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법정]⑤'삼종지도' 호주제 폐지…평등한 가족관계로 한걸음

정혜민 기자 2022. 7. 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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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헌법제판소 호주제 '헌법불합치' 결정
'남성 우선' 호주승계 폐지…어머니 성도 따를 수 있게 돼

[편집자주] 판결은 시대정신이다.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가치와 때론 나아 가야할 방향을 담고 있어서다. 우리 사회는 짧은 기간 압축적으로 성장하면서 여러 차례 격변기를 거쳤다. 이 때문에 1년 전에는 옳다고 믿었던 시대정신이 오늘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과거와 정반대의 판결이 많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건의 판례를 통해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짚어봤다.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전경. 2017.3.10/뉴스1 ⓒ News1 사진공동취재단

(서울=뉴스1) 정혜민 기자 = #. 사고로 남편을 잃고 보니 6살 아들이 호주가 된다고 합니다. 납득할 수 없어 동사무소 직원에게 문의했더니 아들의 포기각서를 받아오라고 합니다. 막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아들의 각서를 가지고 갔더니 인지능력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효력이 없다고 합니다. 6살 아들이 36살 엄마의 호주가 되는 것은 무슨 법인가요.(2002년 국회여성위원회 연구보고서 내 피해사례) 유학에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덕목이 나온다. 여자는 어려서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뒤에는 자식을 따라야 한다는 도리다.

과거 우리나라 호주제에는 삼종지도의 원리가 담겨 있었다. '한 집안의 주인'이 되는 호주의 승계 순위는 사망 전 호주의 아들 또는 손자→미혼의 딸→아내→어머니→며느리 순이었다.

어머니와 할머니보다 아들과 손자가 호주 승계 순위에서 더 우선되기 때문에 어린 손자를 돌보는 칠순 할머니도 손주를 호주로 삼아야했다. 연장자를 우선하는 우리의 관념과도 맞지 않다.

호주제 아래에서 여성은 아버지, 남편, 자식에게 예속되는 신세였다. 하지만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불합리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됐다.

◇호주제 '일제 잔재' vs '민족 전통'…여성계-유림 대립

'호주제'란 '호주'를 중심으로 가족구성원의 출생, 혼인, 사망 등의 신분변동을 기록하는 제도였다. 우리나라에 호주제가 도입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였다.

일제는 1923년부터 일본식 호적제도(이에제도)를 시행했는데 이때 한국에 호주제가 이식됐다. 일본은 1948년 호주제를 없앴지만 우리나라는 1958년 민법이 제정될 때 호주제를 함께 채택했다.

여성단체를 비롯한 호주제 폐지론자들은 호주제는 '일제의 잔재'라고 주장하는 반면, 유림 등 호주제 수호론자들은 '민족의 전통'이라며 맞섰다.

또 '남녀차별'을 조장한다는 의견과 '폐지 시 가족의 해체'가 우려된다는 의견이 나뉘었다.

◇헌재 "호주제, 남녀 차별로 많은 가족들에 고통 초래"

호주제로 가장 고통을 받았던 사람은 이혼·재혼·한부모·입양 가정의 구성원들이었다.

이혼한 여성은 아이를 자신의 '가에' 입적시킬 수 없어 함께 살고 있더라도 법률적 가족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동거인' 관계에 불과했다. 아이는 계속 아버지의 '가'에 소속될 뿐이다.

재혼가정의 자녀는 어머니의 성은커녕 새 아버지의 성도 따를 수 없었다. 성이 달라 '비정상적 가족'으로 취급하는 외부의 시선에 고통받아야 했다.

민법 제정 당시부터 여성계에서는 호주제 폐지를 주장해왔다. 2000년부터 본격적인 호주제 폐지 운동이 전개되면서 호주제 폐지를 찬성하는 여론은 압도적으로 높아졌다.

2001년 이혼 여성 양모씨는 자녀를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키려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서울지법 서부지원(현 서울서부지법)에 위헌제청 신청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

2005년 2월3일 헌법재판소는 호주제에 대해 6대3의 다수의견(위헌 의견: 윤영철·김경일·송인준·주선회·전효숙·이상경)으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며 오랜 논란의 마침표를 찍었다.

헌법불합치란 해당 법률의 위헌성을 인정하면서도 법적 공백을 막기 위해 법을 개정할 때까지 해당 조항의 효력을 유지하거나 중지시키는 결정이다.

심판 대상이 된 조항은 △민법 778조 '일가의 계통을 계승한 자, 분가한 자 또는 기타 사유로 인하여 일가를 창립하거나 부흥한 자는 호주가 된다'(6대 3로 위헌) △781조 1항 '자는 부가에 입적한다'(8대 1로 위헌) △826조 3항은 '처는 부의 가에 입적한다'(7대 2로 위헌)였다.

당시 헌재는 결정문에서 "호주제가 혼인과 가정생활에서 개인의 존엄과 양성평등을 규정한 헌법 제36조 제1항에 위반된다"고 밝혔다.

이어 "호주제는 성역할에 관한 고정관념에 기초, 호주승계 순위, 혼인, 자녀 등의 신분관계 형성에 있어 정당한 이유 없이 남녀를 차별함으로써 많은 가족들이 불편과 고통을 겪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3명의 합헌 의견 재판관(김영일·권성·김효종)은 "호주제는 전통문화에 터 잡은 것인 만큼 합헌"이라는 소수 의견을 냈다.

ⓒ News1 최수아 디자이너

◇호적 사라지고 '가족관계등록부'…어머니 성도 따를 수 있어

2002년 호주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운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호주제 폐지를 위한 입법적 노력도 병행됐다. 2005년 3월2일 국회에서는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 개정안도 통과됐다.

민법 개정안의 시행으로 호적이 폐지되고 '가족관계등록부'가 이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아들, 손자 순으로 이어지던 호주승계도 사라졌다.

여전히 자녀는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게 원칙이지만 부부가 혼인신고시 합의할 경우 태어날 자녀가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 있게 됐고, 재혼·이혼가정의 자녀는 법원의 허가를 받아 성을 바꾸는 것이 가능해졌다.

◇'평등한 가족관계'로 한 걸음 더…'부성우선·혼외자 차별' 폐지 움직임

"너, 호적에서 파버릴 거야!" 마음에 들지 않는 결혼 상대를 데리고 온 자식에게 머리를 싸맨 부모가 호통을 친다. TV 드라마에서 아직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호주제 폐지로 '호적을 파는' 분가는 사라졌지만 관습처럼 이런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호주제가 우리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으로는 '평등한 가족관계'에 한 발짝 더 다가서기 위해 호주제 폐지에서 더 나아간 논의들도 이뤄지고 있다.

'자녀가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민법 제781조(부성우선주의) 폐지 움직임이 대표적이다.

또 양친과 자녀를 기본으로 하는 '정상 가족' 관념을 혁파하고 혼인중·혼인외 출생자 간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 관련 민법 용어를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hemingway@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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