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0년 요동의 벽돌, 2022년 삼성의 3나노 [노원명 에세이]
동네 중고책방에 갔더니 ‘열하일기’가 눈에 들어온다. 1780년 연암 박지원이 청 고종 70수를 축하하는 사절단 일원으로 중국을 돌아보고 쓴 그 여행기 말이다. 1.2권 합쳐 1100페이지가 넘고 새것처럼 깨끗한 책을 단돈 8000원에 장만하였다. 마침 읽던 책이 끝나 바로 읽기 시작했는데 하루 새 200페이지 좀 넘게 읽었다. 내 독서력으로는 책이 재미가 있지 않으면 이렇게 못 읽는다.
압록강을 건너 요동 땅에 들어간지 5일째 되던 날 연암이 동행들과 현지 문물에 대해 토론을 벌인다. 연암은 요동의 성들이 벽돌로 지어진 것을 매우 좋게 봤다, 조선의 모든 성들이 돌로 지어질 때다.
연암이 말한다. "대저 벽돌로 말하면, 한 개의 네모진 틀에서 박아 내면 만 개의 벽돌이 똑같을지니, 다시 깎고 다듬는 공력을 허비하지 않을 것이요, 아궁이 하나만 구워 놓으면 만 개의 벽돌을 제자리에서 얻을 수 있으니, 일부러 사람을 모아서 나르고 어쩌고 할 이유가 없고...다들 고르고 반듯하여 힘을 덜고도 공이 배나 되며, 나르기 가볍고 쌓기 쉬워..."
이번엔 조선의 돌 축성에 대한 평가다. "돌로 말하자면, 산에서 쪼개어 낼 때 몇 명의 석수가 들어야 하며, 수레로 운반할 때에 몇 명의 인부를 써야 하고, 이미 날라다 놓은 뒤에 또 몇 명의 손이 가야 깎고 다듬을 수 있으며, 다듬어 내는 데까지 또 며칠을 허비해야 할 것이요, 쌓을 때도 돌 하나하나를 놓기에 몇 명의 인부가 들어야 하며..."
1780년이면 정조 4년이다. 내재적 발전론자들이 조선에 자본주의 맹아가 싹트고 상업혁명이 일정 수준에 도달했으며 그대로 진행이 되었으면 자주적 근대화가 이뤄졌을 것이라 주장하는 영.정시대, 그러니까 조선의 르네상스 시절이다. 그런데 그 시절에도 조선은 산의 돌을 깎고 날라 성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중국을 사대하면서 왜 벽돌 굽는 기술 하나를 배워오지 않았을까.
당시 산업.기술 수준에서 벽돌 굽는 가마는 거대 장치산업이었을 것이다. 조선은 기와를 굽는 흙가마만 있었는데 둘 사이에는 큰 수준 차이가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연암의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의 기와 가마는 곧 하나의 뉘어 놓은 아궁이여서 가마라고 할 수 없다. 이는 애초에 가마를 만드는 벽돌이 없기 때문에 나무를 세워서 흙으로 바르고 큰 소나무를 연료로 삼아서 이를 말리는데, 그 비용이 벌써 수월찮다. 아궁이가 길기만 하고 높지 않으므로, 불이 위로 오르지 못한다. 불이 위로 오르지 못하므로 불기운이 힘이 없으며, 불기운이 힘이 없으므로 반드시 소나무를 때어 불꽃을 세게 한다...자기를 굽거나 옹기를 굽거나를 물론하고 모든 요업의 제도가 다 이 모양이며...한번 옹기장이를 잘못 만나면 사방의 산이 다 벌거숭이가 된다...기와 굽는 방법 한 가지가 잘못되어서 나라의 좋은 재목이 날로 줄어들고 질그릇점 역시 날로 곤궁해지는 것이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남벌로 인한 산의 황폐화, 이에 따른 산사태와 지력 고갈 등의 폐해가 심각해지는데 그 원인 중 하나가 소나무를 마구 때는 영세 흙가마임을 박지원은 말하고 있다. 연료 효율이 높은 벽돌가마로 대체하면 개선될 문제인데 당시 조선에는 벽돌 가마를 지을 기술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뭐 그리 대단한 보안기술이었겠나.
그 기술을 도입하게끔 하는 인센티브가 없다는 것이 조선의 본질적 문제였을 것이다. 벽돌 가마를 지어봐야 거기서 생산하는 것이 기껏 옹기 정도라면 건설비용이 안 빠진다. 벽돌가마는 벽돌을 대량 생산하는데 최적화된 장치인데 조선은 벽돌 수요가 없다. 지금 생각하면 정부 주도로 벽돌가마를 짓고 거기서 찍어내는 벽돌로 성을 짓고 구들을 놓게 해 수요를 대는 방법이 있다. 조선 500년 역사 동안 그런 생각을 한 군주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게 문제다. 계몽군주 소리를 듣는 정조를 포함해서 말이다. 도대체 정조는 왜 계몽군주인가.
조선은 망할 때까지, 그러니까 열하일기가 나온후 120년이 더 지나도록 계속 그 모양이었다. 벽돌 가마도, 벽돌 성도, 벽돌집도 없었다. 산에서 돌을 자르고 그것을 굴려 내리고 그것을 대강 다듬어서 또 다른 산으로 끌어올려 성으로 쌓고...시지프스의 운명처럼 미련한 역사가 유사 이래 한반도에서 반복돼 왔다.
그랬던 우리가 1948년 대한민국이 들어서고 불과 70여년 만에 세계에서 메모리 반도체를 가장 잘 만드는 나라가 됐다. 배도, 전기차도, 배터리도 우리가 제일 잘 만든다. 소위 제조로 엮이는 산업 중에 우리가 최고 수준이 아닌 것을 찾기가 어렵다.
며칠 전 삼성전자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3나노 기술을 적용한 반도체 양산에 들어간다는 발표가 있었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에서 대만 TSMC에 밀리는 후발주자이고 특히 떨어지는 수율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3나노는 일단 한번 던져본 승부수일 것이다. 대한민국 기업, 그리고 정부는 지난 70년간 수도 없이 이런 승부수를 던져왔고 성공할 때가 많았다. 한 번에 안 되면 몇 번을 해서라도 성공시켰다.
1780년 요동의 벽돌 성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하던 나라, 보고도 배우지 못하던 나라, 천하의 산이 다 민둥산이 되도록 소나무를 때어 옹기나 굽던 나라가 세계 제조업 최첨단에 섰다. 가끔은 스스로를 대견해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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