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시지는 않지만 우아하다..깊이와 품격을 돋을새김한 선구자[클래식 오디세이 - 음악의 역사를 항해하다]
올리버 크롬웰의 시대
“요컨대 바로크 음악은 이탈리아 음악이거나 프랑스 음악이었다.” 이 말은 당대 음악의 거장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1929~2016)의 입에서 나왔다. 두 나라가 바로크 음악에서 그만큼 절대적 위치를 차지했다는 뜻이다. 바로크 음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이탈리아, 또 루이 14세 시대에 국가의 주도로 예술이 융성했던 프랑스가 양대 산맥을 이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오늘날 우리가 즐겨 듣는 음악은 대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작품들인 까닭이다. 당시 그곳의 음악가들은 대체 뭘 하고 있었을까라는 질문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그 지점을 짧게나마 설명하면 이렇다. 당시의 독일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음악을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 특히 이탈리아 쪽에 경도돼 있었다. 17세기 독일 궁정에서 활동하던 음악가들은 대다수가 이탈리아인이거나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독일인이었다. 텔레만과 바흐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텔레만은 1681년 태어났고 바흐는 그보다 4년 뒤에 탯줄을 잘랐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이 상황은 오스트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들은 더욱 열렬하게 이탈리아 음악을 수입했다. 유럽 전역을 통틀어 이탈리아 오페라를 가장 많이 사들인 곳은 빈의 황실이었다.
그렇다면 영국은 어땠을까. 이 또한 자연스러운 궁금증이다. 이탈리아와 프랑스로부터 영감과 자극을 받아들인 측면은 동일하지만, 영국의 바로크 음악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한발 늦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전이었다. 주지하다시피 당시 영국은 프랑스와 달리 제한적 군주제가 시행됐다. 왕과 의회가 함께 통치했다. 한데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사촌인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부터 갈등이 격화됐다. 가장 먼저 수면에 떠오른 것은 지역 갈등이었다. 제임스 1세는 애초에 스코틀랜드의 군주였고 후사가 없었던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었기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갈등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게다가 왕실 채무를 해결해야 했던 제임스 1세는 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을 올려 또 분란을 야기했다. 다만 그는 종교 정책에서는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았다. 당시 영국에는 ‘청교도’(Puritans)라고 불리는 칼뱅주의 신봉자들이 있었는데, 애초에 이 말은 긍정적 의미가 아니었다. 그들이 지녔던 엄격한 성경 중심주의와 금욕주의, 가톨릭에 대한 강한 반발 등을 비꼬는 뉘앙스의 말이었다.
한데 제임스 1세의 아들인 찰스 1세가 가톨릭에 유화적인 정책을 펴면서 사달이 났다. 특히 그가 프랑스의 앙리에타 마리아(루이 13세의 딸)와 결혼하면서 사태가 더 커졌다. 오로지 종교적 이유만으로 갈등이 격화됐던 것은 아니다. 찰스 1세의 거듭된 폭정, 의회를 완전히 무시했던 태도에 민심은 이미 들끓고 있었고 거기에 종교적 문제가 기름을 부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1642년 ‘국왕파’와 ‘의회파’의 내전이 발발했다. 귀족과 대지주들이 국왕 편에 섰고 소지주와 상공업자들은 의회파로 뭉쳐 대항했다. 의회파의 대다수는 청교도들이었다. 그래서 이 전쟁을 ‘청교도 혁명’(Puritan Revolution)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일부 학자들이 ‘혁명’이라는 명칭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지금은 ‘잉글랜드 내전’이 더 흔하게 쓰인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 등장한다. 바로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이다. 의회파의 사령관이자 엄격한 청교도였던 그는 온건한 프로테스탄트들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한다. 찰스 1세의 처형도 주도했다. ‘국왕 처형’이라는 극단적 처방에 반대하던 의원들도 상당수 있었으나 크롬웰은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제압했다. 찰스 1세는 1649년 1월30일, “나는 정직한 사람, 선량한 왕, 인민의 순교자”라고 항변하면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후 잠시나마 형식적인 공화정이 실시되는 듯했으나, 크롬웰은 타락한 의원들을 제거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의회를 완전히 해산시켜 버렸다. 