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 인터뷰②] 설경구 "OTT 시리즈 신세계, 영화 외 두려움 사라져"
36회 신인연기상, 38회 대상, 50회 최우수연기상 이어 네번째
"필름의 맛 느끼며 자라 OTT 새 시장까지..K콘텐트 격변 응원"
8년 만에 다시 백상 무대에 올랐다. 배우 설경구에게 '지천명 아이돌'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인생 2막을 열어 준 변성현 감독의 작품으로 수상 기록을 남겨 더 뜻 깊다. 센세이션한 충무로 데뷔 후 신인연기상을 품에 안았던 2000년부터 회상하면 무려 22년 간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냈다. 현장을 '휴식처'이자 '충전소'라고 말하는 천생 배우 설경구의 굵직한 시간을 백상예술대상도 늘 함께 했다. 백상예술대상의 역사에서 설경구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최근 몇 년 간 후보로서 꾸준한 건재함을 보여줬던 설경구의 이름이 제58회 백상예술대상에서 드디어 호명됐다. 2014년 '소원(이준익 감독)'으로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을 받은 후 꼬박 8년 만에 같은 부문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다. 2000년 '박하사탕(이창동 감독)'으로 신인연기상을 거머쥐며 영화계 연기 괴물의 탄생을 알렸던 설경구는 2002년 '공공의 적(강우석 감독)'으로 곧바로 대상을 수상, 바야흐로 '설경구 시대'를 열었고 여전한 현역으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공교롭게도 '박하사탕' '오아시스'로 배우 설경구를 세상에 알린 이창동 감독, 범죄 형사물의 새 지평을 연 '공공의 적'을 비롯해 '실미도'로 한국영화 최초 1000만 대기록을 함께 쓴 강우석 감독, '소원' '자산어보' 등 매 작품 '연기파' 설경구의 힘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준익 감독, 그리고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을 통해 섹시한 설경구의 새 얼굴을 과감하게 꺼내 든 변성현 감독까지, 설경구를 '페르소나'로 낙점한 감독들의 작품으로 빠짐없이 트로피를 수집하게 됐다.
"새로운 건 늘 끌리니까. 앞으로 나를 페르소나로 활용해주는 새 감독을 더 만나게 되길 바란다"며 너털웃음을 지은 설경구는 "사실 '킹메이커'는 내가 킹메이커 롤이 아니라 '상을 받을 자격이 되나' 싶었다"고 솔직한 마음을 털어 놓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 백상 대상 수상작 '자산어보'와 '킹메이커' 등 설경구는 팬데믹 영화계를 지켜 준 배우로 충무로 큰 형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킹메이커'는 이러한 '귀한 배우' 설경구의 근사함을 다시 확인 시켜준 작품. 진정한 '무비메이커'의 수상에 모두가 박수를 보내는 이유다.
'필름의 맛'을 느끼며 성장한 영화인으로 '영화'에 대한 사랑은 변함 없지만, 어느 때보다 각광 받고 있는 K콘텐트의 힘과 시스템 변화에 대한 긍정적 시선도 갖게 된 요즘이다. 후배 사랑이 남다른 것으로 유명한 만큼 '누구 때문에'라는 이유로 대부분의 OTT 시리즈를 챙겨 보기도 한 설경구는 "OTT 시리즈는 과거 드라마 현장과는 확실한 차별점이 있더라"며 "무엇보다 후배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이왕이면 큰 시장에서 노는 것이 좋지 않나. 그런 점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됐다"는 진심을 표했다.
-지난 2년 간 '팬데믹 스크린을 지켜 준 배우'라는 평도 받았죠.
"극장 환경이 다시 정상화 되고, 찾아 주는 관객 분들도 많아지는 것 같아 호의적이지만, 영화라서, 한국 영화니까 무조건 보는 시대는 지난 것 같아요. 잘 만들어야 선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고, 극장으로 관객들을 끌어 들일 수 있는 힘도 결국 작품의 완성도 아닐까요. 배우를 비롯한 창작자들의 불변의 숙제이기도 하고요. 팬데믹 전보다 더 '최선을 다해서 새로운 것, 관객이 좋아할 작품을 선보여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게 돼요."
-그 사이 K콘텐트도 큰 변화를 겪었고요. 해외 시장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요.
"영어로 연기해야 하는 '진출'에 대한 것이라면 힘들 것 같고요. 하하. 다른 나라 언어 연기는 어휴…. 한국말로는 북한말이든, 사투리든, 뭐든 연습해서 할 수 있죠. '파친코'도 미국 작품이기는 하지만 한국말로 연기 하잖아요? 거기 (김)민하가 저희 옆집 사는 애예요. 엄마, 아빠랑도 친하고 진짜 애기 때부터 봤거든요. 그 놈이 그렇게 될 줄 알았나.(웃음) 근데 보면 늘 최선을 다했어요. 오디션 봐서 떨어져도 계속 도전하더라고요. 단편도 찍고. '파친코'에 캐스팅 됐다고 했을 때 '기특하다. 너 정말 열심히 살았다'고 축하해 줬어요."
