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저널 그날' 진주비빕밥, 육회 고명에 깃든 비장미

손봉석 기자 2022. 7. 3.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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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제공


3일 오후 9시 40분에 KBS1에서 방송이 될 ‘역사저널 그날’ 367회가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진주성 전투’ 편으로 진주의 과거를 알아본다.

임진왜란 당시 부산으로 입성해 한양으로 진격하던 일본군이 진주로 방향을 튼 이유가 있었다. 불패의 명장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바닷길을 이용한 보급로가 차단되자, 일본군은 조선 내에서 식량을 조달할 수 있는 곳을 찾는다.

목적지는 바로 한반도의 곡창지대 호남이었다. 일본군의 진군 앞에 길목에 선 진주성은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를 준비한다.

KBS 제공


마침내 시작된 전투에서 10배 가까운 병력의 차이를 딛고 성내의 조선군, 의병들은 물론 관내 백성들까지 똘똘 뭉쳐 진주성 사수에 나섰다. 특히 후에 시호를 받게 될 진주목사 김시민의 활약은 일본의 고전문학과 가부키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고 한다. 역사에 ‘진주대첩’이라 기록될 제1차 진주성 전투의 전말에 대해 알아본다.

1593년,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황은 변했다. 명나라와 협상 결과에 따라 일본은 남쪽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한다. 명나라는 철수 중에 절대 약탈을 금지한다고 엄포를 놓지만 일본 9만 병력은 진주로 향한다. 바로 ‘진주대첩’의 원한을 기억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특명 때문이었다. “진주성의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죽여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다시 진주성은 일본군의 총 끝에 선다.

10배에 가까운 병력 차이에 외부 지원까지 사라져 버린 외로운 성, 진주성은 결전을 앞두고 진주성의 군민들과 군사들이 먹었다고 전해지는 음식은 비빔밥이다. 진주비빔밥이라 이름 붙은 이 비빔밥 특별한 점은 ‘육회’가 고명으로 올라가고 선짓국이 같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런 조합이 된 이유를 ‘임진왜란’에서 찾을 수 있다는데, 실제 ‘진주비빔밥’의 유래에서 느껴지는 비장함에 패널들도 쉽사리 숟가락을 들지 못했다. 2차 진주성 전투 최후의 만찬, 진주비빔밥에는 어떤 특별한 점이 있는지 알아본다.

KBS 제공


1593년 6월, 10일 간의 결사 항전에도 2차 진주성 전투는 조선군 패배로 끝난다 1차 진주성 전투와 어떤 점이 달랐기에 2차 진주성 전투는 패배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아본다.

패배한 진주성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열린 진주성 앞에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았다. 특히 역사에 잘 알려진 의기(義妓) 논개는 진주의 백성들이 어떤 마음으로 일본군과 맞서 싸웠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런 충절을 가진 진주성 백성들의 운명은 너무도 가혹한 방향으로 흐르고 만다.

전투는 패배했을지라도 나라를 지키려 했던 호국정신은 지지 않았던 진주성 전투의 전말은 3일 저녁 9시 40분 ‘역사저널 그날’ 367회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진주성 전투’에서 안방극장에 배달된다.

손봉석 기자 paulsoh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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