결국 자신이 종신 호국경에 취임해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종교적 엄격주의를 앞세운 ‘군사독재’가 그렇게 막을 올렸다. 짐작하듯이 이런 상황에서 문화와 예술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크롬웰과 청교도들은 음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용납했으나 연극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었다. 그들은 연극을 악마적인 것으로 치부해 아예 상연을 금지했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번성했던 영국의 극장들은 속속 문을 닫았다. 셰익스피어가 고향인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서 세상을 떠나고 약 30년 뒤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
물론 크롬웰 체제에서 이름을 떨친 예술가도 있었다. 대표적 인물로는 <실낙원>의 작가 존 밀턴(1608~1674)을 꼽을 수 있겠다. 시인이자 정치평론가였던 그는 모태에서부터 청교도였다. 크롬웰의 비서를 지냈으며 찰스 1세의 처형을 옹호하는 논설을 썼다. 크롬웰은 자신의 권력을 구축해가는 과정에서 철저한 공화주의자였던 밀턴을 적절하게 이용했다. 외국어에 능통하고 글솜씨가 빼어났던 진보주의자는 본의 아니게 독재자의 출현에 힘을 보탠 꼴이 되고 말았다. 세상사는 이렇듯이 아이러니한 경우들이 적지 않다. 밀턴이 꿈꿨던 ‘낙원’(공화주의)은 독재자 크롬웰과 그의 권력을 상속했던 아들에 의해 오히려 무너졌다. 크롬웰이 죽고 프랑스로 망명했던 찰스 2세(찰스 1세의 아들)가 1660년 5월에 런던으로 돌아오자, 시민들은 크롬웰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 교수대에 매달았고 체포된 밀턴은 한때 처형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사면을 받아 목숨을 부지했다. 영국은 왕정(王政)으로 되돌아갔고 두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은 시인은 마지막 힘을 짜내 장대한 서사시 <실낙원>을 썼다.
헨리 퍼셀과 영국의 바로크
예술은 결코 세상과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와 밀턴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의 거의 모든 예술은 사회적 변화와 긴밀히 연동한다. 대개는 손을 잡고 가끔은 길항한다. 음악도 그렇다. 연극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동안 꽤나 침체했던 영국 음악의 입장에서 보자면 왕정복고는 호재 중의 호재였다. 찰스 2세의 궁정에서는 다시금 음악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프랑스 물’을 먹고 돌아온 국왕은 궁정의 음악을 과거보다 더욱 화려하게 부활시키려 했다. 국왕과 왕실에 부속돼 있던 악단과 합창단이 복구됐고 그동안 할 일이 별로 없었던 음악가들이 속속 돌아왔다. 새로운 젊은 음악가들도 발굴됐다. 이 지점에서 드디어 영국의 바로크 음악을 상징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아마도 여덟 살이었을 헨리 퍼셀(1659~1695)은 12명으로 이뤄진 왕실 예배당 성가대에서 음악가로서 첫걸음을 뗐다. ‘아마도’라고 표현한 것은 그해가 1667년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같은 무렵에 그는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악보로 출판하기까지 했으니 ‘신동’이라는 표현이 결코 어색하지 않다. 그와 이름이 같은 아버지, 또 숙부였던 토머스 퍼셀도 찰스 2세의 궁정 음악가였다. 말하자면 그는 음악가 가문에서 태어난 신동이었다. 보이 소프라노였던 그는 변성기를 맞은 1673년 성가대를 떠났지만 실력이 출중한 음악 가문의 신동에게는 또 다른 자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퍼셀은 1677년에 궁정 악단의 상임작곡가로, 2년 뒤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오르간 연주자로 고속 승진했다. 비슷한 시기에 그는 프랜시스 페터스라는 이름의 여성과 결혼했고 곧이어 궁정에서도 오르간 연주자의 직책을 맡았다. 화이트홀의 예배당에서도 그의 연주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퍼셀은 궁정과 교회 밖에서도 활약했다. ‘연극의 나라’ 영국에서는 연극 공연에서 사용하는 부수음악의 수요가 상당히 많았다. 영국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연극을 참으로 좋아한다. 이와 더불어 연극과 오페라의 중간적 형태, 기악 반주와 노래뿐 아니라 연극적 대사도 적잖게 등장하는 ‘세미 오페라’도 유행했다. 퍼셀은 이 모든 극음악 장르에 손을 댔다. 그는 기악 음악과 종교적 앤섬(영국 국교회의 합창음악)을 비롯해 다양한 극음악까지 넘나든 전방위적 작곡가였다. 본인이 직접 연주도 했다. 당시 영국은 탁월한 작곡가이자 연주자였던 퍼셀을 쉼 없이 혹사시켰고 그도 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아마도 가장으로서의 부수입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퍼셀과 그의 아내는 1680년 결혼 이후 여섯 아이를 낳았는데 안타깝게도 두 아이만 성인으로 생존했다. 퍼셀은 훗날 모차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노상 과로에 시달렸다. 하지만 쉼 없던 그의 노동 덕택에 영국에서는 이탈리아나 프랑스와 구별되는 음악이 태어났다.
