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환→법적으론男' 풍자 "단칸방에서 홀로 母임종지켜"..오은영 "애썼다" 오열 [종합]

김수형 2022. 7. 2.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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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EN=김수형 기자]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에서 풍자가 출연해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동생들을 케어해야했던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이젠 아픔을 털고 씩씩하게 나아가기를 많은 이들이 응원했다.

1일 방송된 채널 A 예능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에서 트랜스젠더 유튜버인 방송인 풍자가 출연해 지금껏 방송에서 하지 못했던 고민을 전했다.

이날 풍자가 워커홀릭 고민을  전한 가운데, 오은영은 가족에게 성 정체성에 대한 커밍아웃을 어떻게 했는지 물었다. 풍자는 “커밍아웃을 세 번 했다”며 첫번째는 아웃팅처럼 본의아니게 주변인을 통해 알게 됐다고. 풍자는 “당시 아버지가 웃으면서 넘어가셔, 그저 반항으로 보셨다”며 “두번 째 때는 아버지가 펑펑 우셨다”고 했다.

풍자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 어머니 부재로 어머니 역할을 하다보니 아버지는 저의 성 정체성을 병으로 인식하셨다”며 “나중에 세 번째로 얘기했을 땐 심각성을 인지하셨다, 아버지랑 칼을 두고 대치를 했다”고 말해 모두를 충격받게 했다.

풍자는 “성전환 수술 후 아버지를 찾아갔고, 아버지는 나를 죽어도 이해 못하겠다고 했다”며 커밍아웃을 완강히 부정했다며 “얘기도 중, 계속 너의 뜻(여자로 살겠다는)을 굽히지 않을 거라면 이 칼로 나를 찌르고 가라고 말씀 하셨다”며 6시간 이상 긴 시간동안 아버지와 칼을 앞에 두고 대화를 했다고 했다.

풍자는 “아빠가 원한다면 평생 남자를 연기하며 살 수 있다, 아버지를 위해 아들로 살 순 있지만 그건 아빠를 위한 삶, 내 인생은 누가 살아주냐며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도 결국 여자의 풍자를 받아들이지 못 하셨다”며 아버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집을 도망 나왔다고 했다. 풍자는 “그때가 19~20살 때, 그 후로 10년간 연락이 끊겼다”며 어렵게 가족 얘기를 꺼냈다.

풍자는 “사실 주민번호는 아직 바꾸지 못해, 법적으론 남성으로 올라가 있다 또 한 번 아버지와 갈등이 생길까 두렵더라”고 말했다. 다행히 현재는 아버지와 재회했다는 풍자. 그는 “어느 날 뜬금없이 전화해 아버지가 통화 내내 우셨다 된장찌개에 밥 해줄테니 집으로 오라는 한 마디 하셨다”며 “그 이후로 온 가족이 10년 만에 만났는데 서로 가족을 못 알아봤다, 아버지도 안 본 사이 부쩍 나이가 드셨더라,  막내도 성인이 되어 있었다”고 떠올렸다. 풍자는 “당시 어색했지만 지금은 잘 지내고 있다”고 덧붙였다.

오은영은 조심스럽게 아버지에게 딸로 받아들이고 싶은지 물었다. 풍자는 “처음 커밍아웃이, 큰 아들아닌 큰 딸이었는데 아버지가 술 마시며 ‘우리 아들’이라고 말하셔, 펑펑 우셨다”며 “우리 큰 아들이 죽은 것 같다고, 없어진 것 같다고 했다”고 떠올렸다. 풍자는 “나의 자식인 건 변치 않지만 나의 아들이 죽은 것 같아 못 받아들이겠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오은영은 “본인의 삶을 본인이 결정할 수 있으나 아버지는 딸로 받아들이긴 쉽지 않을 일”이라며 부모의 사랑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했다. 딸로 아버지가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행동을 통해 아버지가 자식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전했다.

이어 집안에서 엄마 역할을 했다는 풍자의 이야기를 물었다. 풍자는 “막내가 3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 할머니가 삼 남매를 돌봐주셨는데 1년 만에 돌아가셨다”며 하필 아버지가 지방으로 일을 다닌 탓에 어린 삼 남매끼리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풍자는 “애들 씻기고 학교보내고 포대기 싸서 애들 업고 다녔다”며 가장이자 엄마로 살아야했던 10대를 떠올렸다.

