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호의 골목길] "친구 아이가!"..부산 소통길, 모두를 품다

2022. 7. 4.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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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호의 골목길] ⑥ 개항도시 부산 소통길
영주동 산동네 인터넷 ‘168계단’
윗마을·아랫마을 빠르게 이어줘
중간엔 ‘김민부 전망대’ 북항 절경
고향 전답 팔아 독립자금 조달한
안희제 선생 기리는 ‘백산기념관’
옛 미국문화원 ‘부산근대역사관’
불평등 ‘한미관계’ 바로잡으려던
대학생 등 부산시민 열정 되새겨
전국 최초 야시장 일명 ‘깡통시장’
온갖 다문화 음식 포장마차 즐비
 

김민부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부산 전경. 멀리 2014년 개통돼 영도구 청학동과 남구 감만동을 잇는 부산항대교(북항대교)가 보인다.


조선시대 부산 사람들은 굶주린 대마도 사람들을 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수탈자 일본사람들과 뒤섞여 살았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에는 부산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터 잡고 살 수 있게 했다. 압축적 경제성장과 군부독재 이면에서 힘겹게 살던 우리 아버지와 오빠를 한 귀퉁이에 숨겼다. 오늘날 외국인 근로자들까지도 같은 부산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개항도시 부산 소통길을 걷는다.

국제도시 부산 - 청관거리와 왜관거리

동구 부산역에서 지하도를 건너 7번 출구로 나가면 ‘초량밀면’, 1번 출구로 나가면 ‘황산밀냉면’ 집이 있다. 일제강점기를 견뎌 낸 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전국에서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냉면도 들어왔다. 따뜻한 남쪽지방이었기에 냉면을 말아 먹을 동치미 국물이 없었다. 그래서 고기와 한약재를 우린 육수로 동치미 국물을 대신했다. 황해도 메밀처럼 차진 메밀을 구할 수는 없었지만 밀가루는 많았다. 여기에 고구마 전분을 섞어서 뽑은 면이 밀면이다. 찰기가 상대적으로 적어 냉면보다 굵어졌지만 이미 일본식 우동을 먹고 있었던 부산 사람들 입맛에는 그만이었다. 부산 밀면이 탄생했다.

원래 ‘청관거리(청국민 보호를 위해 조성된 지역)’였던 이곳에 미군이 들어오면서 미군을 상대로 한 유흥업소가 형성된다. 이때부터 ‘텍사스거리’라고 부른다. 1992년 한·중 국교정상화가 이뤄진 이듬해 상해시와 부산시가 자매결연을 하고 부산시에서 ‘상해거리’를 조성했다. 2007년에는 지식경제부(지금의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차이나타운 지역발전특구로 지정했는데 이때부터 ‘차이나타운’이라고 부르고 있다.

중구 용두산공원을 중심으로 부산항 쪽을 왜관(倭館·조선시대 일본인 입국과 교역을 위해 설치했던 장소) 동관이라 불렀고 반대쪽을 왜관 서관이라 불렀다. 왜관거리는 청관거리보다 역사가 더 오래됐다. 세종대왕은 1426년 부산포(釜山浦)·내이포(乃而浦·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염포(鹽浦·울산 북구 염포동) 등 삼포를 개방해 대마도 왜인들이 교역할 수 있도록 했다. 임진왜란과 함께 폐쇄했다가 1607년 동구 수정동에 두모포 왜관을 열어준다. 지금 용두산공원 주변에 초량왜관을 설치한 것은 숙종 4년 때인 1678년이다. 자그마치 33만㎡(10만평)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그런데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부산 사람들은 대단하다. 아주 싹 쓸어버렸다.

부산 동구 초량동에서 시작해 총 1.5㎞에 달하는 초량이바구길의 최고 명소 ‘168계단’. 중구 영주동 산동네와 초량초등학교 부근 아랫동네를 잇는 주민 애환이 담긴 길이다. 농민신문DB


산동네 인터넷 - 168계단

동구 초량초등학교와 초량교회 사잇길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168계단이다. 중구 영주동 산동네에 있는 윗마을과 아랫마을을 가장 빨리 왕래할 수 있는 계단이다. 그래서 산동네 인터넷이다. 서로 떨어져 있는 사람을 이어준다. 일제강점기에는 부산역 앞에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이 가파른 산동네에 살았다. 한국전쟁 때에는 전쟁을 피해서 이 동네에 살았다. 부산시는 168계단의 폭을 3m에서 8m로 넓히고 65m 모노레일을 도입해 노약자 이동편의시설로 활용하고 있다.

168계단 중간 골목길 안에 ‘김민부 전망대’가 있다. 부산 북항이 한눈에 펼쳐진다. 잠시 부산에 푹 빠진다. 김민부는 부산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라디오 프로그램 ‘자갈치 아지매’와 온 국민을 웃겨줬던 ‘웃으면 복이와요’ 시나리오를 쓴 작가다. 바로 옆에 있는 수정동 산동네에 살았다. 전망대 벽에 김민부가 작사한 ‘기다리는 마음’을 새겨놓았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 절로 노래를 흥얼거린다.