바로크 시대에 영국의 정체성을 돋을새김한 작곡가는 두말할 나위 없이 퍼셀이었다. 물론 퍼셀도 이탈리아적 양식을 상당히 받아들였으나 그것을 단지 모방하려 하지 않았다. 륄리의 모음곡 형식을 차용했으나 이 역시 영국적인 음악으로 변모시켰다. 지휘자 아르농쿠르는 이에 대해 “영국의 바로크는 전혀 다르다”면서 “자극적인 운동성도 눈부신 울림도 없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이탈리아의 출렁거리는 음악에 비하자면 밋밋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르농쿠르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들에게는 음량보다 소리의 우아함과 미묘함이 훨씬 중요했다. (퍼셀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양식을 받아들여) 이를 명백하게 영국화했다. 아주 섬세한 것으로 만들었다.” 다시 말해 영국의 바로크 음악은 “지극히 섬세하고 깊이 있는 음악”이라는 것이다. 특히 퍼셀은 종교음악과 극음악을 막론하고 성악곡에서 영어의 운율과 악센트를 멋들어지게 살려내 ‘영국 작곡가’로서의 역할과 의무를 다했다. 음악학자 헨리 레이너(1917~1989)의 “영어의 시적 가치에 대한 전례 없는 이해”라는 평가는 그래서 나온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퍼셀은 셰익스피어에 비견되는 인물이다.
디도의 탄식, “내가 땅속에 묻힐 때”
시인 베르길리우스(기원전 70~19)는 로마의 건국 신화에 해당하는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썼다. 주인공 아이네아스는 그리스에 패망한 트로이의 장군이다. 여신 베누스(아프로디테)와 트로이의 왕족인 앙키네스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일족을 데리고 멀리 떠나 더 위대한 나라를 건설하라는 신탁에 따라 불타는 트로이를 빠져나온다. 함대를 이끌고 시칠리아를 출발했으나 풍랑을 맞아 표류하다가 북아프리카 해안에 간신히 정박, 그곳에서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의 환대와 보살핌을 받는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이 싹튼다. 하지만 신들이 그 사랑을 가로막는다. 전체 12권으로 이뤄진 대하 서사시의 4권은 디도의 죽음이다. 신의 명령에 따라 어느 새벽에 아이네이스가 카르타고를 영영 떠나버리자 디도는 절망에 빠지고 만다. 천병희 선생(1939~)이 번역한 <아이네이스> 4권을 참조해 묘사하자면, 디도는 궁전 안뜰에 장작더미를 쌓아올리고는 아이네이스가 남긴 무구(武具)들과 입었던 옷가지들, 두 사람이 함께 사랑을 나눴던 침대 등을 모두 올려놓고 불을 붙인다. 자신도 불타는 장작더미 위로 “미친 사람처럼 기어 올라가” 생을 마친다.
