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대중은 진보하는데 진보정당은 퇴보?
프랑스는 극우의 위협에 맞서 중도 보수로 뭉친다. 2002년 대선의 시라크와 2017년, 2022년 대선의 마크롱이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본 대통령이다. 세 선거에서 승리를 결정한 것은 르펜 부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우의 유령이 유럽 정치판을 배회하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다. 이 과정에서 가장 손해를 본 세력은 좌파로 거론된다. 반극우파 전선을 통해 중도 우파가 강화된 반면 사회당이 몰락했기 때문이다. 2017년 대선 1차 투표에서 사회당은 5위에 그쳤고, 올해 대선에서는 무려 10위까지 전락했다. 총선에서도 2017년 사상 유례없는 몰락을 겪었고, 올해에는 독자 출마는커녕 좌파 연합 내의 주도권조차 상실했다.
사회당의 몰락이 좌파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급진 좌파인 불굴프랑스가 성장해 올해 대선에서 3위를 하고 총선에서는 좌파 연합인 인민연합을 주도해 집권 연합인 앙상블에 불과 0.1%포인트 부족한 25.7%의 득표율을 올렸다. 지난 총선은 연합을 통한 좌파의 승리였다고도 할 수 있다.
좌파 연합이 성공한 사례는 그리스나 스페인에서도 속속 이루어졌다. 이 사례들은 다양한 좌파들을 포괄한 진보 연합이 급성장하면서 집권까지 한 경우다. 같은 지중해 문화권에 속한 프랑스도 이제 유사한 경향을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도 좌파 연합이 처음은 아니다. 절대 다수제인 총선은 주로 진영 싸움으로 치러졌으며, 사회당은 다양한 좌파 정당들과 연합을 형성했다. 하지만 사회당이 좌파 지형을 석권하는 상황에서 연합은 소규모로 이루어졌고, 사회당의 독주로 그 규모와 효과는 점차 줄어들었다.
2007년과 2012년 일시적 회복기를 거치면서 사회당은 연합에 더욱 미온적이었다. 극우에 대항해 보수 정당들의 연합이 단일 정당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대처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2017년 총선에서 사회당은 공산당과도, 불굴프랑스와도 연합하지 않았으며 결과는 4분의 1로 줄어든 7.4% 득표율과 10분의 1로 줄어든 29석이라는 의석수였다.
지난 6월 총선에서 연합의 주도권은 불굴프랑스로 넘어갔다. 2017년 총선에서 사회당보다 높은 11.0%의 득표율을 올렸고, 최근 두 번의 대선에서도 사회당을 앞질렀기 때문이다. 좌파의 주요 정당들을 망라한 선거 연합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연합에 참가한 정당들이 2017년 총선에서 각자 거둔 득표율과 의석수를 합하면 25.4%와 57석이었다. 반면 올해 총선에서는 의석수가 세 배 가까이 증가한 142석에 달했다. 다수 대표제에서 선거 연합이 거둔 성과임에 틀림없다.
향후 문제는 이 연합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가느냐다. 인민연합은 단일 정당화를 두고 논쟁 중이다. 하지만 다양한 세력들의 입장이 서로 달라 정리가 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 시리자와 스페인 포데모스도 연합을 통해 단일 정당으로 발전했거나 처음부터 다양한 정파들을 포괄한 정당이었다. 현재적 위기의 실체를 명확히 포착해 각자의 주장과 이념을 상호 인정하는 가운데 하위 목표로 재배치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적으로 배제해야 할 것은 힘 관계에 따른 기계적 안배일 것이다. 각자가 대변하는 특정 집단을 아우르는 포괄적 집단을 설정해야 한다. ‘인민연합’이라는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그것은 ‘인민’으로 호명되었다. 신자유민주주의 질서에서 엘리트 지배 구조의 폐해가 심각하다. 극우 포퓰리즘의 득세가 일시적 바람으로 끝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지배 구조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는 인민으로 호명되는 대중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대중추수주의에 빠져서는 안 되지만 대중의 흐름을 파악해 이념과 주장을 재배치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대선에서 우리나라 진보 정당들도 연합을 시도했다. 그러나 논의조차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지방선거에서는 그러한 시도조차 없었다. 특별한 변란이나 천재지변이 없는 한 역사가 발전하듯이 대중도 성격을 달리할 뿐 진보해간다. 촛불집회가 증명하듯이 대중은 진보하는데 대중을 대변한다는 진보 정당은 퇴보하고 있다.
단순 다수제를 근간으로 하는 우리나라는 절대 다수제를 채택한 프랑스보다 연합이 더욱 절실하다. 서로의 차이만 강조하거나 과거 이념에 묶여 있는 모습은 대중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거나 외면하는 고루함과 아집일 뿐이다. 한국 사회 발전의 한 축을 떠받칠 진보가 연합을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나길 기대해본다.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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