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 조선시대 여성이 자유연애했다고? 푸른 눈의 그들이 본 '미지의 조선'

김슬기 입력 2022. 7. 1. 17:09 수정 2022. 7. 1.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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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1천권의 조선 / 김인숙 지음 / 은행나무 펴냄 / 2만2000원
왼쪽부터 미케위치의 `한국인은 백인이다`, 비숍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그렙스트의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사진 제공 = 은행나무]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는 미스터리의 실마리가 되는 '아드소의 수기'가 등장한다. 아타나시우스 키르허 신부의 팬이었던 에코는 신부의 저작 목록과 아드소를 비교하며, 소설의 서두를 연다. 발명가, 음악가, 중국학자였던 박식한 예수회 신부 키르허의 저작에는 우리나라가 등장한다. 1667년 암스테르담에서 출간된 '중국도설'이다. 안타깝게도 선교여행을 떠나지 못했던 그는 선교사들에게 정보를 얻어 중국을 그려냈다.

공자를 모세의 후예라고 할 만큼 오류가 가득한 이 책에서 주변국 조선은 그들의 상형문자를 같이 쓴다고 묘사된다. 묘사는 단편적이지만, 이 책에는 섬나라가 아닌 반도로 묘사되고 제주도까지 그려진 조선의 지도가 실렸다. 그의 모든 책이 당대 베스트셀러였던 덕분에 400년 전 그가 쓴 '코레아(Corea)'라는 말은 널리 퍼져나갔을 것이다. 17세기까지도 '코레아'는 알려진 게 전혀 없는 것으로 유명한 나라였다. 키르허에게 영향을 준 스승도 있다. 마르티노 마르티니다.

"조선은 쌀과 밀이 풍부하고, 인삼과 진주가 유명하며, 과일이 많고, 그중에서도 배의 맛이 아주 뛰어나다. 또한 금과 은이 아주 풍부하다."

마지막 줄이 신빙성을 떨어뜨리지만, 일견 놀라운 관찰력이 돋보이는 이 설명은 중국 선교사였던 마르티니의 '타르타르의 전쟁'에 나온다. 마르티니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100년 이상 극동을 이해하는 데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조선의 젊은이들은 중국과 다르게 자유연애를 하고 부모의 허락 없이도 결혼을 할 수 있다"고 썼는데 조선의 여성이 개방적이라는 유럽의 오해는 여기서 비롯됐다. 광해군이 청과의 긴장을 외교적으로 해결하려 파병했던 강홍립 군대의 이야기도 등장하며 조선군은 '호전적'이라 묘사된다. 한반도가 무려 9세기에 언급된 이븐 후르다드비의 저작에는 중국 동쪽의 신라는 9명의 왕이 다스리며 금이 많고 아름다운 나라로 등장하기도 한다. 서구에서 이 땅이 얼마나 판타지로 가득한 미지의 왕국이었는지 알 수 있다.

소설가 김인숙은 코로나19 시대에 책의 숲으로 유폐됐다. 희귀한데도 희귀본이지 않고 고서가 아닌데도 몇백년 씩이나 오래됐고, 외국어 책인데도 우리나라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런 책들을 홀로 깊이 만났다. 김인숙은 우연한 기회에 1만1000권의 한국학 자료가 소장된 명지-LG한국학자료관을 발견했다. 이 고요한 공간에 초대돼 3년간 서양 고서를 읽을 기회를 얻었다.

우리는 흔히 1668년 네덜란드에서 최초로 출판된 '하멜 표류기'를 조선에 관한 최초의 책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책 이전에도 기록은 존재했다. 김인숙이 소개하는 46권의 책에는 앞서 언급된 책 외에도 아담 샬의 '중국포교사', 엘리자베스 키스의 '오래된 조선', 카를레티의 '항해록' 등이 포함된다. 고서 속 조선은 미지의 땅이자, 오해와 편견의 역사로 기록된 나라였다. 심지어 맥레오드의 '조선과 사라진 열 지파'에서 조선은 "모세의 후손으로 이스라엘의 사라진 열 지파 중 하나"로 묘사되며, '강철군화' 작가 잭 런던의 '신이 웃을 때'에는 "겁 많고 게으르며 비능률적인 민족"으로 등장한다. 작가는 "조선의 19세기 말, 20세기 초는 유령의 시대다. 제한된 기록이 남긴 오해와 편견으로 곳곳에 유령이 떠돈다"고 토로한다.

같은 곳을 보면서도 시선에 따라 판이하게 그려지기도 한다. 젊은 시인 조르주 뒤크로의 '가련하고 정다운 나라 조선'에는 1901년 조선의 겨울이 나온다. 정겨움, 아름다움, 따뜻한 햇살이 시인이 가장 많이 택한 단어다. "서울의 집들은 밀집 고깔 속에 얼굴을 감춘, 별로 부유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행복한 농촌의 아낙네와 같다. 은은한 햇빛이 이 가난해 보이는 정경을 포근하게 감싸 안는다." 같은 시기 소설가 피에르 로티의 '국화부인'이 "톱니 모양을 한 성벽 안에는 무덤들이 끝없이 널려 있다"고 쓴 걸 비교하면 같은 나라임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차이다.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책도 있다. 1913년 플로렌스 크랜은 장로교 목사 남편과 조선 순천에 왔다. 식물학을 전공한 화가였던 그는 자녀를 잃고 이 땅에 묻은 뒤, 씨앗을 심듯 조선의 꽃을 그렸다. '조선의 꽃들과 민담'은 가로 34㎝, 세로 25㎝의 큰 책 페이지마다 꽃 그림을 채웠다. 46종의 꽃과 나무 그림을 실었는데 시각적으로 황홀하게 만든다. 덕분에 출간된 그해의 크리스마스 선물용으로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키스의 `동양의 창`에 실린 `장례식에서 돌아오는 길`. [사진 제공 = 은행나무]
100년 전 조선에 머물렀던 키스도 '동양의 창'에 소소한 풍경을 그려 넣었다. 조선의 풍경과 보통 사람을 그렸다. 두 차례 전시회도 열었는데 1921년의 첫 전시는 역사상 세 번째 서양화 전시로 기록됐다.

세월의 더께가 앉은 '희한하고 희귀한 책들'을 생생하게 찍은 120장의 사진도 볼거리를 더한다. 소설가의 집요함과 유려한 문장이 고서와 만났을 때, 이런 특별한 화음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등이라도 떠밀고 싶은 소설가의 독서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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