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홀릭' 풍자 "무통주사無성전환→母, 사기 당해 스스로 목숨 끊었다" 충격 [어저께TV]

김수형 2022. 7. 2.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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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EN=김수형 기자]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에섯 풍자가 무통주사없이 성전환 수술을 했다는 일화부터, 어머니가 사기를 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안타까운 가정사를 전해 먹먹하게 했다.

1일 방송된 채널 A 예능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에서 트랜스젠더 유튜버인 방송인 풍자가 출연, 풍자 본명이 윤보미라며, 풍자에 대해선 “‘별풍선을 많이 받자’로 해서 풍자가 됐다”고 소개했다.

유튜브에서 풍자의 조언으로 힐링받는 구독자들이 많다고 언급, 고민 해결전문인 풍자가 ‘금족 상담소’를 찾은 이유를 물었다.풍자는 “우선은 저를 ‘미친 애’라고 표현하고 싶다”며 의미심장하게 운을 뗐다. 쉬는날 없이 일만 한다는 것.  풍자는 “1년 전 인공관절 수술을 받았다”며 46시간 동안 물도 금식 했음에도 마취가 깨자마자 바로 방송을 했을 정도였다고 했다. 이렇게까지 쉬지 않고 일을 하는 이유를 묻자 풍자는 “조바심이 나, 심장이 빨리 뛰고 답답해진다, 한 시간이라도 쉬면 불안해진다”며 고민을 전했다.

특히 워커홀릭 진단 테스트를 하자, 풍자는 7개 모두 해당된다고 했고 모두 충격을 받았다. 밥 먹으면서 일처리하거나, 자기 전에도 일 생각을 한다고. 일 때문에 병원이나 휴가를 미룰 정도라고 했다.

오은영은 “자기 자신이 편안해지는 꼴을 스스로 못 견디는 것, 자기 몸을 혹사시키고 있다”며 본인을 갉아먹고 있다고 했다. 견디기 힘든 통증까지 잊어버릴 정도라고. 풍자는 “촬영 중 넘어졌는데 통증을 느꼈지만 계속 진행해, 나중에 뼈 쪽이 부어있었는데 그걸 못 느꼈다”고 공감했다.

특히 풍자는 “무통주사를 두 번 맞아, 성전환과 인공관절 수술할 때인데 제가 직접 무통주사를 뺐다, 몽롱한 기분을 느끼기 싫었기 때문”이라며 “수술 후 휴대폰을 손에 쥐고 업무를 계속 했다, 내시경 검사도 비수면으로 했다”고 떠올렸다.

오은영은 “본인의 행복을 위해 하는 과정이 자기 파괴적 행동 , 정신 똑바로 차리는게 편해 보인다”고 하자, 풍자는“맞다, 아파도 맨정신에 아파야하는 것이 있어, 성형 수술도 수면마취 해야한다고 해도 부분 마취로 진행한 적 있다”며“난 맨 정신으로 확인해야한다, 내 정신 아닐 때 불안하다”고 답했다. 통제력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모습이라고.

오은영은 가족에게 성 정체성에 대한 커밍아웃을 어떻게 했는지 물었다. 풍자는 “커밍아웃을 세 번 했다”며 첫번째는 아웃팅처럼 본의아니게 주변인을 통해 알게 됐다고. 풍자는 “당시 아버지가 웃으면서 넘어가셔, 그저 반항으로 보셨다”며 “두번 째 때는 아버지가 펑펑 우셨다”고 했다.

풍자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 어머니 부재로 어머니 역할을 하다보니 아버지는 저의 성 정체성을 병으로 인식하셨다”며 “나중에 세 번째로 얘기했을 땐 심각성을 인지하셨다, 아버지랑 칼을 두고 대치를 했다”고 말해 모두를 충격받게 했다. 풍자는 “그때가 19~20살 때, 그 후로 10년간 연락이 끊겼다”며 어렵게 가족 얘기를 꺼냈다.

풍자는 “사실 주민번호는 아직 바꾸지 못해, 법적으론 남성으로 올라가 있다 또 한 번 아버지와 갈등이 생길까 두렵더라”고 말했다. 다행히 현재는 아버지와 재회했다는 풍자. 그는 “어느 날 뜬금없이 전화해 아버지가 통화 내내 우셨다된장찌개에 밥 해줄테니 집으로 오라는 한 마디 하셨다”며 “그 이후로 온 가족이 10년 만에 만났는데 서로 가족을 못 알아봤다,아버지도 안 본 사이 부쩍 나이가 드셨더라,  막내도 성인이 되어 있었다”고 떠올렸다. 풍자는 “당시 어색했지만 지금은 잘 지내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어 집안에서 엄마 역할을 했다는 풍자의 이야기를 물었다. 풍자는 “막내가 3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 할머니가 삼 남매를 돌봐주셨는데 1년 만에 돌아가셨다”며 하필 아버지가 지방으로 일을 다닌 탓에 어린 삼 남매끼리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어린 탓에 할 수 있던 일이 제한됐던 상황. 보호가 필요할 나이에 동생들을 보호해야했던 풍자였다.

풍자에게 어려운 얘기를 물었다.어머니는 어떻게 돌아가시게 된건지 묻자 풍자는 “집이 사기를 당해, 충격으로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셔서 돌아가셨다”고 말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풍자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더이상 해드릴 게 없다고 하더라.  병원에서도 손 쓸 수 없어 집에서 그냥 가족과 시간을 보내라고 했었다. 당시 병원에서 피부로 옮을 수 있다고 해서 동생들은 교회 목사님께 맡겼고, 홀로 어머니를 간호를 했다"라고 회상했다.

그렇게 어머니의 사고를 홀로 감당했다는 풍자.  그는 “제가 임종까지 다 봤다, 방 한칸에 문을 걸어 잠그고 엄마랑 둘이 있었다”며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일주일간을 잘 수 없었다고 했다. 풍자는 “혹시 내가 자는 사이 어떻게 되실까봐 자본 적이 없다”며 “제가 잠을 잤을 때 어머니가 농약을 드셨던 것, 어머니 빈소에 앉았는데 내가 왜 하필 그때 잠을 잔 걸까,내가 만약 잠들지 않았더라면 뺏을 수 있었을 텐데”라며 본인 탓이라 자책했다.

특히 풍자는 “어머니 돌아가신 후 산소에 한 번도 가지 못 했다, 돌아가시고 나서 지금 제 모습을 못 보셨기 때문, 더 못 가겠더라”며 속마음을 꺼냈다.풍자는 “한 번도 엄마가 보고싶고 그립단 생각 안 했는데 얘기하니, 보고싶긴 하다”며 눈물을 훔쳤다.

오은영은 “내면이 단단해져서 아픔을 마주할 날이 올 것, 오늘이 작은 시작”이라며  “풍자야, 이제 나를 좀 품자”라며 조심스럽게 운을 뎄다. 이어 오은영은 풍자의 본명인 “보미야”라고 부르며 “지금까지 꿋꿋하게 잘 살았어, 주변에서 뭐라고 말하든어떤 시선으로 대하든, 열심히 살아가는 것 자체로 귀하고 소중해, 건강을 돌보고 자신을 너무 아프게 하지마라”며 “건강해야 주변에 소중한 사람도 잘 돌볼 것”이라 위로했다.

/ssu08185@osen.co.kr

[사진]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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