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 없는 미국맛? 세상 바꾸려는 ‘열망의 맛’ 아이스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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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코언과 제리 그린필드
국내에도 등장한 ‘벤앤제리스’
하겐다즈-나뚜루와 삼국시대
창업자들 반핵·평화 활동 눈길
‘브랜드 행동주의’ 모범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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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다. 날마다 편의점 냉장고에서 ‘2+1’으로 판매하거나 새로 나온 제품이 있나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좋아한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서 고지혈증 약을 먹고 있는 주제에 무슨 날마다 아이스크림이냐고 묻는다면 차라리 쌀밥을 끊겠다고 말할 것이다. 세상에는 죽어도 포기할 수 없는 음식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누군가에게 그건 새벽 2시쯤 냉장고를 열면 남아 있는 피자 한 조각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엄마 집 김치로 끓인 김치찌개일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엄마 집 김치찌개라는 건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의 엄마는 더는 김장을 할 이유가 없다. 김치를 당신에게 보낼 의무도 없다. ‘종갓집 김치’로 끓여도 김치찌개는 충분히 맛있다.
아이스크림 삼국시대 연 ‘벤앤제리스’
그나저나 왜 하필 아이스크림인가. 어쩌면 그건 우리 대부분의 트라우마가 그렇듯이, 유년기의 기억에서 시작된 집착일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종종 빙그레에서 나온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사 오셨다. 투게더가 한국 최초 원유 아이스크림이라는 홍보 문구와 함께 탄생한 게 1974년이다. 1980년대 아이들에게 투게더는 모든 아이스크림의 기본이자 절정이었다. 숟가락을 들고 황금색 종이 뚜껑을 열면서 항상 나는 노래를 불렀다. “엄마 아빠도 함께 투게더.” 아이스크림 광고에도 행복한 4인 가족이 등장하던 시절이었다. 한국의 모든 것은 4인 가족이 기본이었다. 아빠, 엄마, 아들, 딸이 등장해 행복한 표정으로 함께 숟가락을 드는 아이스크림 광고는 더는 나오지 않는다. 이제 그런 일은 여간해서 잘 벌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요즘 사람들이 편의점에 가서 신상을 확인하는 브랜드는 오랫동안 단 두 가지였다. 롯데의 ‘나뚜루’와 많은 사람이 덴마크 브랜드로 착각하고 있는 미국 브랜드 ‘하겐다즈’다. 두 브랜드는 한국 아이스크림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아이스크림 전문가(?)로서 말하자면 두 브랜드의 특징은 확실히 다르다. 둘 다 양질의 유지방이 듬뿍 들어간 진한 맛에 있어서는 우위를 가리기가 힘들다. 대신 하겐다즈는 종류가 많고 나뚜루는 기본 맛에 충실하다. 하겐다즈는 종종 시즌 한정판을 출시하곤 하는데 꽤 실험적인 제품이 많다. 나뚜루는 녹차 아니면 과일이 들어간 ‘소르베’ 제품을 선택하는 게 좋다. 이쯤에서 ‘이 글은 어떠한 아이스크림 브랜드로부터도 돈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먼저 밝히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하겐다즈와 나뚜루가 양분하던 고급 아이스크림 시장을 살짝 흔들고 있는 브랜드가 있다. 미국의 ‘벤앤제리스’다. 흔든다는 말을 하기에는 영향력이 조금 미미하긴 하다만, 어쨌든 두 브랜드와 함께 편의점 아이스크림 매대를 장식하기 시작했으니 일종의 아이스크림 삼국시대가 시작됐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벤앤제리스의 특징은 ‘근본 없는 미제 맛’이다. 바닐라 맛을 제외하면 한 가지 맛으로 구성된 제품이 없다. 이를테면 벤앤제리스의 가장 인기 있는 상품 두 가지는 ‘체리 가르시아’와 ‘하프 베이크드’다. 전자는 체리 아이스크림에 초콜릿이 듬뿍 박혀 있다. 후자는 초콜릿·바닐라 아이스크림에 반쯤 익힌 쿠키 반죽 덩어리가 마구 섞여 있다. 화려하다. 맛도 화려하다. 한 숟가락을 떠먹는 순간 뇌로 가는 핏줄이 모조리 쿠키 반죽으로 막히는 기분이 든다. 위험한 맛이다.
벤앤제리스는 1978년 뉴욕주 롱아일랜드 출신의 친구인 벤 코언과 제리 그린필드가 세운 회사다. 그들은 겨우 자본금 1만2천달러로 버몬트주 벌링턴에서 둘의 이름을 딴 ‘벤앤제리스’를 창업했다. 둘은 아이스크림 전문가도 아니었다. 제리 그린필드는 1977년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의 통신교육으로 아이스크림 제조법을 배웠고, 그로부터 겨우 1년 만에 회사를 만들었다. 당시 미국 아이스크림 시장은 필즈버리사의 하겐다즈가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 벤앤제리스가 미국 북동부를 중심으로 인기를 모으자 필즈버리는 지역 유통업체들에 하겐다즈와 벤앤제리스 중 하나만 팔 것을 강요했다. 벤앤제리스는 자사 제품에 “도보이는 뭐가 두려운 걸까?”라는 스티커를 붙여서 팔기 시작했다. ‘도보이’는 필즈버리의 마스코트였다. 여론이 악화하자 필즈버리는 유통시장 장악을 포기했다. 작은 회사를 살린 것은 재치 있는 마케팅과 그에 감응한 윤리적 소비자 운동이었다.
