leslie@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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