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이지만, 뜨거운 연애 하고 싶어요" [젠더무물]

2022. 7. 1.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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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랑이 중요한 20대 페미니스트 여성
편집자주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는 뜻의 밈인 '무물'을 아시나요. 한국일보 허스펙티브가 성평등을 주제로 한 ‘무물 콘텐츠’를 격주 금요일마다 연재합니다. ‘대체 이럴 땐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일상에서 흔하게 겪을 법한 다양한 고민 상황을 통해, 함께 성평등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내디뎌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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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기록한 이래로 '사랑'은 인류의 가장 큰 화두였다. 그런데 오늘날 자발적으로 연애와 사랑, 그리고 결혼을 거부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사랑이란 대체 뭘까. 우리는 어떻게 규정된 연애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게티이미지뱅크

Q. 20대 대학생입니다. 페미니스트이고요. 고등학생이었던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때 여성 안전에 대해 눈을 뜨게 됐어요. 이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많은 여성과 교류하면서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에 대해 알게 되었죠. 책도 많이 읽고, 모임에도 자주 참석하는 편입니다.

자본주의와 결합한 가부장제가 여성의 주체성을 억압하고 노동을 착취하는 데에 문제 의식을 갖고 있어요. 친구들 중 '4B(4非·가부장제에 저항해 연애, 성관계, 결혼, 출산을 거부하는 움직임) 실천'에 동참한 이들도 많고, 그 기저에 깔린 문제 의식은 십분 공감해요.

그런데 저는 꾸준히 이성과 연애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입니다. 삶에 있어 사랑도 굉장히 중요한 화두라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페미니즘에 반감을 가진 또래 남성이 무척 많아, 젠더 이슈에 대해 한번 논쟁을 시작하면 큰 싸움이 되는 경우가 잦습니다. 친구 중에서는 결국 성평등에 대한 생각이 달라 이별을 한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이런 저를 두고 가끔 제 친구들은 '남자 못 잃는 페미니스트'라 조롱 섞인 농담을 건네기도 해요. 저 역시 상대에게 '이성적 매력'을 내세우며 연애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계속 자기검열을 하게 됩니다. 남성과의 연애 관계를 통해 전통적 가부장제에 기여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되고요.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과 '여성 인권을 높이려는 마음' 가운데 균형점을 찾을 수는 없을까요. (김사랑·가명·24·대학생)

A. 세상을 다정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사랑의 힘을 믿는 페미니스트로서, 사랑님의 고민에 충분히 공감이 됩니다. 특히 차별에 민감한 사람일수록, 알게 모르게 '고정된 성역할'을 강조하는 연애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느껴지게 마련이죠. 혼란스러운 것도 당연합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평등한 관계 맺기로서의 연애'를 익히고 이야기하는 데 얼마나 인색했나요.

'OECD 최장기 저출생률 1위'라는 오명은, 한국 사회가 시대 흐름에 맞는 '관계 담론'을 개발해 내지 못했다는 뚜렷한 징후입니다. 이제는 출산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결혼과 연애도 꺼리기 시작한 겁니다. 지난해 통계청 통계개발원 계간지에 수록된 보고서 '저혼인 시대, 미혼남녀 해석하기'에 따르면, 결혼에 대한 인식은 남성보다 여성이 더 부정적이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30~44세 남녀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의견이 남성은 13.9%인데 비해 여성은 3.7%에 불과했습니다.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다'는 의견은 남성 45.9%, 여성 61.6%였고 '하지 않는 게 낫다'는 남성 6.4%, 여성 15.5%로 집계됐어요. 분명 지금의 비연애, 비혼, 비출산 등의 풍토는 전통적 생애경로를 거부하는 여성이 주도하는 바가 큽니다.

여성들이 저출생의 원인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에요. 여성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활발하게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여전히 로맨틱한 관계 속에서는 대체로 수동적이고 의존적 역할을 맡게 되고, 결혼을 하면 가사노동과 돌봄의 책임이 곱절로 늘어나니 누구라도 연애, 결혼, 출산을 거부할 수 있어요. 특히 페미니즘에 대한 이견도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어요. 최근 페미니즘이 2030세대 내 성별 간 인식 차가 가장 큰 지점이라는 설문조사도 속속 발표되고 있죠.

