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 저성장·고물가 위기.. 親中·親러 노선 부메랑으로 [세계는 지금]
메르켈 전 총리 집권 초 실업률 무려 11%
금융·유로존 위기 재정개혁으로 잘 극복
제조업 경쟁력 강화.. '유럽 슈퍼스타' 변신
제조업 비중 높아 코로나 초기에는 유리
사태 장기화로 물류난 심화.. 오히려 발목
의존도 높은 中 '제로 코로나'로 공급망 차질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 1위도 악영향
우크라사태 후 수입 급감.. '경고' 단계 상향
對러시아 제재·물가 안정 사이서 딜레마
인플레 반세기 만에 최고.. 푸드뱅크 긴 줄
◆대중·대러 의존 부메랑으로
독일은 1990년 통독 후 2000년대 중반까지 ‘유럽의 병자’라 불렸다.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가 정권을 잡은 2005년 실업률은 11.3%까지 치솟은 상태였다. 메르켈 전 총리는 노동개혁과 제조업 경쟁력을 높이는 데 답이 있다고 판단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와 2009년 유로존(유로화 사용국, 현재 19개국) 재정위기를 재정개혁으로 극복하고, 2012년 ‘인더스트리 4.0전략’을 내세워 제조업 경쟁력을 키웠다. 이후 독일은 ‘유럽의 슈퍼스타’로 거듭났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독일 시가총액 상위 15개 기업 중 10개사가 매출액의 10분의 1 이상을 중국 시장에 기대고 있다. 독일 3대 완성차 기업인 폴크스바겐·BMW·다임러는 중국을 가장 큰 시장으로 삼고 있다. 자동차부품 업체 보슈의 경우 중국에서 직원 6만명을 고용하고 있다.
독일산업연맹(BDI) 지크프리트 루스부름 회장은 지난달 1일(현지시간) 로베르트 하베크 독일 부총리 겸 경제장관과 회담 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이 결합해 올해는 ‘극도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위기감을 드러냈다.
러시아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 악영향을 주고 있다. 독일은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 1위 국가로 가스 공급량의 55%를 러시아에서 수입했다.
지난 2월 우크라이나 사태 발발 후 러시아산 가스 수입량을 25%까지 줄였으나, 독일 정부가 위기를 선언할 만큼 상황은 녹록지 않다. 지난달 23일에는 가장 높은 단계부터 비상-경고-경보 3단계로 이뤄진 천연가스비상공급계획경보를 기존 ‘경보’에서 ‘경고’로 상향했다. 하베크 부총리는 경보 상향 발표를 하면서 “우리는 가스 위기에 빠졌다”며 “이미 물가가 높지만 국민은 추가 인상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억만장자 투자자 조지 소로스는 지난 5월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에서 “친중·친러 기조는 독일을 유럽에서 가장 잘나가는 경제대국으로 만들었지만, 거기에는 치러야 할 비싼 계산서가 있다”고 지적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이 자리에서 “독일은 이제 공급망과 수출 시장을 시급히 다변화해야 한다”며 “기업들은 종종 경영대학원에서 기본 원리로 배우는 것, 즉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고 대중·대러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지난해 12월 출범한 숄츠 정권에서는 독일의 대중·대러 관계가 재설정될 수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폴크스바겐과 BMW는 전쟁 발발 며칠 뒤인 3월 초 러시아 공장에서 생산을 중단한다고 발표하고 대러 수출을 중단했다”며 “지정학적 위험이 긴밀한 사업 관계를 얼마나 빠르게 깰 수 있는지를 엄연히 상기시킨 것”이라고 짚었다. 이어 “만약 이들 기업이 중국에서 사업을 중단해야 했다면 그 파장은 훨씬 더 클 것”이라고 덧붙였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독일의 GDP 성장률 전망치는 1.6%다. 유로존 19개국 중 발트해의 소국 에스토니아(1.0%)에 이어 꼴찌에서 두 번째인 18위다.
네덜란드 은행인 ABN암로의 알리너 스하윌링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독일은 재앙적인 경제 상황에 부닥쳐 있다”며 “정부가 충분히 우려할 만하다”고 진단했다.
독일 ifo(정보·연구)경제연구소도 지난달 15일 올해 독일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종전 3.1%에서 2.5%로 하향 조정했다. 독일 킬세계경제연구소(IfW)는 올해 GDP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2.1%를 유지했으나 2023년 전망치를 3.5%에서 3.3%로 낮추고, 올해 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5.8%에서 7.4%로 상향 조정했다.
베를린 북동쪽 베르나우에 거주하는 가브리엘 와샤(65)는 “가끔 슈퍼에서 장을 볼 여유가 없어 거의 울먹이며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고 AFP와 인터뷰에서 토로했다. 연금 생활자인 그는 푸드뱅크에서 빵, 버터 등 30유로(4만800원)어치를 사면서 “이 소시지는 얼마 전엔 0.99유로(1346원)였는데 지금은 2유로(2720원)가 넘는다”고 했다.
노동조합은 인플레이션을 감당할 수 없다며 임금인상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380만명이 가입한 독일 최대 산별노조인 IG메탈은 지난달 15일 북서부지역 철강노동자 8만8000명의 연봉을 6.5% 인상하는 데 성공했다. 30년 만에 가장 큰 인상 폭이다.
전자부문 노동자들도 임금인상 목소리를 내고 있다. IG메탈의 금속·전자부문 노동자들은 9월부터 시작되는 임금협상에서 연 7~8% 인상안을 제시했다. 외르크 호프만 IG메탈 조합장은 성명에서 생활비 부담이 크다는 점을 강조하며 “기업들은 잘 지내고 있지만, 마트에서 영수증을 받아 든 직원들은 잘 지내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지민 기자 aaaa3469@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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