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한 중 민주인사 팡리즈 "중국 인민도 자유, 인권, 민주를 원한다!"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2022. 7. 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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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38회>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 당시 한 청년이 상의를 벗고서 평화의 상징을 연출하고 있다. 사진/Stuart Franklin—Magnum>

자유와 민주를 기억하는 시민은 신민으로 돌아갈 수 없다

민주주의가 반드시 인간의 본성에 딱 맞는 제도라 할 수 있을까?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꼭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을 듯하다. 고대 그리스의 소규모 폴리스에서도 플라톤은 민주정이 최악의 중우정치로 귀결된다고 비판했다. 불과 200년 전만 해도 대다수 인류는 군주의 통치를 받으며 신민(臣民)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 당시 신민이 모두 스스로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 부자연스럽고 기괴한 제도 속에서 살고 있다고 느꼈다고 볼 수는 없다. 인간은 본래 언제 어디서든 적당히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적응력을 발휘한다.

다만 누구든 자유의 맛을 보고 민주의 의미를 알게 되면,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서 군주의 신민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정신적 해방의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노예가 노예로서 노예답게 노예적 삶을 사는 이유는 본성상 노예라서가 아니라 자유가 무엇인지 몰라서이다. 달아난 노예 신분으로 노예제 폐지에 앞장섰던 19세기 미국의 흑인 정치가 프레데릭 더글라스(Frederick Douglas, 1817?-1895)가 말했듯, “앎은 인간을 더는 노예로 살 수 없게 한다(knowledge makes man unfit to be a slave).”

1989년 베이징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발생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선 중국인의 뇌리에 새겨져 있는 자유와 민주의 기억을 들춰내야만 한다. 그 당시 톈안먼 광장에 운집한 시민들은 분명 1919년 5월 4일 같은 장소에서 “평화조약 무효,” “배신자 처단”과 함께 그 당시 시대정신이었던 “덕선생(德先生, 민주, 덕은 “democracy”에서 “de”의 음역)”을 부르짖었던 선배의 음성을 기억하고 있었다. 더 가까이는 1976년 4월 5일 바로 그 톈안먼 광장에서 “민주를 원한다! 파시스트는 물러가라!”를 외쳤던 성난 군중의 울부짖음을 되새기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이 “톈안먼 민운(民運, 민주화 운동)”의 기억을 지워서 “인민 망각 공화국”을 만든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자유의 맛을 본 노예는 달아나거나 반항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여, 안녕하십니까!” 1989년 톈안먼 광장에 모인 학생들은 1919년 5.4운동을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덕선생”은 5.4운동 당시 민주주의의 별칭이었다. 사진/64memo.com>

방중 중인 부시 대통령 초청 만찬에 반정부 인사 팡리즈 부부 참석 못하게 막아

톈안먼 대학살이 발생하기 석 달 전, 1989년 2월 28일 저녁 베이징 셰라톤 호텔에서 당시 방중 중이던 취임 1개월 된 조지 H.R.부시(1924-2018) 미국 대통령이 중국 각계 500여 명의 인사들을 초청해서 “텍사스 바비큐” 파티를 열었다. 그날 초청장을 받은 사람들 사이엔 당시 중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된 천체물리학자 팡리즈(方勵之, 1936- )와 그의 부인 베이징대 교수 리수셴(李淑嫻, 1936?- )도 포함돼 있었다.

팡리즈와 리수셴은 중국공산당이 예의주시하는 “부르주아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반정부 인사들이었다. 그 점을 잘 아는 미 대사관은 그날 만찬장에서 팡리즈에게 인권에 관한 연설을 부탁해놓았다. 팡리즈가 중국의 저명인사 500명 앞에서 보편적 인권에 관한 연설한다면, 중국공산당으로선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중국 측은 미국에 공식적으로 항의하면서 팡리즈가 참석하면 만찬을 거부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지만, 미국 측은 팡리즈 초청 계획을 철회하지 않았다. 당일 점심께 미국 측은 팡리즈와 리슈셴 부부가 예정대로 만찬에 참여하기로 했다고 중국 측에 알렸다.

