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주 타계 30주년..나림 문학과 아나키즘 <9> 이병주 문학과 학문의 길

조광수 전 영산대 중국학과 교수 2022. 7. 4. 03:0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해방 전후 복잡한 현대정치사 .. 나림 소설들 읽으니 머리에 쏙쏙

- 19세기말 美풍자 ‘오즈의 마법사’
- 권력 속성 이해하는 훌륭한 자료

- ‘관부연락선’ ‘지리산’ ‘그해 5월’
- 현대사 균형감 있고 정제된 표현
- ‘장자에게 …’ 등 갈수록 큰 울림

10대 말, 한창 난독(亂讀)을 하던 시절이다.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무거운 주제에 두꺼운 책이면 무조건 읽어야 한다며 과욕을 부렸던 적이 있었다. 즐기는 독서가 아닌 싸우는 독서가 보람이 있을 리가 없다. 결과는 후줄근한 겉멋 한 자락이었다. 계통 없는 난독은 난독일 뿐이었다.

중국 고대 대사상가 노자(왼쪽)와 ‘오즈의 마법사’ 뮤지컬에 등장하는 마스크를 쓴 주인공. 이 글을 쓴 조광수 전 영산대 교수는 정치학 수업에서 권력에 관해 강의할 때 ‘오즈의 마법사’를 먼저 소개했다. 국제신문 DB


■‘관부연락선’에 반해 정치사상 전공

그 대목에서 구세주 같은 책을 만났다. 작가 이병주의 ‘관부연락선’이다. 세상에 이런 글도 있구나 싶어 읽고 또 읽고 하다가 급기야는 경남 진주 하동까지 가게 된다. 작중 주인공 유태림의 행적을 따라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본다. 그리고 지리산에도 오른다. 내가 정치사상을 전공하게 된 결정적 배경이다. 1974년 일이다. 나와 나림 이병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했고 평생 스승이셨다.

나림 타계 30주기에 독후감을 써본다. 문학 비평은 아니다. 그럴 깜냥이 못 되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훈도로 사상을 공부한 정치학도로서 서툰 감상을 몇 마디 표현해볼 뿐이다. 작게나마 학은(學恩)을 갚는 길이기도 하다. 나림이 여러 변주로 묘사한 아나키즘이란 시각으로 ‘이병주 읽기’를 시도해 보았으면 했다.

■소설을 정독하는 이유

나는 소설을 정독한다. 재독 삼독한 소설도 많다. 내가 소설을 고전 읽듯 성실하게 읽는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좋은 표현과 적확한 문장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글쟁이 아닌가. 글을 다루는 전문가다. 조사 하나를 선택하는데 밤을 새워 고민한다. 누구보다 언어와 존재 사이의 괴리를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자도 그런 고뇌가 있었다. ‘노자’의 첫 구절이 “도를 도라고 하면 이미 보통 말하는 그 도가 아니고, 명을 명이라 하면 그 또한 보통 말하던 그 명이 아니다(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이다. 역동적인 존재를 고정적인 언어로 묘사하는 게 못내 양에 차지 않은 것이다. 존재에 대한 언어의 열등성 그리고 본체에 대한 현상의 허구성을 묘사한 기막힌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장자는 그 고민 끝에 우화(寓話)로 부득이한 심정을 표현했다.

셰익스피어도 비슷한 경험을 했나 보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장미를 장미라고 하지 않고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장미는 장미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장미의 향기는 장미라는 이름과 무관하게 향기롭다는 뜻이다. 역시 말과 글을 다루는 전문가는 다르다. 역동적인 삶을 고정적인 언어로써 억지로 표현하는 문인의 요령부득 심정과 고통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다음, 소설은 어려운 주제를 이야기로 풀어주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꼭 쉽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해를 돕는 데는 아주 효과적이다. 이를테면, 권력과 예술의 탄생을 이문열의 중편 ‘들소’처럼 흥미롭게 다룬 소설은 드물다. 권력으로 포장된 폭력의 생성과 몰락 이야기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만큼 재미나게 그린 소설도 귀하다.

권력이란 주제를 말할 때 프랭크 바움이 쓴 ‘오즈의 마법사’는 훌륭한 자료다. 이 정치 소설은 영화로 만들어져 8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17세 소녀 배우 주디 갈란드가 부른 주제곡 ‘Somewhere over the rainbow’가 유행하고 있다. 영화는 동화 같은 스토리와 아름다운 음악으로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All’ 등급이지만, 원작 소설은 솜으로 싼 바늘처럼 우화로 당시의 정치경제를 비판한 수작이다.

