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나는 추앙한다, 한국의 촌을

한겨레 2022. 7. 2.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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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임지선의 브랜드로 공간 읽기]브랜드로 공간 읽기 코리아하우스비전
촌스럽지만 인스타그래머블하고
한국적 미감 살리며 효율 추구한
촌의 미래를 담은 집들을 보았다
하라 겐야의 <양의 집> 외부.

귀농을 강요하지 마세요. 누군들 귀농이 마냥 싫겠습니까. 도시의 뻑뻑한 삶이 지긋지긋해져 벗어나고 싶던 순간, 왜 없었겠어요. 다만 귀농해서도 품위 있는 아침과 산뜻하게 일하는 오후를 보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죠. 논과 밭과 바다에 삼켜져 자연 앞에 맞서 싸우듯 살고 싶진 않거든요. 지친 몸 이끌고 들어와 파리 쫓으며 노란 장판 위에서 잠드는 걸 바란 건 아니라고요. 그래, 한마디로 촌스럽게 살기 위해 귀농하고 싶진 않았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곳이라면 얘기가 다를 것 같네요.

브랜드 만나씨이에이(MANNA CEA)가 개최 파트너가 되어 만들어진 이곳은 코리아하우스비전의 전시공간이자 주거와 산업, 브랜드 상공간이 버무려진 복합공간으로 운영될 곳이다. 하우스비전은 무인양품 아트디렉터 하라 겐야가 고안한 라이프스타일 콘텐츠형 전시로 집을 라이프스타일과 다양한 산업 분야가 만나는 플랫폼으로 보고 건축가, 크리에이터, 디자이너, 기업 등과 협력해 미래의 삶을 그려보며 소개하는 공간과 브랜드의 인사이트가 특징이다. 이처럼 건축부터 디자인과 문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를 총체적으로 다루는 하우스비전은 한국에서 열린 이번 전시가 네번째 개최다. 촌의 미래를 담은 집들은 어떠했는지, 코리아하우스비전 2022를 다녀왔다.

김대균 건축가의 <컬티베이션 하우스>.

이토록 ‘힙’한 시골 모듈주택

만나박스를 들어보았는가. ‘뿌리째 살아서 오는 신선한 채소’라는 카피로 유기농 신선채소를 배송하는 만나박스는 2016년 오픈 뒤 온라인-채소-정기배송의 한 획을 그으며 수많은 채소배송 후발주자를 낳았다. 만나씨이에이는 바로 이 만나박스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는 스마트 농업 브랜드이자 농업에 기술과 디자인을 더한 스타트업으로, 이젠 문화의 영역까지 확장을 꾀하고 있다. 이번 하우스비전 2022의 주최사로 적극 나선 까닭도 그 일환. 집을 매개로 미래의 삶을 그려본다는 하우스비전 취지에 걸맞게 만나씨이에이 외에도 무인양품, 우아한형제들, 보마켓 등 생활에 밀착되어 있는 스마트한 브랜드들이 다수 참여했다.

집. 사실 브랜드가 가장 많이 들어 있는 장소는 편집숍이나 백화점이 아니라 바로 집이다. 먹고 자고 입고 소모하는 모든 크고 작은 것들이 촘촘하게 브랜드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하라 겐야의 <양(陽)의 집>(House of Sun)은 참 흥미로웠다. 의자, 침대, 테이블부터 욕실의 수건 한장까지 모두 무인양품의 제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미니멀리스트들은 이곳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을 만큼 간결하고 깔끔한 집. 귀농주택은 어딘가 찍어낸 듯한 답답한 외관을 가질 것이라는 편견이 무색할 만큼 개방적이고, 빛을 듬뿍 담아내며, 작은 정원과 데크를 가지면서도 하나의 브랜드로 매끈한 안정감을 전달하는 양의 집. 각자의 쓰임새를 가진 소품과 가구가 하나의 브랜드 지휘 아래 매끄럽게 펼쳐지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더라.

시골의 모듈주택이라 하면 컨테이너를 말하는 건가 싶은데, 전혀 다른 느낌이다. 한국의 ‘평’ 개념과 르코르뷔지에의 건축 치수 ‘모듈러’를 조합하여 가로세로 2.4m의 입방체 모듈을 만들었다. 원오원 아키텍츠의 <작은 집>은 최욱 건축가의 설계인데, 낭비 없는 집이 되기 위해 개발한 이 작고 효율적인 입면체들이 한국 전통 건축의 ‘칸’이 되어 자연스럽게 한국적 정서와 맞아떨어졌다. 확장과 연결이 자연스러운 옛 한옥이 절로 연상되면서도 세련된 분리를 추구하는 현대 건축의 특징이 살아 있던 집. 한국적 미감을 살리면서도 농촌의 환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녹여 만든 집이구나 하는 생각이 탁 들었다.

하라 겐야의 <양의 집> 내부.
최욱 건축가의 <작은 집> 전경.

우아한 귀농도 가능해?

시장에 없는 것을 발견하는 것도 브랜딩이지만 시장에 흔한 것을 재발견하는 것도 브랜딩이다. 흔하지만 어렵다고 느껴지는 농촌의 콘텐츠를 가지고 스마트하고 흥미롭게 풀어낸 브랜드들의 해석과 표현들로 보는 내내 즐거웠다. 우아하고 여유로운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촌, 그런 귀농은 정말 어때야 할까를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이 묻어났다. 논, 밭, 어업, 비닐하우스, 경작과 농가주택 등 평범한 단어들이 하나하나 반짝거리는 형태로 태어나 존재하고 있었다. 촌스러운 것이 어쩜 이리도 힙할 수 있는지. 아니 어쩌면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데에서 본질을 거둬들여 다시금 빛을 보게 한 것인지, 이 시도와 시선이 참 힙하다.

아, 이 즐거운 시도들은 끝이 아니다. 하우스비전 행사 최초로 건축물을 남겨 실제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일뿐더러 하우스비전 개최 기간이 끝났더라도 촌의 미래가 담긴 만나시티는 계속해서 운영된다 하니 종종 들르면 좋겠더라. 시크한 디자인의 트랙터 몰고, 노을 지는 논 바라보며 유기농 재배 원두로 드립커피 마시기. 태양열 에어컨 돌려놓고 보송보송한 침대 위 무농약 블루베리 먹으며 잡지 읽기. 누워서 #내가_키운_블루베리 해시태그 인스타에 올리는 건 필수. 촌스럽고 인스타그래머블한 나의 시골 라이프를 위하여, 더 많은 촌스러운 것들이 나와주기를. 고로 나는 추앙한다, 한국의 촌.

글·사진 임지선 브랜드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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