산동네는 장관이다. 마치 계단식 논처럼 앞에 있는 건물은 뒷 건물의 시야와 햇볕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보통 건물과 달리 옥상에 주차장이 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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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상황이 어떻게 돼 가느냐? - 백산기념관

중구 동광동 인쇄골목 끄트머리에서 도로를 건너 직진하면 왼쪽에 백산 안희제 선생을 기념하는 ‘백산기념관’이 있다. 1905년 21세 된 백산은 보성전문학교(1905년 이용익이 서울에 설립한 고등교육기관, 고려대학교 전신) 경제과에 입학한다. 이후 양정전문학교로 옮겨 1910년 졸업한다.

1911년부터 1914년까지 중국으로 망명해 북간도와 연해주를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한다. 신채호·김동삼·안창호·이동휘·김구 등 독립운동 지도자를 만나 국권회복을 위한 방략을 논의한다. 국내에 독립운동 기지를 구축하고 국외에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맡기로 한다. 1916년 고향 전답 60만㎡(2000마지기) 정도를 팔아서 백산상회를 설립한다. 1917년 경주 최부자 최준, 동래부사와 경상우도관찰사를 지낸 윤필현의 맏아들 윤현태 등과 함께 백산상회를 합자회사로 전환한다.

1919년에는 자본금 100만원 규모의 백산무역주식회사로 전환한다. 백산은 최대주주, 최준은 사장, 윤현태는 전무를 맡는다. 회사는 빠른 속도로 부실기업이 된다. 1925년 최준 사장이 책임지고 사퇴한다. 1927년 백산이 직접 사장이 된다. 그러나 1928년 1월29일 부채 130만원을 떠안은 채 결국 파산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 68%를 조달했다.

1942년 11월19일 일제는 백산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붙잡는다. 10개월 동안 고문과 악형을 가한 일제는 1943년 9월2일 병보석(건강상의 이유로 석방하는 일)으로 그를 내보낸다. 죽음을 눈앞에 둔 백산은 단정히 일어나 앉는다. “대전(大戰) 상황이 어떻게 돼가느냐?” 이미 이탈리아가 패망하고 미·영·소 연합군이 득세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눕는다. 석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운명한다.

나는 부산이로소이다 - 부산근대역사관

백산기념관을 나와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용두산공원’이다. 서울 남산 꼭대기에 서울타워가 있는 것처럼 용두산 꼭대기에 부산타워가 있다. 부산타워는 서울타워보다 2년 앞선 1973년 세웠다. 기둥을 등대 모양으로 만들었다. 불국사 다보탑 모양 상층부를 얹었다. 1955년에는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운다. 역시 광화문에 있는 장군 동상보다 먼저 세운 것이다. 주변 지명도 충무동·광복동 등으로 바꾼다. 일제가 뒤틀어놓은 것을 다시 제대로 했다.

용두산공원에서 내려오면 ‘부산근대역사관’이 나온다. 1921년 지은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건물이다. 1945년 해방되면서 맥아더 사령부는 이곳의 모든 재산을 접수한다. 이 건물을 미군이 접수한 것은 1945년 9월16일 부산에 도착한 미군 선발대가 숙소로 사용하면서부터다.

1948년 9월11일 미군정의 모든 재산과 부채를 한국 정부에 이양하는 것을 골자로 한 “한·미간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의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건물은 반환하지 않았다. 1949년 7월부터는 미국 국무부(외교정책을 주관하는 미국 중앙행정기관) 산하 해외공보처 기관인 미국문화원으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1982년 3월18일 영도구 고신대학교(당시 고려신학대학) 학생을 주축으로 한 대학생들이 미국문화원에 불을 지르고 점거한다.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배후세력이자 독재정권을 비호하는 미국을 응징해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바로잡으려고 한 것이다. 부산 시민들도 ‘부산 아메리칸센터 건물 반환 범시민 추진위원회’를 조직해 적극적으로 반환운동을 전개한다. 부산 시민과 대학생들의 용감한 행동은 우리 사회 전체가 한미관계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미국 정부는 1999년 마침내 우리 정부에 반환했다.

깡통시장 - 부평동시장

중구 부평동시장은 닷새마다 열리는 오일장 즉 전통시장이었다. 1910년 6월 일본인들이 소매시장을 열면서 ‘일한시장(日韓市場)’이라 불렀다. 1915년 9월 부산부(釜山府·일제강점기 부산지역에 있던 지방 통치구역)에서 일한시장을 매입해 설비를 확충한 후 공설시장으로 재개장하면서 ‘부평공설시장’이라 고쳐 불렀다. 전통시장이었던 시기를 제외하더라도 100년이 넘은 시장이다. 지금처럼 ‘깡통시장’이라 불리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때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들어오는 깡통에 담긴 음식을 부평동시장에서 팔았다. 이때부터 부평동시장을 일명 깡통시장이라 했다.

오후 6시가 되니 부평동시장에 웬 포장마차가 열을 지어서 들어온다. 베트남 튀김만두 짜조, 인도네시아 볶음국수 미고랭과 닭꼬치 사테아얌, 중국 만두 딤섬, 일본 튀김 이카슈마와 빈대떡 오코노미야키, 필리핀 고구마 맛탕 가모테큐와 바나나 맛탕 바나나큐 등 온갖 다문화 포장마차들이 끝없이 들어온다. 자정까지 열리는 전국 최초 야시장 부평동 깡통시장의 풍경이다. 피난민을 산동네에 품었던 것처럼 다문화가족에게 시장을 내준다.


최석호 (한국레저경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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