이를테면 ‘오즈의 마법사’에서 오즈는 금은을 세는 단위다. 그리고 마법사는 정치인이다. 제목에서부터 당시 금 본위 제도를 은 본위로 바꾸자는 주장인데, 구체적으로 캔자스 시골의 소녀 도로시가 신은 은색 구두가 바로 그 의미다. 미국은 19세기 말부터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전환하기 시작하는데, 그 과정에서 농민 노동자 상당수는 몰락해가고 산업 금융 자본가는 흥성하게 된다. 바움은 그런 정치 현실을 비판한 것이고 그걸 수습하는 작업은 마법사인 당시 매킨리 대통령이 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용기가 부족한 사자와 두뇌가 없는 허수아비, 마음이 없는 양철남은 제각기 부족한 것을 얻기 위해 도로시와 함께 마법사를 찾아간다.

작가 바움은 당시 큰소리만 치고 무능하기 그지없는 야당 대통령 후보를 겁 많은 사자에, 중서부 지역의 맥 놓은 농민을 뇌가 없는 허수아비에, 그리고 부초 같은 도시 노동자를 심장 없는 양철공에 비유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노란 벽돌 길을 따라 여행한다. 그 과정에서 겪는 다양한 곡절 하나하나가 다 정치적 함의가 농후하다. 나는 정치학 수업의 권력 강의 때 ‘오즈의 마법사’를 먼저 소개했다.

■나림 소설은 한국 현대정치 필독서

같은 맥락으로 나림의 소설은 한국 현대정치를 공부하는 데 꼭 필요한 교재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 ‘전환시대의 논리’도 읽어야 하지만, ‘관부연락선’ ‘소설 남로당’ ‘지리산’ ‘산하’도 더 없는 사회과학 텍스트다. 한국 현대사 특히 해방 전후 복잡다단한 시대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나림의 소설만큼 균형감 있고 유익하며 흥미로운 자료는 없다. 그리고 ‘그해 5월’만큼 혁명 또는 쿠데타의 정열과 허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설은 귀하다. ‘장자에게 길을 묻다’는 아나키즘 이해의 친근한 향도이고, ‘허균’은 니힐리즘의 한 전형이다. ‘바람과 구름과 비’는 망국의 참담함과 신(晨)이란 새 나라 세우기의 열정을 그린 대서사시다. 네이션 빌딩을 위한 기막힌 설계도다. 넓은 시야와 깊은 내공을 꼭 딱딱한 문장으로 된 텍스트가 아닌 술술 읽히는 소설을 통해 배울 수 있다면 불감청고소원 아니겠는가.

■나림은 회색을 당당하게 표방

이병주는 “거대한 회색의 정원”이다. 빨간색도 검은색도 흰색도 아닌 회색이어서 더욱 빛나는 위인이다. 색깔을 벼슬처럼 자랑하거나 또는 숨기기 급급한 풍토에서 당당하게 회색을 표방한 대인이다. 물론 나림은 “흠이 많은 사람”이다. 그의 자유분방함은 주변을 불편하게 했고, 사치스러운 취향은 말년에 상당한 태작(駄作)을 낳게 했다. 절륜의 에너지와 넘치는 박학강기를 더 멋진 라이프워크 작품에 집중하지 못한 것은 여한이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에게 도박과 빚을 나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나에게 나림은 어느 누구보다 친절하고 뜨듯한 향도(嚮導)였다. 딱히 엄하지도 굳이 어렵게 만들지도 않으면서 슬슬 술술 가르침을 베푸는 스승이었다. 무릇 작가는 하고 싶은 말이 있게 마련이고, 그 말을 사람이 듣고 싶은 이야기로 만들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림은 가슴 한가득 온갖 사연이 있으며, 그 절절한 사연을 달달한 당의에 싸서 독자에게 전해주는 데 탁발한 재능이 있는 것이다. 역사소설의 전범(典範)이고, 지식인 소설의 전형이다. 그의 소설을 읽는 것 자체로 교양이 늘고 지적 자극을 받게 된다.

고(故) 이윤기 작가가 즐겨하던 말이다. “죽은 지 10년이 지나도 독자가 작품을 찾는다면 괜찮은 작가다. 작가에 대한 평가는 사후 10년이 지나야 한다.” 이윤기의 자존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나림 이병주도 그 범주에 드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활동 시기나 전성기보다 오히려 사후에 더욱 평가받고 있는 작가라 할 수 있겠다. 살아서는 그저 대중 소설가 또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치부되었지만 사후엔 많은 문인과 독자가 정말 그리워하는 대작가로 재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나림이 남긴 말과 글. 남은 자에게 갈수록 큰 울림이 된다.

-끝-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