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한 현대무용, 힙합을 더 자유롭게 하리

유주현 2022. 7. 2.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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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국립현대무용단 ‘HIP合’
국립현대무용단 트리플빌 ‘HIP合’(7월 6~10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연습 모습. 지경민의 ‘파도’. [사진 국립현대무용단]
바야흐로 댄스의 시대다. ‘스트릿우먼파이터’로 시작해 ‘쇼다운’ ‘플라이 투 더 댄스’ ‘뚝딱이의 역습’ 등 각종 춤 예능이 방송을 도배하고, K팝 댄스와 스트리트댄스가 글로벌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근본없는 춤이라고 무시당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 대학에서도 실용무용의 파워가 커졌다. 방송에 비친 스트리트댄서들의 퍼포먼스를 보고 있자면 그 예술성에 놀라곤 한다. 현대무용과 스트리트댄스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는 것이다.

국립현대무용단이 스트리트 장르를 과감하게 끌어안는 트리플빌 ‘HIP合’을 기획한 것도 그런 흐름이다. 지난해 대중적 인지도가 높았던 현대무용가 김설진과 김보람, 이경은의 첫 무대가 국악에 기반한 전통에서 ‘힙’을 발견하려는 시도였다면, 올해는 힙합 자체를 파고들었다. 움직임이든 정신이든, ‘힙합’을 모티브 삼은 세 작품을 선보인다.

국립현대무용단 트리플빌 ‘HIP合’(7월 6~10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연습 모습. 정철인의 ‘비보호’. [사진 국립현대무용단]
이재영(40), 지경민(38), 정철인(35)은 요즘 현대무용판을 바꾸고 있는 80년대생 안무가들이다. 모두 무용을 전공하기 전 스트리트로 춤을 시작했기에 그 감성이 몸에 배어있다. 현대무용가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내재된 스트리트 DNA를 감추려 애써야 했다면, 이번에 모처럼 제대로 멍석이 깔렸다.

“힙합의 테크닉을 쓸 줄 알아도 노골적으로 쓰면 안되는 무언의 압박이 있거든요. 은근히 금기시 되는 분위기에서 잘 돌려서 연출해야 하는 게 참 어려워요. 이번엔 ‘힙합’이라는 타이틀이 좀 노골적으로 해도 된다는 판을 깔아준 것 같아, 압박에서 좀 벗어나 보려 합니다.”(지경민)

국립현대무용단 트리플빌 ‘HIP合’(7월 6~10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연습 모습. 이재영의 ‘메커니즘’. [사진 국립현대무용단]
흔히 힙합의 정신은 자유와 해방이라지만, 적어도 이들이 경험한 힙합은 폭력적이었다. 그 시절엔 같이 춤추는 형들에게 얻어맞기 일쑤였다고. 하긴, 미국 빈민가에서 이민자들간 패권 다툼으로 시작된 스트리트댄스는 공격적인 ‘춤배틀’이다. 보수적인 미의 기준을 거부하고 저항의식을 표현하면서도 자유와 해방을 함께 추구하는 공동체의식에 방점이 찍힌다. 어딘지 정형화된 움직임의 이유기도 하고, 내면의 표현을 중시하는 현대무용과 다른 지점이기도 하다.
이재영
“자유는 힙합 컬처의 시작점일 뿐, 우리가 배울 땐 ‘이렇게 해야지 힙합이야’ 라는 게 있어서 오히려 힘들고 답답했어요. 제 경우 오히려 무용을 하면서 자유로워지고 표현이 많아졌죠. 힙합 댄서들의 배틀에서의 움직임은 입체적이지만, 그들이 무대 위에서 합을 맞추면 좀 평면적으로 보이거든요. 길거리 문화가 극장화되면서 그렇게 됐다면, 우리는 그런 움직임을 좀 더 입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이죠. 무용은 레벨도 많이 사용하고 동선과 공간구성도 다양하게 사용하니까, 이번 공연에서 그런 게 돋보이지 않을까 해요.”(이재영)

힙합을 대하는 세 사람의 앵글은 제각각이다. 이재영은 과거에 자신의 안무에 소스로 활용하기 위해 힙합 동작에 기반해 만들어둔 데이터베이스 자체를 무대화시킨 ‘메커니즘’을 내놓는다. 무용수들이 각을 맞추면서 하나 둘 엮이는데, 마치 작은 조각 하나로 시작하는 퍼즐 맞추기처럼 점점 큰 그림을 완성해 간다. 지경민의 ‘파도’는 힙합 춤의 움직임에서 가장 기본적인 속성인 상하 운동성으로 파도를 그려낸다. 관절을 심하게 꺾는 브레이킹의 움직임을 장착한 무용수 한 명 한 명이 거대한 파도의 물방울이 되어 출렁인다.

지경민
정철인의 ‘비보호’는 ‘비보이’가 연상되는 제목처럼 가장 화끈하다. 비보이가 춤으로 싸운다면, ‘비보호’는 싸움을 무용화한달까. 평소 피지컬이 돋보이는 파워풀한 움직임으로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의식을 풀어내는 안무가답게, 비보이들의 과격한 동작을 공연예술의 언어로 번역해 냈다. 신호등이 없는 도로나 사람과 전동 탈것들이 경계선 없이 뒤섞이는 산책로처럼, 비보호 상태에서 발생하는 아슬아슬한 부딪침이나 몸싸움 같은 해프닝을 피지컬씨어터로 펼쳐낸다. 롱보더와의 협업으로 장르의 ‘합’까지 연출하는 가장 역동적인 무대다.

“길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를 모티브로 퍼포먼스를 만들어 봤어요. 부딪침과 충돌, 싸움의 움직임들을 표현의 재료로 삼은 거죠. 무단횡단이 됐건 익스트림 스포츠가 됐건, 보호받지 못한 순간은 위험이 공존하지만 그럼에도 뛰어드는 데서 느껴지는 쾌락과 희열이 있지 않나요. 테크닉처럼 보이기도 하고 싸움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힙합의 날것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정철인)

정철인
그러고보면 현대무용가들은 늘 미지의 영역을 향해 있다. 얼마 전 서울시무용단의 ‘일무’가 역동적인 현대무용을 보수적인 질서 속으로 수렴하게 했다면, ‘힙합’은 더욱더 자유와 해방을 탐구하라고 주문했으니 말이다. 과연 현대무용가들이 생각하는 현대무용의 정체성은 뭘까.
“예술의 도구죠. ‘디너’라는 제 작품은 미술관에서도 하고 무용단에서도 했었는데 ‘그게 어떻게 무용이냐’고들 묻더군요. 제가 무용가니까 무용이죠. 현대무용은 제가 하려는 예술의 표현방법의 하나라 생각하고, 제약을 두고 싶지 않아요.”(이) “저는 제 이야기를 재밌게 만들어서 관객에게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에요. 요즘엔 주제마다 표현법들을 다르게 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겨서, 스스로 현대무용 안에 다른 장르도 넣으면서 갈증을 해소하죠. 이것저것 다 할 수 있는 게 현대무용의 장점이니까요.”(정) “저는 맛집을 알게 되면 지인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가게 하거든요. 혼자 알기 아까워서요. 맛집 소개하는 마음으로 공연도 만들어요. 춤은 진짜 재밌는데, 그렇게 즐겁게 작업하면 공연도 즐겁죠. 관객들은 그 기운을 받아가는 게 중요해요. 좋은 기운을 발산하는 에너지가 바로 현대무용 아닐까요.”(지)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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