-제작 환경에 따라 배우에 대한 캐스팅 기준도 달라지는 것 같아요.
"한국은 자원이 풍부한 나라는 아니지만 사람이 많은 나라잖아요. '뛰어난' 사람이. 요즘 나오는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진짜 잘 만들고 연기들도 참 잘해요. 연기 못하는 배우가 없어. 아주 미치겄어~.(웃음) '파친코'에서도 선자 엄마로 나오는 배우 연기에 놀라서 '와, 저 배우 누구야?' 바로 찾아 봤어요. 정인지 배우요. 대사를 씹어 가면서 사투리 연기를 하는데 '우와, 우와' 하면서 보게 되더라고요. OTT 시장을 통해 가장 큰 수혜를 입는 건 대한민국 콘텐트 아닐까 생각해요."
-평소에 OTT 시리즈까지 다 챙겨 보나요.
"다 챙겨 보지는 못해요. '파친코'는 민하 때문에 봤고, '오징어 게임'은 난리가 나기도 했지만 (박)해수 때문에 더 챙겨 봤고, '지금 우리 학교는'은 (윤)찬영이가 나와서 봤죠. 'D.P.'는 또 (구)교환이가 있으니까.(웃음) 작품들이 진짜 대단하더라고요. 전 백상 때도 교환이 보느라 웃겨 죽는 줄 알았어요. 'D.P.' 상 받을 때 '우와!' '모가디슈' 상 받을 때도 '우와!' '킹메이커'도 지금 '길복순'을 같이 하고 있으니까 또 와서 '우와!' 하더라고요. 하하. 본인 상 받는 것까지 챙겨야 하고 '오늘 교환이 바쁘다~' 했죠."
-'길복순'은 OTT 작품이긴 하지만 영화예요. 언젠가 시리즈에 출연하는 모습도 볼 수 있게 될까요.
"확실히 마음이 좀 달라지긴 했어요. 제가 두려워 했던 건 기존 드라마 제작 시스템이었거든요. 모든 드라마 현장이 그런 건 절대 아니겠지만, 주변에서 하도 극한의 환경을 이야기 하니까 지레 질려서 '난 못해. 그렇게는 못해' 했거든요. 심지어 '7박 9일 동안 밤새 찍는다'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대사 많아서 죽겠어요'라는 말은 정말 많이 들었고요. 반면 OTT 시리즈는 영화 시스템과 비슷해요. 영화 감독, 스태프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기도 하고, 영화로 다 못 풀어내는 이야기들이 있잖아요. 한정된 러닝타임에 우겨 넣다 보니까 부작용이 생기기도 하고. '그러느니 조금만 더 시간을 할애하면 괜찮지 않을까' 고민하게 되는데 그 강점이 OTT 시리즈에 있는 것 같아요."
-회차별 시간도 유동적이고, 시리즈지만 한꺼번에 공개된다는 장점도 있죠.
"맞아요. 한 회 시간이 짧고, 보고 있는데 다음이 궁금해지는 매력이 있더라고요. 표현의 한계도 별로 없고요. 옛날에는 '필름'에서 오는 자부심이 있었어요. 필름 돌아가는 소리가 정겹고, 모든 영화사가 필름 깡통을 재떨이로 쓰고. 그게 다 '멋' 같이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런 시대는 또 아니죠. 나 때와 내 선배 때의 갭이 큰데, 우리 때와 후배들의 갭도 확실히 있어요. 저도 현역이긴 하지만 후배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된 것 아닐까. 무엇보다 채널 하나로 전 세계 시장이 공유 되니까요. 후배들과 감독 등 창작자들에게는 큰 기회이자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요. 이왕이면 큰 시장에서 놀면 좋잖아요. 그런 면도 긍정적으로 봐요."
-언젠가 TV부문 수상자로 뵙게 될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이 드는데요.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하하하. 과거에는 '영화로 상 받는 게 참 힘들다' 생각했는데, 올해 보니까 TV부문은 경쟁이 그냥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맨 뒤에서 지켜 보는데 와, 진짜 살벌하더라. 좋은 작품도 너무 많고, 후보 누구든 줘도 될 것 같고. 여기서 뭐, 저기서 뭐 나오는데 열심히 박수 쳤어요."
-개봉한 작품 만큼, 개봉을 기다리는 차기작도 여럿이에요. 쉼 없는 열일은 계획된 행보일까요.
"그건 아니에요. 타이밍이 잘 맞은 것이고, 때마다 하게 되는 작품들이 생기더라고요. 물론 결정은 제가 하는 건데, 이전과 다른 모습, 캐릭터에 끌리는 것 같아요. 그런 작품이 있으면 잡죠. 이해영 감독의 '유령'도 그렇고, '더 문'은 다른 모습까지는 아니지만 '신과 함께' 시리즈의 저승을 탄생 시켰던 김용화 감독이 만드는 달과 우주의 모습은 어떨까 궁금했어요."
