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찰 때처럼 미친듯 영업" 2년 만에 보험왕 된 '리틀 메시'

정영재 2022. 7. 2.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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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오디세이] 축구선수 출신 세일즈맨 김명수씨
축구 국가대표팀 주전 공격수 황희찬(26·울버햄튼)과 초등학교 시절 함께 뛴 축구 소년이 있었다. 발이 빠르고 개인기도 좋았던 이 소년의 이름은 김명수. 축구에 미쳤다고 할 만큼 열심이었다. 그런데 프로팀 입단을 앞두고 큰 부상을 당했다. 재기를 노렸지만 희귀병이 그를 덮쳤다. 울면서 축구화를 벗어야 했다. 그가 초등학교 코치로 잠시 일할 때 나는 그를 본 적이 있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2년 뒤 그가 나를 찾아왔다. 단정히 빗어넘긴 머리에 말끔한 정장 차림. 양 손목에는 고급 시계와 팔찌가 번쩍이고 있었다. 그는 축구판을 떠나 보험 영업을 시작해 2년 만에 전국 보험왕에 올랐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9월 어센틱금융그룹(AFG)에 스카우트돼 곧 부지점장이 된다. 그가 일하고 있는 인천 구월동의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했다. ‘운동만 했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듣는 느낌이었다.

거울에 비친 김명수 어센틱금융그룹 부지점장. 선수 시절 거쳐갔던 팀 유니폼 앞에 섰다. 그는 올 2분기에도 전국 지점 실적 1위를 했다. 전민규 기자
화장실서 스쿼트 할 정도로 개인훈련 몰입

Q : 본인의 역할을 소개해 주시죠.
A : “저희 어센틱금융그룹은 여러 금융회사와 제휴해 보험·예적금·대출·펀드 등 금융상품을 비교하여 컨설팅 하는 회사입니다. 저는 예비 부지점장으로서 전국 지점 교육과 팀 관리를 중점으로 합니다. 물론 제 영업도 계속 하고 있죠.”

Q : 본인의 축구 커리어는?
A : “프로축구 FC 서울의 유스 팀이었던 동북고와 오산고에서 주전으로 뛰었어요. 강원 FC로 가기로 된 고3 때 인대가 파열되는 큰 부상을 당했고, 강원 구단에서 ‘부상 완치하고 오라’며 지방 전문대로 저를 보냈어요. 자존심이 상해 뛰쳐나온 뒤 필리핀-태국 등에서 뛰며 갖은 고생을 했습니다.”

Q : 국내 팀에서 뛴 적도 있나요?
A : “2019년 FA컵에서 K3(4부리그) 소속인 화성 FC가 4강에 올라 프로 팀 수원 삼성을 1차전에서 꺾는 파란을 일으켰어요. 당시 제가 그 팀 소속이었는데 이미 희귀병이 진행 중이어서 경기는 못 뛰었죠. 강직성 척추염이라고, 뼈가 점점 굳는 병인데요. 아직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완치법이 나오지 않았고, 평생 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해요.”

Q : 이 병으로 인해 군 면제를 받았죠.
A : “태국에 있을 때부터 아팠고, 화성 FC 들어와서 더 악화됐어요. 허리 디스크 정도로 생각해 정형외과만 다녔는데 서울아산병원 정밀검사에서 정확한 병명을 알게 됐죠. 군 면제 판정을 받은 뒤 ‘2년을 벌었으니 다시 축구에 도전해보자’고 결심했지만 몸이 아픈 건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고요. 의사 선생님도 ‘과격하게 몸을 부딪치면 쉽게 골절상을 당한다’고 만류하셨죠.”

Q : 본인의 축구 스타일은?
A : “포지션은 최전방 바로 아래 공격형 미드필더였어요. 짧게 끊어가는 드리블과 전방으로 찔러주는 패스 플레이를 잘해 고교 때는 ‘동북 메시’라는 별명을 얻었어요. 왼발잡이라 측면 공격수로도 뛰었죠.”

Q : 엄청난 연습벌레라고 들었습니다.
A : “‘이렇게까지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매일을 살았던 것 같아요. 중학교 때는 부천 집에서 모래주머니를 차고 나와 서울 학교(아현중)까지 가는 지하철 구석에서 종아리 강화 운동을 했어요. 책가방에 고무 밴드, 줄넘기, 축구공, 트레이닝복을 넣고 다녔죠. 쉬는 시간 10분이 아까워서 빈 교실에 들어가 줄넘기를 하고, 심지어 화장실 안에서 스쿼트(하체 강화 운동)를 한 적도 많아요. 오죽하면 코치님들이 ‘명수야 운동 좀 그만 해라. 그건 병이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태국 리그에서 뛸 당시의 김명수 선수. [사진 김명수]
축구를 그만두고 보험 영업을 하게 된 계기를 물었다. 그는 “축구에 바친 청춘을 보상 받으려면 월 1000만원은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직장은커녕 알바도 해본 적이 없는 제가 짧은 시간에 그 돈을 벌 수 있는 건 영업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죠”라고 말했다. 2020년 5월 조기축구회에서 만난 선배의 권유로 보험 일을 시작했다.