Q. 자신이 애정을 느끼는 상대에게 사랑받고 싶은 것은 본능에 가까운 욕망 아닐까요? 연애를 한다는 것만으로 페미니스트는 이렇게 죄책감을 가져야 할까요.

A. 모든 개인은 사랑하고 사랑받을 권리가 있고, 이는 페미니스트도 예외는 아닙니다. 사랑님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무엇인가요? 각자 다양한 정의를 품고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성차별과 불평등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종식하고자 하는 운동',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시민이라는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을 겁니다. 네, 세간의 오해와 달리 페미니즘은 '여성 우월주의'도 아니며 남성을 배제하고 소외하는 사상이 아닙니다.

미국 여성 운동의 대모 벨 훅스는 저서 '사랑은 사치일까(현실문화 펴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에 대한 페미니즘의 비판은 여성들이 삶에서 사랑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 그럼으로써 여성해방운동이 추구해 온 완전한 자아실현을 위한 모든 여성들의 자유를 약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페미니즘이 젠더 기반 폭력, 여성의 재생산권, 노동 현장에서의 성평등 등 사회 곳곳의 풍경을 바꾸었지만, 궁극의 자유인 '사랑'을 성공과 권력을 갈망하는 것처럼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문화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고 그는 진단합니다. 그리고 주장합니다. "페미니즘은 우리에게 선택지를 주었다. 이제 사랑의 문제가 관건이다. 새로운 담론을 받아들여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랑해야 한다."

넷플릭스 연애 버라이어티 '솔로지옥'에서 여성과의 데이트를 쟁취하기 위해 남성 출연자들이 경기에 임하고 있는 모습. 넷플릭스 캡처

Q. 다른 방식이요? 호감이 있는 상대에게 괜히 연락을 해 보고, 그러다 서로의 마음이 맞으면 소위 '썸'을 타고, 데이트를 하다가 연애를 하는 게 공식 아닌가요. 다른 방식으로 사랑한다면, 더 이상 연애한다는 사실만으로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될까요.

A. 이한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는 이렇게 틀이 짜여 있는 로맨스의 모습을 '정상 연애 이데올로기'라 설명해요. 왜 첫 만남에서는 뼈해장국 대신 파스타를 먹을까요. 내 애인이 친구의 깻잎 장아찌를 떼어 주는지 여부를 두고 불붙은 '깻잎 논쟁'은 어떻고요.

이 활동가는 첫 만남부터 구애, 고백, 데이트 방식까지 정형화된 로맨스의 형태를 두고 '연애 각본'이라 칭합니다. 각종 미디어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런 모습을 인식하고 습득하며 재생산되는 것을 의미하죠. 즉, 가장 개인적 영역으로 보이는 연애는 기실 사회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가부장제 문화 아래 만들어진 이 연애의 틀 안에서 개인은 지속적으로 고정된 성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연애 과정을 답습하며 '페미니스트 자아'와 사랑받고 사랑하고자 하는 '개인의 자아'의 충돌을 마주하는 이유죠.

지속적으로 남성들과 '페미니즘과 연애'라는 주제로 모임을 열고 있는 이 활동가는 현장에서 조금씩 변화를 체감한다고 합니다. 최근 들어 신청이 조기 마감되는 경우가 잦을 뿐 아니라, 남성이 참여 인원 절반가량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이 활동가는 "미디어와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성차별적이고 뻔한 연애를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돌봄과 존중을 기반으로 상대와 서로 원하는 것을 맞춰 나감으로써 '새로운 연애 서사'를 만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설명했습니다.

"페미니즘이 여성의 전유물일 때 가부장적 문화는 별로 타격을 입지 않는다. 남성이 더 많이 개입할수록 페미니즘 혁명은 가부장제를 끝낼 수 있는 위협이 된다." 앞서 인용한 벨 훅스의 책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페미니즘의 궁극적 목표는 차별 철폐이지, 갈등과 고립, 반목이 아닙니다. 사랑님이 맺는 친밀한 관계 속에서 매 순간 고민하고, 더 나아가 성평등이라는 가치에 상대방을 초대하며 관계를 가꿔 나간다면, 연애는 결코 페미니즘과 대립하는 개념이 아닐 겁니다.


부록: 성적 의사결정 능력 점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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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박길우 디자이너

이혜미 허스펙티브랩장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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