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햇발] '크런치 모드' 시절이 그리운가 / 이종규

이종규 2022. 7. 3.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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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야근하는 회사원. 게티이미지뱅크

윤석열 대통령은 억울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주 52시간제’를 폐지하자는 것도 아니고, 바쁠 땐 좀 ‘빡세게’ 일하고 쉴 땐 쉬자는 건데 ‘야근 지옥’이 웬 말인가.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까지 나서 새 정부의 ‘1순위 과제’로 천명한 노동시장 개혁의 ‘방향’은 이미 1년 전에 정해져 있었다고 봐야 한다.

“게임 하나 개발하려면 한 주에 52시간이 아니라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 윤 대통령이 지난해 7월 <매일경제> 인터뷰에서 ‘주 52시간제’를 ‘실패한 정책’이라고 규정하며 한 말이다. 스타트업 현장의 목소리를 전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추후 해명을 통해 그런 목소리에 공감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주 120시간’은 주말도 없이 하루에 17시간씩 일해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초고강도 노동을 의미한다. ‘마음껏 일할(그러다 죽을지언정) 자유’를 주자는 것이다. ‘최저임금 이하를 받고 일할 자유’, ‘50전짜리 햄버거 먹을 자유’까지 역설한 바 있으니 나름대로 일관성은 있다.

‘주 120시간’ 발언에 깔린 윤 대통령의 ‘소신’은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직접 브리핑한 ‘노동시장 개혁 추진 방향’ 발표문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하고 싶을 때에는 일하고, 쉬고 싶을 때는 쉴 수 있도록 근로시간을 자율적으로 결정하게 해달라는 요구도 지속 확산되고 있다.”

얼핏 들으면 솔깃하지만 감언이설에 가깝다. 노동부의 발표문에는 ‘주 92시간 근무’의 길을 터주는 연장근로시간 정산 기간 확대를 비롯해, 선택적 근로시간제 정산 기간 확대, 스타트업·전문직 근로시간 규제 완화 등 사용자가 마음껏 일을 시킬 수 있게 하는 방안들이 여럿 담겨 있다. 반면 ‘쉴 권리’ 보장 방안은 실효성이 의심스러운 ‘근로시간 저축계좌제’가 유일하다. ‘개혁’의 방점이 어디에 찍혀 있는지 어렵지 않게 가늠해볼 수 있다.

노동부는 ‘노사 합의’와 ‘선택권’을 ‘금과옥조’처럼 내세운다. 마치 노동자가 원치 않으면 안해도 된다는 듯이 말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인식이다. 노조가 있어야 그나마 사쪽과 협상이라도 해볼 텐데, 우리나라의 노조 조직률은 14%로 다른 선진국과 견줘 턱없이 낮다. 노조가 없는 사업장은 ‘근로자대표’가 노조 역할을 하게 되는데, 대표를 뽑는 절차 등이 전혀 마련돼 있지 않아 유명무실하다. 노조가 없는 대다수 중소 사업장의 경우 사용자에 유리하게 ‘시간 선택권’이 오남용될 가능성이 크다.

윤 대통령이 언급한 ‘바짝 일하기’는 게임 업체를 비롯한 정보기술 업계에서 한때 관행처럼 널리 퍼졌던 업무 방식이다. 개발자들 사이에서 원성이 자자했던 ‘크런치 모드’다. 신제품 출시 등을 앞두고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간 밤낮없이 일에 매달리는 초고강도 노동 관행이다. ‘구로의 등대’, ‘판교의 오징어배’라는 자조 섞인 은어가 나온 배경이기도 하다.

혁신, 열정, 전문성 따위의 이미지로 ‘분칠’이 돼 있지만, ‘크런치 모드’는 노동자를 ‘갈아 넣어’ 생산성을 높이는 비인간적인 악습일 뿐이다. 실제 게임 업체 등에서 젊은 개발자들의 과로사와 ‘과로 자살’이 잇따르면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주 52시간제 시행으로 점차 사라져가는 추세였는데, 윤석열 정부의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에 힘입어 다시 날개를 다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인간은 기계처럼 필요할 때마다 출력을 한껏 높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한달이든, 한주든 과로를 하면 몸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다. 2주간 ‘빡세게’ 일하고 2주간은 일찍 퇴근하자는 얘기는 병 주고 약 주는 것과 다름없다. 노동시간 유연화는 잦은 야근으로 이어질 공산이 큰데, 야간노동은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가 ‘2급 발암물질’로 규정할 정도로 건강에 해롭다.

무엇보다 노동시간 유연화는 노동시간이 충분히 줄어든 이후에 검토해볼 수 있는 과제다. 서구 선진국에서도 대체로 그런 경로를 밟았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장시간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세번째로 노동시간이 길다. 주 52시간제가 시행되기 이전에는 늘 멕시코와 1·2위를 다퉜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노동시간 유연화가 아니라 주 52시간제 안착을 통한 노동시간의 단축이다.

이정식 노동부 장관이 발표한 ‘노동시장 개혁 추진 방향’ 브리핑 자료에는 “노동의 역사는 근로시간 단축의 역사”라는 말이 들어 있다. 그래놓고 장시간 노동을 부추길 방안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붙이고 있으니 ‘인지 부조화’가 아닐 수 없다.

이종규 논설위원 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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