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인간'이란 환상 내려놓기

최원형 2022. 7. 3.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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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한겨레 프리즘] 최원형 | 책지성팀장

로봇과 인공지능(AI), 자율주행자동차, 화성 이주 등 온갖 미래적인, 정확히 말하면 초현실적인 말들의 부글거림 아래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최근 몇년 동안 단편적으로나마 ‘포스트휴먼’ 관련 담론들을 접하면서 피어난 궁금증이다.

일론 머스크의 ‘장밋빛’ 한마디 한마디를 뻥튀기해 들려주는 언론 때문인지, 그에 열광하거나 실망하며 출렁이는 주식시장 때문인지,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상상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대중문화 때문인지, 포스트휴먼 시대는 이미 도래한 듯 느껴진다. 머지않아 인공지능에게 생각을 대신하게 시키고 자율주행하는 자동차에 몸을 누인 채 이동할 것이며 화성도 우리의 영토가 될 것이라는 말에, 이제 우리는 강하게 아니라고 반박할 수 있을까. 어느 인터넷 게시판에서 우연히 마주친 문장은, 이 부글거림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나약한 고깃덩어리를 벗고 강인한 육체와 초지능을 가지게 되는 것이 나의 꿈이다.”

포스트휴먼 담론은 인간이 무엇이냐는 물음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오직 인간만이 가진 ‘인간성’이란 덕목이 존재한다는 인식에서, 이를 지닌 인간의 존엄성을 다른 무엇보다 앞서는 가치로 보는 ‘휴머니즘’이 나왔다. 포스트휴먼 담론의 고전으로 꼽히는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1999)에서 지은이 캐서린 헤일스는 ‘포스트휴먼’에서 ‘휴먼’은 무엇보다도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주체”라고 명확히 지적한 바 있다. 중앙집중화된 권위주의적 통치에서 자유주의적 통치로 이행해온 유럽적 전통에서 인간성의 핵심은 ‘자유’, 곧 타인의 의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을 소유하고 조절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선 자아를 “성별, 인종, 민족성을 포함한 차이의 표식”을 지닌 물질(신체)이 아니라 추상적인 정보의 체계(정신)로 상정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신체에 새겨진 다양하고 복잡한 현실들을 말소해야 자유주의적 주체에 보편성을 부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런 주체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정상성’의 범주에 속한 백인, 남성, 비장애인 등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포스트휴먼 담론은 과연 ‘포스트’란 이름에 걸맞게 이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주체를 ‘해체’하고 있을까? “나약한 고깃덩어리를 벗고 강인한 육체와 초지능을 가지”겠다는 노골적인 말이 드러내듯, 자신을 소유하고 조절할 자유에 대한 믿음과 갈망은 포스트휴먼 시대에 더욱 심해진 듯 보인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포스트휴먼 사유에는 ‘반동적’, ‘분석적’, ‘비판적’ 등 세갈래가 있다고 봤는데, 이 중 현재 우리 주위에 만연해 있는 것은 주체의 특권이 여전히 가능하다고 믿거나(반동적), 과학·기술의 성과를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기존 인간 개념에 접붙일 수 있다고 보는(분석적) 입장이다. 이런 입장들은 자신을 소유한다는 기존 인간의 모델을 그저 계승하거나 되레 ‘강화’(enhance)한다. 정상성의 범주에 들지 못한 존재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목소리도 갈수록 함께 커지고 있다.

미래에 더 큰 자유를 보증해주겠다는 과학·기술의 ‘스펙터클’ 대신, 젠더와 인종, 장애, 기후변화 등 구체적인 현재의 문제들로부터 포스트휴먼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보면 어떨까. 페미니즘, 포스트식민주의, 장애학 등 여러 기존 비판이론의 전통들과도 단단히 연결돼 있는 ‘비판적’ 포스트휴먼 사유의 갈래다. 어쩌면 장애인을 위한 완전 자율주행자동차 개발보다, 이동권 확보 예산을 요구하는 장애인들의 출근길 지하철 탑승 시위와 그에 대한 시민들의 연대가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장애, 비장애, 정책, 교통인프라 등이 뒤섞여 이전에 없던 새로운 종(種)을 탄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유로운 인간’이란 환상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비판적 포스트휴먼 사유’(포스트휴머니즘)는 세상을 ‘함께 지어’가는 “여러 동반 종의 즐거운 일원이 될”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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