-곧 '더 디너' 촬영도 들어가죠. 휴식기가 필요하진 않나요.
"지금 쉬면서 준비하고 있어요. '더 디너'가 끝나면 진짜 좀 쉴 것 같아요. '더 문' 끝나고도 3개월 정도 쉬었는데, 쉴 때 개봉을 하고 준비를 하니까 안 쉰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그리고 막상 쉰다고 해도 제가 하는 것이 없더라고요. '재충전'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저는 새로운 작품을 하면 충전이 돼요. 옛날에 6~7개월 쉴 때도 충전한 것 같지도 않고 그냥 시간만 보낸 것 같아서. 그렇다고 의무적으로 작품을 찾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긴장되고 정신이 번쩍 드는 계기가 되기는 해요."
-연기 외 특별한 취미도 없나요.
"없어요. 골프 가끔 나가기는 하지만 재미는 없고.(웃음) 제가 봐도 저는 현장을 좋아해요. 솔직히 영화 일은 괴로워요. 매 작품 할 때마다 '이건 어떻게 해결해야 하냐' 미치겠어요. 근데 현장에 있는 건 즐거워. '자산어보' 때도 평소의 저라면 그 먼 섬에 절대 안 들어가요. '목포까지 가서 배 타고 왜 또 들어가냐' 할텐데 영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야 하잖아요. 가면 너무 좋은 거예요. '이야~ 행복하지 않냐?' 소리도 절로 나오고. 웬만하면 어제 간 현장은 거의 가지 않고, 어제 찍었던 신 다시 안 찍고, 했던 말 또 안 하니까 그 새로움이 좋은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배우 설경구를 충전시킨 새로운 작품들도 기대가 되네요.
"팬데믹 때 찍었던 작품들은 저에게 나름 큰 자극이 됐어요. '소년들'을 찍을 땐 76세 정지영 감독님이 현장을 막 뛰어 다녀요. 디렉팅도 무전기가 뭐야, 육성으로 소리 치시고 200번은 앉았다 일어났다 하세요. 제일 젊은 조감독과 열정적으로 작품에 대해 논쟁 하는 것도 지켜 보면 재미있죠. 아들 뻘인데 그렇게 보지 않고 '형이라고 불러!'라고 하면서 딱 같은 일을 하는 동료로 바라 보는 거예요. 뒤풀이 가면 현장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같이 웃고 떠들고.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가 어마어마한 감독님의 사고 자체가 많은 자극이 됐어요. 김용화 감독님, 이해영 감독님도 각자마다 캐릭터가 다르니까 보고만 있어도 충전이 됐고요. '길복순' 같은 경우는 다른 작품에 비해 분량도 적지만 변성현 감독과 한번도 안 싸웠어요. 으하하하. '불한당' 때 제일 많이 싸웠고, '킹메이커' 때 좀 줄었고, 이번엔 아예 안 싸웠죠. 세번째 작품을 하면서 '아, 이제 내가 변성현 좀 아는구나' 했어요. 가만히 있으면 자극 받을 것도 없고, 술만 마시고 몸 축나고. 촬영할 땐 그 핑계로 술도 많이 안 마시니까 좋아요."
-진부한 질문이지만, 지금까지의 설경구를 돌아보며 앞으로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은가요.
"영화를 처음 시작하고, 동시에 백상에서 큰 상을 받았어요. 앞서 말했듯이 연극했던 시절에 '백상!' 하면 엄청나게 큰 상이었거든요. 그걸 받으면서 시작해서 아주 순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저는 복 받은 배우죠. 50대 중반인데,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고 작품이 꾸준히 저에게 오고 있고. 근래에는 상을 주실 정도로 좋은 작품들을 찍은 것 같아서 '복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더 하고 있어요. 나이가 드니까 작품 선택의 폭이 확 넓어지지는 않지만, 반대로 젊었을 때 안 들어왔던 작품들이 들어와요. 깊이 있게 접근할 수 있다는 또 다른 맛이 있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땐 힘을 끌어 모아 모아 참다가 불안함의 정점에서 팍 폭발 시키는 역할을 지겹도록 했죠, 저.(웃음) 스스로도 '그렇게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바뀌게 된 시점이 '불한당' 같아요. '아, 안 터트려도 되는구나' 여유가 생기더라고요. 좀 더 깊이 있게 한 줄 한 줄 표현하다 보면 완전 다른 내 모습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다른 모습이 보여지지 않을까' 기대하고 싶은 기대? 그런 변화를 앞으로도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조연경 엔터뉴스팀 기자 cho.yeongyeong@jtbc.co.kr (콘텐트비즈니스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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