“기업의 공동선” 말한 창업자들
사실 당신이 벤앤제리스라는 이름을 처음 본 것도 편의점 냉장고가 아니라 국제 뉴스 섹션에서였을 것이다. 창업자인 유대인 벤 코언과 제리 그린필드는 2021년 9월 성명을 내고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점령지에서는 아이스크림을 팔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유대인 정착촌을 확장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내쫓는 이스라엘 정부에 던지는 정치적 메시지였다. 이스라엘 총리는 벤앤제리스를 ‘안티이스라엘 아이스크림’이라고 공격했지만, 벤 코언과 제리 그린필드는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기업은 공동선을 위해 영향력을 사용할 책임이 있다”고 반박했다. 영화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유명한 대사인 “큰 힘에는 큰 책임감이 따른다”를 떠올리게 만드는 선언이었다.
두 사람이 정치적 메시지를 내놓은 건 이게 처음도 아니었다. 그들은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1980년대 초 레이건 정부의 핵 개발에 반대하며 ‘피스 팝’이라는 아이스크림을 출시했다. 그러고는 아이스크림 판매액의 1%를 평화를 위한 기금으로 기부했다. 그걸 시작으로 벤 코언과 제리 그린필드는 ‘브랜드 행동주의’의 교과서가 될 일들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모든 행동은 아이스크림 이름에 그대로 새겨졌다.
벤앤제리스의 가장 인기 있는 상품 ‘체리 가르시아’는 히피들의 영웅이었던 록밴드 ‘그레이트풀 데드’의 리더인 제리 가르시아의 이름에서 왔다. 1980년대 초 레이건 정권은 마리화나 흡연을 중범죄화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벤앤제리스는 이에 항의하며 가장 유명한 마리화나 애용자인 제리 가르시아의 이름을 딴 아이스크림을 출시한 것이다.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이 시작되자 벤앤제리스는 ‘임파워먼트 민트’를 출시했다. 출시되지는 않았지만 2016년에는 버니 샌더스를 지지하기 위해 ‘버니의 열망’(Bernie’s Yearning)이라는 민트 아이스크림을 개발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민트 맛은 오로지 치약에서 나야 한다고 믿는 나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맛이긴 하지만 꽤 독창적인 아이스크림 정치 운동인 건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벤앤제리스를 단순히 재미있는 정치적 운동을 벌이는 브랜드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벤 코언과 제리 그린필드는 회사를 창업하며 한 가지 경영 원칙을 세웠다. ‘보살피는 자본주의’(Caring Capitalism)였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여전히 고집스러운 사회주의자라면 ‘보살피는 자본주의? 자본주의가 뭘 보살핀다고?’라며 약간의 짜증을 내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보살피지 않는 자본주의와 보살피는 자본주의가 있다면 우리는 어쨌든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라는 한계 안에서 어떻게든 우리는 인간의 얼굴을 발견하려고 노력해왔다. 벤앤제리스는 아마도, 그나마, 가장 인간의 얼굴을 한 아이스크림 회사일 것이다.
그들의 행동주의는 정치적 문구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은 창업할 때부터 성장호르몬을 맞은 젖소의 우유는 절대 사용하지 않았다. 모든 우유는 지역 경제를 위해 본사가 있는 버몬트주에서 생산된 것만 사용했다. 세전 이익의 7.5%는 성소수자 인권, 인종차별, 성차별, 환경오염 등을 다루는 다양한 자선 재단에 기부했다. 놀라운 것은 이 같은 강고한 원칙이 벤앤제리스가 지난 2000년 다국적기업 유니레버에 매각된 이후에도 계속 지켜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벤 코언과 제리 그린필드는 매각 가격을 낮추면서까지도 “창업 정신을 지킨다”는 계약 조건을 끝내 고집했다. 그리고 그 고집은 다국적기업의 한 브랜드가 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벤앤제리스 누리집에는 “우리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아이스크림을 이용합니다”라는 문구가 있는데, 맞다. 꽤 미국식으로 뻔뻔한 소리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기업들의 세상에는 이런 뻔뻔한 소리도 여전히 드물다.
‘용산 민초’, ‘586 인절미’ 맛 안 될까?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당장 편의점으로 달려가 벤앤제리스 아이스크림을 시도해보려 할 것이다. 일단 ‘체리 가르시아’를 선택하면 실패는 없다. 미국에서 마리화나가 합법화되기 30년도 전에 합법화를 기원하며 생산한 아이스크림이니 아마도 마리화나를 피우고 먹으면 더 맛있을 것이다. 물론 이건 그냥 가정일 뿐이니 세상의 모든 국가가 빠르게 합법화하고 있는 특정 불법 식물 섭취 행위를 선동한다고 항의하진 말아 주시길 부탁드린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한국에서도 벤앤제리스의 인기가 좀 더 올라가서 다양한 제품이 판매되길 바라는 아주 개인적 욕심 때문이다. 한국 시장에 맞춰서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신제품들을 내주면 아주 좋겠다. 민트의 맛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끌어올린 ‘용산 민초’나 내용물이 이빨에 쩍쩍 붙어서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586 인절미’ 정도라면 썩 괜찮을 것이다.
영화 잡지 <씨네21> 기자와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을 했다. 사람·영화·도시·옷·물건·정치까지 관심 닿지 않는 곳이 드문 그가 세심한 눈길로 읽어낸 인물평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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