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강화도, 직물 도시의 역사에서 뉴트로가 싹튼다

허윤희 2022. 7. 2.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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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허윤희 기자의 원도심 골목 여행]허윤희의 원도심 골목 여행 강화도
수도권 근교 당일치기 여행지 강화도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하는 관광지 선정
1960~70년대 직물 산업 역사 곳곳에
고려궁지·한옥 강화성당 등 남아
미술관 카페로 변신한 직물공장 조양방직. 허윤희 기자

강화도는 역사의 섬이다. 청동기 시대 고인돌, 고려 때 쌓은 강화산성 등 문화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강화 원도심(강화읍 용정리, 신문리, 관청리)은 고려 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역사 유적지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곳. 지난해에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공동으로 선정하는,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하는 국내 대표 관광지인 ‘2021~2022 한국관광 100선’에 올랐다.

강화 원도심은 어떤 역사를 품고 있을까. 6월16일, 강화읍 관청리의 용흥궁공원. 시멘트가 벗겨지고 철근이 보이는 낡은 굴뚝이 우뚝 서 있었다. 공원에 웬 굴뚝? 바로 앞 안내판에 ‘심도직물 터’라고 쓰여 있다. 심도직물은 1947년부터 2005년까지 운영됐던 섬유회사로, 1960~70년대 이곳에서 일했던 이들이 1200여명에 달했다. 현재 심도직물 공장이 있던 자리는 용흥궁공원으로 바뀌었고 심도직물의 공장 굴뚝 위쪽 부분을 잘라 심도직물을 상징하는 기념물로 남겨놓은 것이다. 당시 굴뚝 높이가 30m가 넘었지만 5m 정도만 남아 있다.

직물공장인 심도직물이 있던 곳에 조성된 용흥궁 공원. 심도직물의 굴뚝이 있다. 허윤희 기자
조양방직 안에 전시된 1960년~70년 직물공장 당시 사진들. 허윤희 기자

번성했던 직물 도시의 흔적

강화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대구, 수원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직물 도시였다. 조양방직, 평화직물, 심도직물, 이화직물 등 직물공장 60여곳이 있었고, 강화읍에만 직물공장 직원이 4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하지만 1970년 중후반부터 합성섬유를 생산하는 대구로 중심이 옮겨 가고 인조 직물이 등장하면서 강화의 직물 산업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현재는 목화솜으로 만든 천연 직물인 소창을 생산하는 작은 공장 10여곳이 남아 있다.

문을 닫고 버려진 직물공장은 이제 카페로 변신해 강화의 핫플(핫플레이스)이 됐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설립된 직물공장인 조양방직. 강화읍 신문리에 있는 이 공장은 지난 20~30년 정도 폐공장으로 방치되다가 미술관 카페로 변신했다. 낡은 공장에 미술품, 고가구, 골동품 등으로 꾸며 ‘신문리 미술관’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강화의 관광명소이자 이색카페로 유명하다. 엠제트(MZ)세대의 ‘뉴트로(새로움과 복고를 합친 신조어) 성지’로도 주목받고 있다.

번성했던 강화 직물 산업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신문리에 있는 소창체험관에 들르면 좋다. 용흥궁공원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소창체험관은 1938년 건축된 한옥 건물과 옛 평화직물의 염색공장을 체험관으로 리모델링해 조성한 곳이다. 1960~70년대 우리나라의 직물 산업을 이끌던 강화도의 소창 역사를 주제로 전시된 미싱 등을 볼 수 있고 소창 손수건 스탬프 만들기 체험, 전통 한복 체험도 할 수 있다. 입장료·체험료는 무료이며, 운영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소창체험관에서 소창 작업 시연을 하는 고정희(72)씨는 강화에 몇 안 남은 소창 기술자다. 60여년간 직물 산업에 종사한 산증인이다. “50년 전만 해도 강화읍 일대에는 직물공장이 많았어요. 여자들은 대부분 그 공장에서 일했죠. 난 중학교도 못 가고 16살부터 직물공장에 다녔어요. 그땐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일했는데 그렇게 종일 일해도 한달에 10만원도 못 벌었죠. 천에 기스라도 나면 월급에서 10원씩 깎았어요.”