Q : 보험 영업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A : “학교 공부도 짧고 금융에 대한 지식도 없었기에 동기들이 한두 번 들으면 이해하는 내용을 대여섯 번 들어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내가 축구 할 때 미친듯이 몰입한 것처럼 이 일에 미쳐 봤나. 그 정도 노력을 해 보고 안 되면 깨끗이 접자’고 다짐했죠. 여의도 사무실에 간이침대를 갖다놓고 일주일에 사나흘은 밤새 공부하고, 새벽에 지하 사우나에서 씻고 영업을 뛰었습니다.”

Q : 2년 만에 업계 최고가 됐는데요.
A : “저는 말수는 적고 자존심은 센 사람인데 성격부터 시작해 1부터 10까지 다 바꿨습니다. 월 1만원짜리 상품부터 시작해 정말 개미처럼 열심히 고객을 만났죠. 한 달 최고 120건까지 계약을 성사시킨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1년 만에 첫 직장에서 전국 실적 1위를 달성했어요. 한 달에 1억원 수입을 올린 적도 있습니다.”

Q : 축구를 한 게 보험 영업에 어떤 도움이 됐나요.
A : “지인의 90%가 축구 쪽인데, 늘 부상 위험에 노출되다 보니 보험의 필요성을 절감하더라고요. 제가 잘못 살지는 않았는지, 본인 가족까지 소개해 주는 경우가 많았어요. 제가 공을 좀 차다 보니 조기축구팀에서 불러주는 곳이 꽤 있었어요. 일주일에 7~8군데 조기회를 뛰면서 자연스럽게 영업도 하고 건강도 지켰죠.”
임원 목표, 축구센터 설립 희망도

Q : 1년 수입을 황희찬 선수와 비교하면?
A : “아직은 제가 훨씬 적죠. 지금은 팀원들 관리하고 교육하면서 영업도 하고 있는데요. 수입은 개인 실적에 따라 달라지는데 월 2000만~4000만원 정도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단순히 돈만 버는 게 아니라 금융 지식이나 사업 마인드를 배우고 있어요. 돈을 버는 것보다 어떻게 불리고 쓸 줄 아느냐가 더 중요하잖아요. 희찬이가 은퇴하고 나면? 그 뒤엔 역전될 지도 모르죠. 하하.”

Q : 운동으로 성공한 사람은 극소수고, 중간에 그만두거나 탈락한 사람들이 많은데요.
A : “15년 동안 목숨을 바쳤던 축구를 그만뒀을 때 너무 막막했는데 세상에 나오니까 의외로 할 수 있는 게 많더라고요. 운동선수들은 운동밖에 할 줄 모른다고 하는데 틀린 말도 아니죠. 그런데 한 가지 일을 10년 이상 죽을 만큼 해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것도 저희 같은 20대에요. 그 속에서 얻는 게 굉장히 많습니다. 소위 정신력이라고 하는 멘탈이 강해지고요. 끈기와 성실함, 체력은 일하는 데 큰 무기가 됩니다. 운동했을 때만큼 꾸준히 성실하게 하면 어떤 일이든 잘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Q : 앞으로 해 보고 싶은 일은?
A : “이 회사에서 큰 비전을 갖고 지점장-본부장-임원까지 목표를 잡고 있어요. 한편으로는 이곳에서 배운 금융 지식과 사업가 마인드를 활용해 다양한 분야에 파이프라인을 만들고 싶습니다.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건 멋진 축구센터를 짓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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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때 황희찬에게 달리기 진 뒤 축구의 길

초등 3학년 때 김명수(오른쪽)와 황희찬.
소년 김명수를 축구라는 운명의 길로 이끈 건 황희찬이었다. 부천 까치울초등학교 축구부가 명수네 학교로 시합을 하러 왔다. 운동장에서 동네축구를 하던 명수를 본 까치울초 코치가 “너 달리기 참 잘 하네. 우리 팀에 제일 빠른 애랑 붙어 볼래”라고 권유했다. 초등 2학년 명수와 희찬이의 첫 만남이었다. 난생 처음 또래와 달리기에서 진 명수는 씩씩대며 엄마한테 “나도 축구부 할래”라고 떼를 썼다. 둘은 4학년까지 함께 뛰며 ‘무적 까치울 신화’를 썼다.

명수가 프로 입단을 앞두고 부상에 발목이 잡혔을 때, 희찬이는 유럽으로 진출했다. 죽어라 운동을 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한 달 100만원이 없어 힘들어 할 때 희찬이는 국가대표가 되고 세계 최고 리그에서 뛰었다.

김명수 부지점장은 “희찬이는 또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기 때문에 그를 보며 부러워하거나 제 신세를 한탄한 적은 없어요. 늘 희찬이 경기를 챙겨보고 주위에 자랑도 했죠”라고 회고한 뒤 “어쩌면 희찬이가 있었기에 무너지는 자신을 다잡고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라며 웃었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UCN 대표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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