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사랑한다, 그러나 헤어져야겠다

2022. 7. 1.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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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위해 자리잡은 시골집
질척한 마당에 어설픈 황토벽
시멘트로 해결하니 지구에 미안
더 늦기 전에 시멘트와는 이별

십일 년 전 엄마를 모시러 귀향했다. 이 년이면 너끈히 가실 줄 알았다. 고혈압에 고지혈증에 움직이는 종합병원이었으니까.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건 딸, 딸이 옆에 있으니 모든 병이 다 나았다. 좋은 일이다. 엄마가 가면 나는 고아, 엄마가 하루라도 더 살아주면 감사하다. 문제는 집이었다. 잠시 머물러 가는 집이라 생각해서 도배도 장판도 하지 않고 이사했던 것이다. 이 년이면 가실 줄 알았던 어머니는 너끈히 백수를 바라보는 중이고, 주인아저씨가 지은 집은 그동안 엄마보다 더 빨리 늙어 거실 바닥의 시멘트가 다 깨졌다. 깨진 시멘트 사이로 난방 코일이 나 여기 있다고 외치는 듯 고스란히 제 존재를 드러내 술 마시다 하마터면 엉덩이를 델 뻔했다. 엄마가 언제 가실지 모르겠지만 집을 고치기로 마음먹었다.

집의 민낯을 봤다. 주인아저씨가 몸에 좋다고 자랑했던 황토벽은 습기가 차 손만 대도 다 부스러졌다. 황토벽의 절반을 들어내고 그 자리를 시멘트로 채웠다. 황토벽일 때는 못 하나 박지 못했다. 귀퉁이마다 흙이 부서져 아침저녁 청소기 밀 때마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장마철에는 그 흙에서 지렁이도 탄생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지렁이 몇 마리가 태연하게 거실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시골 생활 십 년, 지네도 때려잡는 강심장으로 환골탈태했지만 지렁이만큼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시멘트로 바르고 나니 네모 반듯하고 모서리에서 흙이 떨어지지도 않는다. 울퉁불퉁, 행여 술이라도 취하면 자빠질 것 같던 바닥은 기울어진 데 없이 평평하다. 못도 맘대로 박을 수 있다. 시멘트, 너 최고다.
정지아 소설가
귀향한 사람들에게 시골 사람들이 맨 처음 하는 말이 있다.

“세멘 발라.”

서울 살다 자연이 그리워 시골 내려온 사람들은 토박이말을 콧등으로 듣는다. 어르신들, 돌아서며 비웃는다. 흥, 어디 장마철만 지나 보라지. 장마가 지면 흙 마당은 지옥으로 변한다. 질척질척, 디딘 발을 지옥으로 끌어내린다. 그뿐인가. 장마가 그치면 잡초들이 미친 듯이 돋아난다. 소일 삼아 아침저녁으로 뽑아봐야 잡초의 생명력을 이길 수 없다. 일 년 뒤, 녹초가 된 귀향인들은 돈이 많으면 흙 마당에 마사토를 깔고, 돈이 적으면 시멘트를 바른다.

인류는 시멘트에 많은 빚을 졌다. 시멘트 덕분에 빌딩을 지을 수 있었고, 자연의 재해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었다. 인간은 편리한 삶을 위해 시멘트를 만들었고, 수백 년간 그 덕을 톡톡히 봤다. 그런데 누구나 아는 이치지만 세상에 좋기만 한 것 따윈 없다. 한때 인간에게 편리를 제공했던 시멘트가 이제는 지구의 적으로 변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대부분이 그러하다. 편리를 위해 만든 비닐, 석유, 원자력, 모든 것이 한꺼번에 지구를 위협하고 있다.

나는 채식을 좋아하지만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고기 좋아하는 손님이 젤 반갑다. 국이나 하나 끓이고 고기만 구우면 되니까. 비건 손님이 젤 괴롭다. 멸치 육수도 불가, 젓갈 들어간 김치도 불가, 무엇 하나 편히 해줄 음식이 없다. 비건 손님이 오면 이렇게까지 까다로울 필요가 있는가, 어차피 인간은 잡식성 동물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고기 먹다 지구 망하면 다 같이 죽자, 뭐 이런 개똥철학을 무기 삼아 툴툴거린다. 지구가 위기라는 걸 알고 있지만 편리함은 죽어도 포기하기 싫기 때문이다.

시멘트로 새 단장한 집에서 편리를 맘껏 누리면서 맘이 쌔하다. 이래도 되는가. 나는 편리하지만 지구는? 우리 인류가 누려온 온갖 편리가 지구에는 회복할 수 없는 독이 되어 지금 비건을 선언해봤자 회복 불가능의 상태일지도 모른다. 편리를 지상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더 늦기 전에 노력해보겠다. 자신할 순 없지만 불편을 감수해보겠다. 시멘트야. 고마웠다. 그러나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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