심지어 아버지는 일 때문에 6개월~1년에 한 번씩 집에 올 수 있을 정도라고. 생활비도 한 달에 3만원을 받아 썼다고 했다.풍자는 “기름 보일러를 쓰던 때, 당시 기름값을 낼 수 없어 애들을 안고 잤다”며 “동생들 알림장 가져오면 이웃집 가서 준비물 도움을 요청했다”고 말해 먹먹하게 했다. 식사에 대해 묻자 풍자는 “식사를 못해 막내는 영양실조가 왔다, 의식주가 전혀 해결되지 않던 상황”이라며 “동네 어른들이 식사를 제공해줘도 곰팡이가 있거나 상한 음식을 준 사람도 있었다”고 해 충격을 안겼다.

풍자는 “부모없는 아이라고 놀림받은 동생들 얘기 들으면 무너졌다, 난 다 괜찮은데 왜 내 동생들이 이런 소리 들어야하지? 매일 저만 가난하게 해주세요 기도했다”며 “동생들은 가난하지 않게 해달라는 생각을 매일 했다”고 말해 모두의 눈시울을 붉혔다.

어린 탓에 할 수 있던 일이 제한됐던 상황. 보호가 필요할 나이에 동생들을 보호해야했던 풍자였다. 오은영은 “부모의 마음, ‘마더링’이란 역할을 했다”며 “굉장히 마음이 아프다, 누구를 원망하기도 삶의 끈을 놓을 수 없었을 것”이라며 가슴 아파했다. 풍자는 “그때 감정은 설명이 안 된다 , 어떻게 살았지? 싶다”며 “가출해서 모든 걸 다 내려놓으려 하다가도 내가 없으면 동생들에게 방어막이 없을 것 같아 버텼다”고 했다.

풍자는 “어느 날 남동생이, ‘네가 어른이란 이유로 혼자 참고 있는건 아닌지 걱정된다’고, ‘너는 내 엄마고 아빠’라는 글을 써줬다”며 처음 받아본 동생의 진심어린 편지에 눈물, 풍자는 “내가 동생들을 헛되이 키운게 아니었구나 느꼈다, 어릴 때 힘든 것이 남동생의 편지 하나로 다 끝났다”며 눈물을 훔쳤다.

일을 안하면 왜 불안한지 이해하기 시작한 오은영은 “어린 나이에 경험한 가난, 동생들에게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열심히 일했을 것 같다”고 했다. 풍자는 “너무 기본적인게 안 되던 상황, 어린 동생들이 힘든 삶을 겪은 것이 속상한 마음. 저는 다시 옛날이 찾아와도 두 번 겪을 수 있는 힘이 있는데 동생들은 안 겪었으면 하는 바람, 동생들이 앞으로 편하게만 지냈으면 좋겠다”며 자신이 고생하더라도 동생들은 고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전했다. 풍자는 “일을 안 하면 불안하다, 다시 (가난했던) 옛날로 돌아갈 것 같다”고 덧붙였다.

오은영은 “풍자는 타인을 잘 돌보지만 ‘나’ 자신을 잘 못 돌보고 있다”며 나의 삶보다 타인의 삶을 더욱 중요시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하느라 집에 자주 못 온 아버지에게 서운한 마음은 없었는지 물었다. 풍자는 “없었다”며 “잘 못 입고 못 먹는 삼남매보면 아버지도 속상했을 것”이라며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없다고 했다.

이에 오은영은 “그건 아버지와 자식의 위치가 바뀐 말, 부모에게 받는 사랑과 보호, 위로 등이 있어야하는데 못 받으면 구멍이 생긴다”며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인정하고 직면해야 자신도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 했다. 상처를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회복과 성장할 수 있는 내면의 성숙이 있을 거라는 것.

오은영은 “때로는 서운함과 원망들의 감정도 생기지만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직면하지 못하고 있다, 원망의 마음을 부정하는 건 반동형성이라고 한다”며 아픈 과거를 직면하지 못하면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서운함이 드러날까 두려워 깊은 진짜 속마음을 살펴보지 못한 것이라 말했다. 풍자는 “생각해보니 한 번도 그런 얘길 해본 적이 없다”며 한 번도 힘든 것을 표출해본 적 이벗다고 했다. 힘든게 당연했던 어린 시절의 풍자였다.