번성했던 직물 산업의 역사의 밑바탕에는 고씨처럼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 있었다. 1965~68년 합법적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노동자를 불법 해고한 ‘강화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1970~80년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소창체험관에서 소창 작업을 시연하는 고정희씨. 허윤희 기자
고려궁지에 있는 외규장각. 허윤희 기자
한옥 성당인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허윤희 기자

백두산 적송으로 만든 한옥 성당

강화도는 몽골의 침입이 있었던 1232년부터 1270년까지 39년간 고려의 수도였던 까닭에 고려 시대 유적이 남아 있다. 고려궁지(사적 제133호)가 바로 그것. 1232년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왕도를 강화로 옮긴 뒤 1270년 화의를 맺고 개성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 동안 왕이 머문 곳이다.

고려궁지에는 고려궁은 없고 건물 기단과 3단으로 된 돌계단이 일부 남아 있다. 당시 고려가 39년간의 항전 이후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몽골의 요청으로 궁지 내 건물들을 모두 헐어야 했다. 현재는 조선 시대 강화유수부 동헌, 이방청 그리고 조선 시대 왕실 서적이 보관된 외규장각이 있다. 외규장각은 병인양요 때 불타 없어졌으나 2003년에 복원됐다.

고려궁지 근처에서 또 다른 역사건축물을 볼 수 있다. 1900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지어진 한옥 성당인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밖에서 보면 한옥이지만 안은 서양의 바실리카(고대 그리스 신전을 로마식으로 발전한 형식) 교회 건축 양식으로 꾸며져 있다. 동양과 서양의 건축 양식이 조화를 이룬 특색 있는 건물이다. 현재도 예배를 보는 이곳 내부에는 1900년대 당시의 생활상을 찍은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강화군 이순희 문화관광해설사는 “성당 대들보와 마루의 목재는 수령 100년 이상의 백두산 적송”이라며 “성공회 3대 주교인 조마가 신부가 직접 신의주에서 구해 뗏목으로 운반해왔다”고 설명했다.

강화성당 바로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조선의 왕이 살았던 집으로 갈 수 있다. 용흥궁이다. 조선 25대 임금 철종의 잠저로, 강화도령으로 불리던 철종 임금이 이원범이라는 이름으로 5년 동안 살았던 곳이다.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가 보잘것없던 초가집이었던 이곳을 기와집으로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불렀다고 한다. 전형적인 조선 사대부 살림집으로 안채, 사랑채, 문간채로 구분돼 있다. 내부 빈터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세워져 있다.

강화산성의 남문 안파루. 허윤희 기자
강화읍을 에워싼 강화산성의 성곽길. 허윤희 기자

강화산성길 걸으며 보는 원도심

강화 원도심을 에워싸는 고려 시대의 산성인 강화산성이 있다. 강화산성은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을 때 도성으로 쌓은 것. 초기에는 내성, 중성, 외성으로 이루어졌는데 내성은 1259년 몽골에 의해 헐린 뒤 조선 시대에 돌로 다시 쌓았다. 그러나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가 다시 파괴하여 조선 숙종 3년(1677)에 크게 넓혀 고쳐 쌓았다.

강화산성을 따라 이어진 ‘고려궁 성곽길’ 코스가 마련돼 있다. 남문을 출발해 남산 정상 남장대와 국화저수지 산책로를 지나 서문을 둘러보고 다시 북문을 지나 북산 정상 북장대를 돌아 내려오는 코스다. 총 길이가 11㎞로 4~5시간 걸린다. 특히 남장대에 올라서면 강화읍 원도심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강화/글·사진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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