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비건은 사랑이야

한겨레 2022. 7. 2. 14:5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ESC : 비건하고 있습니다]비건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허물고
혐오의 물결에 사랑으로 맞서는
비건 친구들에게서 찾은 희망
일러스트레이션 백승영

비건은 ○○이다.

‘비건’이라는 하나의 단어가 허용하는 여러 품사를 생각한다. ‘비건한 지 얼마나 됐어?’라고 물을 때 비건은 동사가 되고, ‘비건 세상 만들기’라는 구호에서는 형용사에 가까워진다. 가장 자주 쓰이는 비건은 역시나 명사일 것이다. 비건 카페, 비건 샴푸, 비건 가죽…. 어떤 단어 앞에든 비건이 붙기만 하면 그 개념은 완전히 새로워진다. 내 이름 ‘홍성환’ 앞에 비건이 붙기 시작하면서부터 내 삶은 완전히 새로워졌다. 왜 그럴까? 비건의 명사적 용법을 더 살펴보며 그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자.

○○은/는 ○○이다. 이와 같은 문장에서 명사로서의 비건은 앞뒤 빈칸에 모두 들어갈 수 있다. 앞뒤 빈칸에 비건을 차례로 채워보면 이렇다. ① 비건은 ○○이다. ② ○○은/는 비건이다. 궁극적으로 완성하고자 하는 문장은 ①이다. 하지만 이는 꽤 어려운 문제이므로, ②의 빈칸을 먼저 채워 넣으며 이를 토대로 ①의 빈칸을 추론해보기로 한다.

②-1 전범선은 비건이다.

전범선은 록 음악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시끄러운 비건이지만 비건 딱지를 부담스러워한다. 비건으로 외부에 인식되는 순간 그 사람의 다른 정체성은 뒤로 밀려난다. 그는 ‘비건 로커’라고 불리진 않지만, ‘비건 아티스트’고 ‘비건 음악인’이다. 그가 올해 낸 책 <비혼이고요 비건입니다>, <나쁜 비건은 어디든 가지> 두권의 제목을 보라.(이 글에서도 비건으로 소개하게 되어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비건으로 그만 소개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동물해방 운동에 앞장서며 비건에 대한 글을 쓴다. 비건은 그가 생각하는 지구와 생명을 살리는 ‘살림’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예술과 운동의 접합점을 찾는 전범선은 모두가 해방된 세상을 꿈꾸며, 그 꿈에는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그는 나와 만나서 헤어질 때마다 나에게 사랑한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그 단어가 아직 어색하다.

②-2 벌새는 비건이다.

벌새는 환경단체 ‘멸종반란’에서 활동한다. 멸종반란은 범지구적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평소에는 말 잘 듣던’ 시민들이 모여 일상의 반란과 안일함에 대한 저항을 꾀하는 비폭력 시민불복종 운동이다. 나는 ‘용감함’이라는 단어를 벌새에게서 배웠다. 비판과 평가, 욕설과 삿대질을 무릅쓰고 그는 여성 청년이자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하나의 취약한 개체로서 앞에 나서서 기후위기, 생태위기와 이를 막기 위한 식탁의 전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용감함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모든 이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지구를 사랑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평소에는 앞에 나서길 꺼리는 그가 불의에 맞서고 위협에 기꺼이 자신을 노출할 때 나는 사랑의 힘을 목도한다. 그는 기후정의를 외치다 연행되었을 때 버스 안에서 창밖으로 “기후위기 직시하라”고 외치며 내내 울었다. 그는 사라져가는 종과 비참하게 죽어가는 동물을 생각하며 그들과 연대하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 그와 함께하는 운동에서 비건 세상과 변화에 대한 희망이 싹튼다.

②-3 현희진은 비건이다.

현희진은 시인이며, 나의 비건 여정을 가장 가까이서 함께하는 친구다. 그는 나에게 영감을 가장 많이 주는 사람이자 내가 쓴 원고에 직접 쓴 문장을 몰래 끼워 넣기도 하는 사람이다.(‘비건이라도, 김치 정도는 허용합시다!’ 편 참고)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 현희진은 나에게 한동안 집 청소를 하지 못하게 했다. 집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개미를 죽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개미약을 쓰는 대신 개미 박사에게 자문을 구하고, 개미에 대한 책을 열댓권 모으는 등 개미를 최대한 죽이지 않고 집 밖으로 내보내는 방법을 연구했다. 당시 나는 ‘개미까지 신경쓰며 어떻게 사나’ 생각했다. 지나친 감성은 동물해방 운동에 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간 사회는 감성의 언어가 지배한다. 이성에 호소하는 글은 설득력이 있지만 대중의 행동을 부르지는 않는다. 대중의 행동을 이끄는 것은 사랑과 분노다. 모든 동물을 사랑하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현희진에게서 나는 사랑을 느낀다.

②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사랑이다. 전범선은 사랑이다. 벌새는 사랑이다. 현희진은 사랑이다. 이들은 비건이고, 사랑이다. 나는 이들을 사랑하고, 이들을 통해 사랑을 배운다. 누구에게나 사랑은 가능하다. 하지만 비건의 사랑은 능력이면서 동시에 노력이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허물며 타자의 영역을 넓혀나가는, 아주 드문 능력. 모두가 외면하는 곳을 향해 움직이는, 몹시 아프고 커다란 노력. 어쩌면 비건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사랑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어설픈 추론을 통해 완성된 문장은 다음과 같다:

②-4 사랑은 비건이다.

위 문장은 다음과 같이 바꾸어도 의미가 성립한다. ① 비건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비건은 사랑이다’라는 문장을 부연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비건’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스바, 수수감자, 고린, 구마, 탁구, 자우, 지민, 수아, 보리, 제비, 서린, 혜린, 류, 톨규, 구들, 달연, 차랑, 마공, 코브, 행, 산수유, 디디마, 지연, 승찬, 나리, 희지, 중완, 은수, 보아, 은비, 치현, 유정, 성수, 세미, 초식마녀, 민지, 준범, 연우, 헤루, 혜현, 세현, 류경, 원식, 현정, 재영, 연키, 무루, 성채삼촌, 지예, 종현, 다애, 진희, 열정, 채현, 승희, 원정, 백린, 은전, 길예, 해민, 슬아, 다솔, 지지, 서지, 다샤, 힐다, 소요, 채령, 지나, 모빈, 왕손, 로키, 모모, 록희, 흑미, 차돌, 머위, 메밀, 미나리, 부들, 엉이, 창포….

그리고 비건은 아니지만 내 여정에 힘을 실어주는 가족이 있다. 이제는 만날 때마다 고기를 완전히 끊지 못해 미안하다는 아버지. 고기를 원래 잘 드시지 않았지만 이제는 윤리적인 이유로 채식에 도전 중이신 어머니. 설에 따로 채식상을 차려주시고 채식하니 앞서간다며 채식상에 동석한 이모와 삼촌들. 아버지의 할머니도 평생 채식을 하셨다는데 나는 이 사실을 비건이 되고서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비건은 사랑의 실천이다. 비건은 인간이 아닌 동물을 사랑하고 그들의 고통에 공감한다. 미래 세대를 위해 고기를 먹지 않는다. 종의 멸종을 아파하고 이를 막기 위해 시간과 열정을 쏟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비건이 사랑인 이유는 비건을 하는 사람들과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들을 통해 비건으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시대와 혐오의 물결에 맞서 사랑으로 무장한 사람들이다. 비건은 세상을 이상적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열망이자 바꿀 힘을 간직한 사랑이다.

홍성환(비건인)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와 독자께 감사드립니다.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