풍자에게 어려운 얘기를 물었다.어머니는 어떻게 돌아가시게 된건지 묻자 풍자는 “집이 사기를 당해, 충격으로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셔서 돌아가셨다”고 말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풍자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더이상 해드릴 게 없다고 하더라.  병원에서도 손 쓸 수 없어 집에서 그냥 가족과 시간을 보내라고 했었다. 당시 병원에서 피부로 옮을 수 있다고 해서 동생들은 교회 목사님께 맡겼고, 홀로 어머니를 간호를 했다"라고 회상했다.

옮는다는 말에 오은영 박사는 "혹시 제초제를 드셨냐"라고 조심스럽게 물었고 풍자는 그렇다고 했다. 이에 오은영은 안타까워하며 "제초제는 그걸 마시면 결과적으로는 폐에 문제가 생겨서 호흡 곤란으로 돌아가시게 된다. 대체로 농약 마시면 응급실에 가면 위 세척을 하는데 제초제는 워낙 독해서 토사물로 나와도 그게 다른 사람에게 흡수가 된다"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어머니의 사고를 홀로 감당했다는 풍자.  그는 “제가 임종까지 다 봤다, 방 한칸에 문을 걸어 잠그고 엄마랑 둘이 있었다”며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일주일간을 잘 수 없었다고 했다. 풍자는 “혹시 내가 자는 사이 어떻게 되실까봐 자본 적이 없다”며 “제가 잠을 잤을 때 어머니가 농약을 드셨던 것, 어머니 빈소에 앉았는데 내가 왜 하필 그때 잠을 잔 걸까, 내가 만약 잠들지 않았더라면 뺏을 수 있었을 텐데”라며 본인 탓이라 자책했다. 죄책감에 편하게 잠들지도 쉬지도 못했던 것.

오은영은 “그게 풍자씨 탓이 아니다”며  다시 가난으로 돌아갈 까 불안해하는 풍자에게 “가엾어라..”라며 결국 눈물을 훔쳤다. 풍자는 “모든 행동이 다 죄 스럽게만 느껴졌다”며 평생을 죄책감과 불안함 속에 삶을 전했다. 특히 풍자는 “어머니 돌아가신 후 산소에 한 번도 가지 못 했다, 돌아가시고 나서 지금 제 모습을 못 보셨기 때문, 더 못 가겠더라”며 속마음을 꺼냈다.

오은영은 “마음의 준비가 되면 어머니 산소 뵈러 가셔라, 어떤 모습이든 자식으로 반갑고 보고싶어하실 것”이라 위로했다. 풍자는 “한 번도 엄마가 보고싶고 그립단 생각 안 했는데 얘기하니, 보고싶긴 하다”며 눈물을 훔쳤다.

오은영은 “내면이 단단해져서 아픔을 마주할 날이 올 것, 오늘이 작은 시작”이라며  “풍자야, 이제 나를 좀 품자”라며 조심스럽게 운을 뎄다. 이어 오은영은 풍자의 본명인 “보미야”라고 부르며 “지금까지 꿋꿋하게 잘 살았어, 주변에서 뭐라고 말하든어떤 시선으로 대하든, 열심히 살아가는 것 자체로 귀하고 소중해, 건강을 돌보고 자신을 너무 아프게 하지마라”며 “건강해야 주변에 소중한 사람도 잘 돌볼 것”이라 위로했다.

풍자는 “너무 마음 고생이 많았다 보미야, 애썼어”라며 어린 풍자에게 전하는 위로를 전했고,풍자는 결국 “너무 힘들다, 죄송해요”라고 말하며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터뜨렸다.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 울음에 모두 같은 마음으로 눈물을 훔쳤다. 풍자는 “ 엄마가 살아계시면 나한테 이런 말을 해줬겠구나 싶었다”며 눈물의 이유를 전해 모두를 먹먹하게 했다.

풍자는 마지막으로 “명성 그대로인 오은영 박사님, 이렇게까지 제 얘기 풀어본 적 없다”며 “출연 전 고민의 해답을 찾으려했는데 과정과 답이 아니었다, 그 답은 내가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내가 애써 외면했던 나를 만난 느낌”이라며 소감을 전했다. 다소 어려운 얘기를 진솔하게 해준 풍자, 이젠 아픈 것은 잊고 꽃길만 걷길 모두가 응원했다. 

/ssu08185@osen.co.kr

[사진]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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