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금 서사'로 빚어낸 판타지 로맨스, 묘하지 않은가

한겨레 2022. 7. 1.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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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미의 TV 새로고침][황진미의 TV 새로고침]
KBS2 '징크스의 연인'
한국방송 제공

<징크스의 연인>(한국방송2·KBS2)은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판타지 로맨스물이다. 서현이 신비한 능력을 지닌 인물로 등장하여, 발랄하고 순수한 매력을 발산한다.

드라마는 조선시대까지 올라가 모계로 이어지는 신비한 무녀 이야기로 시작된다. 미래를 보는 능력을 지닌 무녀의 혈통은 왕가에 속해 있다가 근대사를 거치며 재벌가에 포획된다. 재벌가의 숨겨놓은 무녀의 딸인 슬비(서현)는 태어날 때부터 갇혀 살다가 우연히 바깥세상을 구경하게 된다.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한 슬비는 처음 본 수광(나인우)을 ‘왕자님’이라 부르며 따라간다. 이후 수광은 재벌가에 의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름을 바꾼 채 시장 상인으로 살아간다. 재벌가에 다시 감금되었던 슬비는 탈출하여 수광을 찾아간다.

흡사 <해를 품은 달>의 ‘액받이 무녀’가 연상된다. ‘인간 부적’이라는 개념도 거기서 본 듯하다. 감금된 엄마에게서 태어나 바깥세상과 격리된 채 자랐다는 설정은 영화 <룸>을 연상시킨다. 드라마는 이런 거창한 서사를 깔고 있지만, 2회부터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슬비와 수광의 달달한 동거다.

도망친 슬비는 갈 곳이 없다며 무작정 수광의 옥탑방에 눌러앉는다. 그의 냄새가 좋고, 그의 방이 좋고, 그의 침대가 안락하게 느껴진다. 그가 끓여준 라면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고, 술에 취해 업힌 그의 등이 따뜻하다. 이게 뭘까. 여자가 처음으로 남자에게 반해 앞뒤 가리지 않고 순수하게 사랑하게 되었을 때, 품는 감정들의 구체적인 나열이다.

드라마는 시장통의 광경과 재벌가의 이야기를 나란히 그린다. 그런데 연결고리는 느슨하다. 죽음 직전의 수광을 살려 새로운 신분으로 살게 한 은인을 드라마는 아주 무성의하게 그린다. 은인의 행동동기가 한줄 대사로 요약될 지경이다. 수광이 어머니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자기 신분도 포기한 채 시장 상인으로 살게 된 과정은 아예 생략되어 있다.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반면 시장 상인들은 꽤 여럿이 등장하고, 생생하게 묘사된다. 왜 그럴까. 상인들은 일종의 코러스 역할을 맡는다. 드라마에는 상인들이 마치 관람석에 앉은 듯 슬비와 수광을 내려다보며 추측하는 장면이 나온다. 재벌가의 정략결혼, 사랑의 도피 등 익숙한 로맨스 공식을 상인들이 늘어놓는다. 어쩌면 이 장면은 드라마의 핵심을 누설한다. 요컨대 드라마가 풀어놓는 재벌가의 무녀 이야기는 순진한 여자가 가난한 남자에게 무조건적으로 매달리는 커플에 대해 품을 만한 통속적인 로맨스에 좀 더 기괴한 살을 붙인 망상이란 뜻이다.

드라마에도 “가난한 수광이가 뭐가 좋으냐”는 말이 여러번 나온다. 물론 슬비에게는 신비한 능력과 감금의 서사가 부여되어 있기에, 시청자들은 슬비의 순진무구함과 이들의 알콩달콩한 동거를 개연성 있게 받아들인다. 불가능한 현실을 뛰어넘는 판타지의 효과이다. 즉 가난한 남자와 아무런 고민 없이 이성애를 맺을 수 있는 여자는 비현실적인데,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알리바이로 신비한 능력과 감금의 서사가 동원된 셈이다.

그런데 묘하지 않은가. 이성애 로맨스를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 재벌 3세 남성이 등장하다가, 급기야 ‘별에서 온 남자’나 ‘구백년을 산 도깨비’가 상상되지 않았던가. 이들에게 부여된 판타지는 남성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초능력은 현실 세계에서도 부와 학식과 교양을 높여 더욱 유능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런데 왜 로맨스를 위한 판타지가 여자에게 부여될 땐, 신비한 능력은 포획과 착취의 빌미가 되고 감금과 경험의 결핍이 주어지는가. 그것은 가부장제 하에서의 이성애가 남녀 간의 평등한 관계를 전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이성애 모델은 남성이 여성을 압도하며 맺는 주종관계이다. 그러나 현실의 가부장제가 흔들리면서 더 이상 남성이 여성을 완벽하게 리드하는 관계를 찾기 어렵다. 이성애 로맨스가 불가능해지자, 환상이 동원된다. 남자의 능력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판타지가 만들어지다가, 이제는 여자에게 사회적으로 위축된 청년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일이 가능하도록 판타지를 심는다. 슬비는 스스로를 행운의 여신으로 생각하기에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없고, 감금에 의한 경험의 결여로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함 혹은 무지를 지닌다.

이성애 역할극을 위해 여성에게 감금과 경험의 박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괴상한 판타지적 상상만은 아니다. 영화 <룸>이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듯이, 감금은 여성들에게 실제로 벌어지는 남성권력에 의한 억압이다. 또한 바깥세상에 나온 슬비가 납치와 팔려갈 위험에 처하는 것 역시 감금의 우회적인 형태이다. 여성에게는 납치나 인신매매 등 극단적인 감금의 위협이 가해지는 동시에 자발적으로 행동을 제한하는 억압이 이중으로 가해진다. 여성이 보호자 없이 밤길을 걸을 수 없는 사회일수록, 여성의 외국 유학 경험이 결혼시장에서 경원시되는 사회일수록, 여성의 경험은 박탈되고 백치미는 찬양된다.

“여성의 교육수준과 소득수준이 상승함에 따라 하향선택결혼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관습 또는 규범을 바꿀 수 있는 문화적 콘텐츠 개발이 이루어져야 함. 이는 단순한 홍보가 아닌 대중에게 무해한 음모수준으로 은밀히 진행될 필요가 있음.” 다시보는 한국의 저출산 대책이다.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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