<1989년 6월 5일 미국 대사관으로 망명한 천체물리학자 팡리즈와 베이징 대학 교수 리수셴이 언론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공공부문>

이에 중국 측은 미국 측과 정면충돌하는 대신 경찰을 동원해서 팡리즈 부부의 진입 자체를 무력으로 막는 비상 수단을 썼다. 텍사스 바비큐는 그대로 두고 팡리즈 부부만 불참시키면 된다는 발상이었다. 경찰은 만찬장으로 향하던 팡리즈 부부의 앞길을 막더니 다른 차량을 이용할 수 없게 했다. 팡리즈 부부는 지지 않고 살을 에는 베이징의 삭풍을 맞으며 걸어가기 시작하자 경찰은 3시간이나 따라붙으며 그들의 걸음을 훼방했다. 결국 그날 만찬은 팡리즈 없이 진행되었다.

당시 그 현장을 취재하던 서방 기자들은 일제히 팡리즈 부부가 불참한 이유를 파헤치는 기사를 쏟아냈지만, 대통령은 베이징을 떠나기 전 “유감”이라는 한마디만 했을 뿐이었다. 대통령 대신 미국 국가안보 고문은 당시 주중 미국 대사에게 모든 책임을 물었다.

미국이 중국에 공식적으로 항의한다면 중국은 내정간섭이라면 반발했을 터였다. 중국과의 외교 마찰을 원치 않았던 미국은 대충 그 문제를 덮어두고 가려 했다. 당시 팡리즈 부부 초빙을 배후에서 건의하고 주선했던 페리 링크(Perry Link, 1944- ) 전 프린스턴 대학 교수의 해석에 따르면, 당시 부시 대통령은 사전에 그 계획을 허락했음에도 중국과의 외교 마찰로 임기 초 지지율 하락을 우려해서 대사 문책 정도로 넘어갔다고 해석한다.

해서 미국 정부는 팡리즈 부부의 인권이 짓밟혔음에도 “유감”이라는 한마디로 슬쩍 덮어버렸다. 적어도 미·중 관계는 순조롭다는 인상을 대중의 머리에 심기 위함이었다. 그때만 해도 미국 정부 내의 그 누구도 한 달 보름 후에 베이징을 통째로 삼킬 거대한 민주화의 태풍이 일어나리란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정치개혁 상징’ 후야오방 장례식에 학생 10만여명 인민대회당 앞에 결집

1989년 4월 15일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이 사망했다. 이틀 후, 대학생 수만 명이 자발적으로 민주의 광장에 모였다. 학생들은 반부패와 정치개혁의 상징적 인물 후야오방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동시에 자유의 확대와 정치개혁을 부르짖었다.

4월 18일에서 21일 사이 나흘에 걸쳐서 순식간에 베이징에서 일어난 민주의 돌개바람이 전국의 다른 도시들로 불어갔다. 대학가의 학생들이 움직이자 노동자와 관료들이 시위대에 동참했다. 민주의 구호 아래 집결한 노동자들은 인플레, 저임금, 치솟는 집값 등 생계 밀착형 이슈를 내걸고 격렬하게 반정부 시위를 이어갔다.

<1989년 4월 21일, 톈안먼 광장에 운집한 시민들. 사진Sadayuki Mikami / AP>

중공중앙은 시위가 사회적 혼란을 부추겨서 급기야 큰 반란으로 폭발될까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리펑(李鵬, 1928-2019) 총리를 위시한 당내의 보수파는 “자산계급 자유화 세력”의 검은손이 민운(民運)의 배후라고 주장했다. 자오쯔양(趙紫陽, 1919-2005) 등 소수의 당내 개혁파는 학생 대다수는 정신이 올바르며 애국적이라며 두둔했다. 리펑이 싹부터 잘라야 한다며 선제 진압을 요구했지만, 자오쯔양은 후야오방 추모식만 일단 잘 넘기자며 유화책을 제안했다.

1989년 4월 19일 학생들은 톈안먼 광장에서 동쪽으로 불과 1-2킬로 떨어진 중난하이(中南海)를 향해서 행진했다. 중난하이는 중공중앙의 집무실이 밀집해 있는 중국 정치의 심장이었다. 학생들이 중난하이 부근에서 농성을 벌이자 경찰이 몰려와서 충돌이 일어났다.

4월 22일 후야오방 장례식이 거행될 때, 10만 이상의 학생들이 인민대회당 앞에 결집해 있었다. 그때 세 명의 학생들이 손수 작성한 청원서를 들고 인민대회당 계단에 올라가서 리펑과의 만남을 요구했지만, 리펑은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격분한 학생들은 동맹휴업에 돌입했고, 여러 대학의 대표들이 모여서 중국에선 불법화된 학생조직을 결성한다.