디도의 비극은 다양한 장르의 예술로 리바이벌됐다. 오늘날 퍼셀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남아 있는 것도 디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오페라다. 그가 오페라 <디도와 아이네아스>를 작곡해 초연한 것은 1689년 런던 첼시의 여학교에서였다. 전체 3막으로 이뤄졌으며 공연시간이 1시간 정도에 불과한 작은 규모의 오페라다.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여학교에 앞서 궁정에서 먼저 공연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이 연극의 부수음악이거나 세미 오페라가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이 계속되는, 등장인물들의 모든 ‘말’을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로 진행하는 ‘명실상부한 오페라’라는 점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영국 최초의 오페라’로 언급하기도 하지만, 퍼셀보다 선배인 존 블로(1649~1708)의 <비너스와 아도니스>도 있으니 ‘최초’라는 규정은 다소 조심스럽다.
<디도와 아이네아스>는 오늘날 널리 회자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당시에는 별 인기를 끌지 못했다. 당시 영국인들은 오페라보다 ‘말로 하는 연극’에 더 친숙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퍼셀도 이런 취향에 부응했다. <디도와 아이네아스>보다 3년 뒤에 작곡했던 <요정 여왕>은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음악극 혹은 ‘세미 오페라’로 각색한 것인데 궁정과 민간에서 두루 인기를 끌었다. 실제로 퍼셀이 가장 많이 작곡한 것은 연극을 위한 부수음악이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5년 동안 거의 50개에 가까운 연극의 음악을 작곡했다. 이처럼 당시 영국은 오페라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오페라 <디도와 아이네아스>, 그리고 무엇보다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디도의 아리아는 오늘날 퍼셀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걸작으로 남아 있다. 죽음을 앞둔 디도가 하녀 벨린다를 향해 레치타티보로 노래한다. “벨린다야, 네 손을 다오. 어둠이 나를 덮는구나. 나를 네 가슴에 기대게 해다오. 나는 더 있고 싶지만 죽음이 나를 엄습하는구나. 죽음은 이제 반가운 손님이로구나.” 이어서 비통한 아리아 ‘디도의 탄식’(Dido’s Lament)이 흘러나온다. “내가 땅속에 묻힐 때/ 나의 잘못이/ 그대 가슴에 괴로움 안겨주지 않기를/(반복)/ 잊지 말아요 나를 잊지 말아요/ 그러나 아, 내 운명은 잊어줘요.”
로마의 시인이 창작했던 원작의 디도는 사랑하는 이의 배신에 몸부림치다가 광란의 상태로 빠져든다. 하지만 퍼셀의 오페라에 등장하는 디도는 다르다. 한마디로 말해 ‘영국적’이다. 격정을 토하지 않고 오히려 절제하면서 듣는 이를 깊은 슬픔에 빠트린다. 앞서 아르농쿠르가 언급했듯이 퍼셀은 “지극히 섬세하고 깊이 있는 음악”으로 ‘영국적 비애감’을 표현했다. 그는 36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사인을 둘러싸고 여러 설이 공존한다. 어느 날 술을 마시고 늦게 귀가했는데, 아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아 밖에서 밤을 새우다가 폐렴에 걸려 사망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진위는 확실치 않다. 상당 기간 결핵을 앓다가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가장 설득력 있는 사인은 과로로 인해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폐렴, 혹은 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쪽이다. 퍼셀 연구의 권위자인 미국의 음악학자 프랭클린 지머먼(1923~)은 모든 가설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70만원짜리 임야, 건설업자가 111배 넘는 3억원에 산 까닭
- “윤석열 대통령에게 훈장 안 받겠다”…교수에 이어 초등학교 교사도 거부
- [스경X이슈] ‘흑백요리사’ 출연진, 연이은 사생활 폭로…빚투→여성편력까지
- “장학사 만들어줄게”…여교사 성추행·스토킹한 교장 법정구속
- 아파트서 후진하던 쓰레기 수거 차량에 쾅…7세 초등학생 한낮 참변
- ‘파우치 논란’ 박장범 선배들도 나섰다···“염치를 안다면 멈출 때”
- 버스 시위 중 체포된 전장연 대표···법원 “국가가 1000만원 배상하라”
- 이재명 만난 윤여준 “민주주의 훈련 덜된 분들이 권력 잡아 문제”
- 어도어, 민희진 대표이사 선임안 부결···민희진 “주주 간 계약 효력은 여전해”
- ‘손자 사망’ 급발진 의심 사고 할머니 재수사에서도 ‘혐의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