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터치] 해파랑길 받아쓰기

국제신문 2022. 7. 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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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운 사람아 괴로운 사람아, 사랑과 일을 거리에 맡기고, 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자’. 윤동주 시인의 시 ‘산골물’의 일부입니다. 시인은 가슴 속 깊은 샘물이 돌돌 흘러 더불어 말할 이 없다면 바다로 가자고 노래합니다. 바다에서는 넘치는 어떤 마음도 썰물에 슬쩍 흘려보낼 수 있기 때문일까요. 시와 함께 걸었던 해파랑길을 떠올립니다.

지난 5월 말부터 며칠에 걸쳐 해파랑길을 걸었습니다. 지역문화 리서치·교류 워크숍으로 기획된 ‘동해와 포구와 예술의 걷기’란 프로그램의 일환이었습니다. 울산지역 창작 레지던시인 소금나루2014, 장생포131, 아트스테이에서 활동 중인 예술가들이 해파랑길을 함께 걸으며 길과 바다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창작하고 그 결과물을 전시하는 연계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월내역에서 진하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해파랑길 4코스를 시작으로 10코스 종착지인 경주 나아 해변까지 이어 걷는 100㎞의 긴 여정을 앞두고 참여 작가들은 걱정 반 기대 반의 얼굴로 발목을 풀었습니다. 허영란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로부터 월내의 역사, 지리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우리는 월내역을 출발해 바다를 오른쪽에 두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해파랑길은 부산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서 시작해 강원 고성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750㎞의 장거리 걷기여행길입니다. 동해안의 해변길, 숲길, 마을길을 품고 전체 10개 구간, 50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해파랑길은 동해의 상징인 ‘떠오르는 해’와 푸른 바다색의 ‘파랑’, ~와 함께라는 조사 ‘랑’을 조합한 합성어로 떠오르는 해와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파도소리를 벗 삼아 함께 걷는 길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동해안을 걷다 보면 해파랑길임을 알리는 붉은 색, 파란색 표지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정방향(부산→고성 방향)으로 걷는 우리는 붉은 색 표지가 나타날 때마다 마치 보물을 발견한 아이처럼 신나게 발걸음을 옮겼고, 바다 숲 포구 마을의 풍경은 작가들의 시선에 예술적 충만함으로 채워졌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젊은 작가는 포구에서 주운 붉은 볼링공 같은 어구 두 개를 걷는 내내 보물처럼 들고 다녔습니다.

인도의 신비주의자이자 시인인 카비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참된 것이 아니다’. 걷는 것은 움직임의 예술, 한 걸음의 시입니다. 걷기와 예술을 결합한 생소한 프로그램에 가졌던 의아함이 직접 경험을 통해 해소됩니다. 주의 깊게 보고 귀 기울여 들으며 바다에서 그린 밑그림으로 작가들은 시를 짓고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그렇게 해파랑길은 예술이 됩니다.

한 코스의 종착지에 도착하면 가까운 정자나 모래가 고운 백사장에 둘러앉아 조숙 시인이 소개하는 시를 낭독으로 듣습니다. ‘무엇이 바쁜가, 이만큼 살아서 마주할 산이 거기 늘 앉아 있고, 이만큼 걸어 항상 물이 거기 흐른다’.(‘그 강에 가고 싶다’ 김용택) 파도 소리가 배경음악으로 깔립니다.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든 모두의 시선이 먼 하늘, 먼바다를 향합니다. 무엇이 바쁘겠습니까. 멀어도 꿈꿀 수 있는 곳, 멀어도 가야 할 곳이 있음에 감사하며 시인과 소설가, 화가는 두 손을 모아 자연에 경배합니다.

월내역에서 시작한 해파랑길 걷기는 덕하역, 울산 솔마루길과 십리대숲, 아산로, 강동항을 지나 경주 나아 해변에서 끝났습니다. 비바람에 온몸이 젖었음에도 먼저 도착한 이들이 깃발을 높게 흔들며 뒤따라 들어오는 이들에게 환호를 보내 주었습니다. ‘동해와 포구와 예술의 걷기’라 쓰인 파란 깃발이 비를 맞아 생명을 얻은 듯 더 환하고 푸릅니다.


걷기를 끝내며 소회를 푸는데 여럿의 말이 닮았습니다. ‘걸을수록 힘이 나요. 계속 걷고 싶어요’. 동감입니다. 아직 받아쓰지 못한 바다가 많습니다. 나아 해변에서 주운 몽돌을 만지작거리며 높은 파도와 마주 섭니다. 바다에서는 몽돌을 주워 들어라. 몽돌을 움켜쥔 두 손이 단단한 주먹이 돼 며칠의 용기가 되리라. 해파랑길에서는 바다도 시가 됩니다. 곧 다시 오리라 다짐하며 아쉬운 걸음을 돌립니다.

강이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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