인민일보 ‘혼란에 맞서야 한다’ 사설에 격분한 15만 학생들 톈안먼 광장으로

4월 25일 자오쯔양이 북한을 방문길에 오르자 리펑은 정치국 회의를 열고 강력한 사전 진압을 주장하며 실질적인 최고 영도자 덩샤오핑을 설득했다. 덩샤오핑은 학생들이 체제 전복을 기도한다는 강경파의 주장을 인정하고, 강력한 선제 진압을 결정했다. 4월 26일, <<인민일보>>는 제1면에 학생들을 반란 세력을 몰아가며 “혼란에 결연히 맞서야 한다!”는 사설을 실었다.

< “반드시 선명한 깃발로 동란을 반대해야!” 1989년 4월 26일 인민일보 제1면의 사설. 이 사설이 발표된 후 시위는 더욱 커졌다.>

편파 보도에 격분한 15만 명의 학생들은 경찰 저지선을 뚫고 톈안먼 광장으로 몰려갔다. 다음 날엔 이에 호응한 인민들이 전국에서 시위에 나섰다. 이때부터 톈안먼 민운은 점점 더 범시민적 총궐기의 양상으로 발전했다. 당시 베이징에서 현장을 취재하던 캐나다 기자 잰웡(Jan Wong, 黃明珍, 1952- )에 따르면, 베이징 시민 열 명 중 한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의사, 간호사, 과학자, 심지어는 군인까지 시위에 동참하는 놀라운 상황이었다.

4월 29일에서 5월 3일까지 서방 언론엔 날마다 톈안먼 민주화 운동 관련 보도가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중공중앙은 시위 진압 방법을 두고 양분되었다. 자오쯔양은 학생들의 정치개혁 요구를 수용하자 했고, 리펑은 개혁 이전에 사회 안정이 급선무라며 맞섰다.

사복으로 광장에 온 군인들, 인민대회당 지하실서 군복 갈아입고 진압 작전

급기야 5월 4일, 10만의 학생들이 70년 전 5.4운동을 기리며 톈안먼 광장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표현의 자유와 민주를 부르짖었고, 이에 호응한 자오쯔양은 학생들의 애국심에 지지를 표명했다. 자오쯔양의 그런 행동은 중공중앙의 보수파를 격분케 했다. 5월 5일 금요일부터 일주일간 광장에 모였던 많은 학생들은 일단 학교로 돌아갔지만, 캠퍼스는 지도부가 없는 중구난방의 상황이었다. 학생 중 일부는 더 큰 시위가 필요하다며 단식투쟁을 계획했다.

한편 중공중앙은 5월 18일로 예정된 소련 당서기 고르바초프 방중을 앞두고 바싹 긴장했다. 덩샤오핑은 고르바초프가 도착하기 전까지 광장을 싹 비워야 함을 강조했다. 군사 진압의 기미를 감지한 자오쯔양은 학생들에게 시위를 취소하라고 설득했으나 학생들의 저항은 완강했다. 5월 13일, 중공중앙은 단식투쟁하는 학생들을 철저히 무시했다. 격분한 학생들은 단식투쟁에 동참했다. 그 수가 1000여 명에 달하는 극한상황이었다.

5월 17일과 18일에는 1백만 명 이상이 광장에 모여들었다. 결국 중공중앙은 톈안먼 광장을 향해 군대를 보냈는데······. 놀랍게도 학생과 시민은 다가오는 군용 차량을 맨몸으로 막으며 굶주린 군인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형제, 아들, 조카 같은 그들을 향해 민주와 자유를 설교하기 시작했다.

절대 함구의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처음에는 돌부처처럼 트럭 짐칸에 앉은 채 눈길도 주지 않았는데, 시민과 학생들이 계속 말을 붙이고 음식을 주자 점점 마음을 풀고 담소까지 나누는 상황이 벌어졌다. 군부에서도 반발 조짐이 일자 중공중앙은 군대에 즉각 퇴각을 명령했다. 문화혁명 때처럼 군과 민이 결합하는 위험 상황이 표출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복귀한 군인들은 재투입될 때까지 2주에 걸쳐 혹독한 이념 교육을 거쳐야 했다.

5월 30일에는 톈안먼 광장의 한복판에 석고를 빚어서 만든 대형의 “자유 신상”이 세워졌다. 바로 그 순간이 학생과 시민이 세운 “광장의 공화국” 그 짧은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아니, 어찌 보면 지난 100여 년 중국의 현대사에서 인민이 광장의 주인이 된 그 순간보다 더 자유로운 민주의 모멘트는 없었으리라.

급기야 6월 2일, 탱크와 무장 병력을 앞세운 인민해방군은 베이징을 향해 돌격했다. 시민과 학생에 휩싸여 퇴각할 수밖에 없었던 2주 전의 수모를 재현하지 않기 위해 이번에는 군인들에게 사복을 입힌 후 대중교통을 타거나 걸어서 개별적으로 광장에 잠입하게 하는 작전을 펼쳤다. 군부는 내부를 개조한 시내버스에 다량의 무기를 꽉 채워 싣고서 몰래 광장 주변으로 진입했다. 사복을 입고 톈안먼 광장에 들어간 군인들은 한 명씩 서둘러 광장 서쪽 인민대회당의 지하실에 결집했다. 그들은 건물 안에서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당시 17세 어린 병사로서 톈안문 광장의 현장에 있었던 천광(陳光, 1971- )의 증언에 따르면, 6월 3일 자정 즈음 군인 개개인에게 40-50발의 실탄이 지급되었다. 광장에 나가면 언제든 발포해도 좋다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날 대기 중인 군인들은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실내에서 오발탄을 쏘기도 했다. (이후 천광은 그 당시 톈안먼의 경험을 화폭에 담아서 중국공산당에 항의하는 반체제 예술가가 되었다. 천광의 이야기는 앞으로 차차 소개할 예정이다).

6월 3일 밤 10시를 전후해서 베이징 거리에선 산발적인 총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날 밤 베이징의 곳곳에서 총상을 맞고 쓰러진 시민들이 들것에 실린 채로 응급실로 옮겨졌다. 병원마다 치명상을 입은 시민들의 시신이 쌓이고 있었다. 마침내 6월 4일, 이른 새벽, 군대는 톈안먼 광장을 모조리 싹 치우는 청장(淸場) 작전을 감행했다. 군대와의 담판 끝에 광장의 시위대는 철수를 결정했기에 다행히 광장에선 대량 학살이 없었다.

수배자 팡리즈와 리슈셴의 망명...베이징 미 대사관에 신변 보호 요청

1989년 6월 5일, 수배자 명단 맨 위에 오른 팡리즈 부부는 베이징 미국 대사관을 찾아가서 신변 보호를 요청하며 며칠 만 묵자고 했다. 미 대사관의 최고위 외교관들이 3시간 동안 팡리즈 부부와 대화를 나누면서 우회적으로 난감함을 표현했다. 결국 팡리즈 부부는 그날 밤 호텔에서 머물렀는데, 다음 날 아침 미국 대사관 직원이 그 호텔로 찾아가서 부시 대통령의 손님으로 미국 대사관저에 머물러도 좋다고 통보했다.

미국 대사관 측은 만에 하나 팡리즈 부부에게 비상사태가 터진다면 미국도 인권 유린을 방조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며 백악관을 설득했다. 부시 대통령은 1989년 6월 20일 대학살을 규탄하며 미·중 정부 사이의 교류를 금지했다. 그러나 다음 달 부시 대통령은 극비리에 사절단을 베이징으로 보냈다. 백악관이 엠바고가 걸려서 5개월 후에야 이 사실은 미국 언론에 공개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민주주의의 정치인들이란 그저 자신들의 인기 관리에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이후 미국에 망명한 직후 애리조나 대학의 교수로 부임한 천체물리학자 팡리즈는 역시 물리학자인 부인과 공동 집필한 천체물리학 서적 <<우주의 창조>>를 싱가포르에서 출판했다. 그는 물리학자로 남길 원했지만, 과학적 진실도 탐구할 수 없게 하는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에 대해선 과감하게 저항했다. 197-80년대 팡리즈는 물리학 논문 집필을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필요할 때면 정치 시론을 써서 대중을 일깨웠다. 그의 시론 속에는 주옥같은 명언이 수북하다.

“사회주의를 사랑하지 말고 의심해야 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내버려야 할 낡은 옷이다!”

“자유, 평등, 박애, 민주, 인권 등 그 좋은 모든 말이 부르주아적이라고? 그럼 우리에겐 무엇이 남나?”

오늘도 한국 일각에선 내재적 접근 운운하며 중국공산당 일당독재를 미화하는 시대착오적 집단이 준동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의 심장을 향해 팡리즈가 울부짖는다. “바보들아, 중국 인민도 자유, 인권, 민주를 원한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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