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대로 되지 않지만, 과정에서 뭔가 얻어지는..삶은 파파야 같은 것"[다른 삶]

이숙명 입력 2022. 7. 1.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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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명의 '유유자적'

러시아계 미국인 요가 강사 안드레를 만났다. 그는 스쿠버다이빙 강사로 이 섬에 왔다. 하지만 곧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졌고, 섬에 고립된 다른 이들처럼 ‘팬데믹 정원’을 가꾸고 시멘트 화분을 만드는 등 엉뚱한 일들을 해보다가 요가 강사 훈련을 받았다. 안드레는 3년 전만 해도 맥주와 파티에 빠져 지냈으며 아침 7시에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고 하루 두 번 요가 강의를 하는 미래는 상상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갑자기 닥쳐온 삶이라 아직 이게 맞나 혼란스럽다고도 했다.

끈임없이 계속 공사가 이어지고 있는 이 집에도 파파야 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 가운데 가늘고 긴 나무가 파파야다.

“내가 신중하게 계획하고 준비한 것들은 항상 불발되었어. 우연히 시작한 것들만 남았지. 이제 네 얘기를 해봐. 너는 어떻게 그 직업을 갖게 되었고, 이 섬에 오게 되었지?”

“나도 마찬가지야. 글을 쓰고 싶어서 기자나 작가가 된 게 아니라 대학을 중퇴하는 바람에 취직하기가 어려워서 요행이나 바라고 공모전에 응시했다가 기자로 채용되었고, 발리를 오려고 온 게 아니라 글쓰기 좋은 숙소가 있기에 왔다가 인연들을 만나 눌러앉았지. 인생이란 원래 파파야 같은 게 아닐까 싶어.”

발리에서는 파파야를 먹다가
아무 데나 씨앗을 뱉고 나면
그 자리에 파파야 나무가 자란다
인생에서 애써 가꾸지 않았지만
싹 틔우고 자란 파파야가 있다면
그것이 결국 우리의 결말이고
가장 잘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팬데믹 정원을 가꿔본 안드레가 단박에 알아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발리에선 콩 심은 데도 파파야가 나고 팥 심은 데도 파파야가 난다. 열매를 먹다가 아무 데나 씨앗을 뱉고 잊어버리면 다음해 그 자리에 2m짜리 파파야 나무가 자라있는 식이다. 나의 팬데믹 정원에도 애지중지 돌본 바질과 토마토가 아니라 어디선가 날아와 정착한 파파야만 남았다. 대대손손 이곳 토양과 기후에 적응한 식물의 생명력이란 그만큼 강력하다. 우리 인생에 애써 가꾸지 않았는데도 자라난 파파야가 있다면 그게 결국 우리에게 가장 잘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안드레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파파야 열매를 엄청 좋아하진 않지만 그걸 가져서 나쁠 건 없지.”

그렇다. 그걸 가져서 나쁠 건 없다. 내 노력이 의도한 결과를 맺지 못해도 그 경험에서 무언가 얻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심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요즘 나는 자주 파파야를 생각한다.

발리의 어느 상가 주차장에서 꿋꿋이 자라고 있는 파파야.

새집에 이사 온지 한 달 반. 아직 물과 가구가 해결되지 않아 실내 캠핑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사태를 해결하려 애쓸 때마다 일은 더 나빠지기만 했다. 세상 가장 친절하고 믿음직한 목소리로 “내일 가겠습니다”라거나 “오후에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해놓고 내일이 지나 연락을 해보면 내가 왜 전화를 했는지 전혀 짐작이 안 간다는 듯이 “아, 그거요…? 내일 갈게요” 하는 사람들을 한 달 내내 상대했다. 어쩌다 빠릿빠릿하게 응답을 주는 사람들은 외국인이라고 상상을 초월하는 견적을 제시하거나 일을 반만 하고 푼돈을 챙긴 다음 연락을 끊고 사라졌다. 나 자신이 부조리한 일상을 반복하며 절대 실현되지 않을 것들을 기다리는 카프카의 소설이나 사뮈엘 베케트 희곡의 주인공이 된 기분도 들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이렇게 일을 안 하면서 어떻게 먹고사나, 이민자들이 여기 사람들과 일하기 힘들다고 불평하는 게 차별주의자라서가 아니라 이걸 다 겪어서였구나라는 차마 하기 싫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파파야가 등장했다.

우리의 작업반장이 양방향 스위치를 설치 못해서 끙끙거리다가 판매점이 물건을 잘못 준 탓이라 누명을 씌우려 했을 때, 화가 잔뜩 난 판매점 사장은 우리에게 스위치 대신 사람을 바꾸라며 전기 기술자들의 연락처를 주었다. 전기공사는 이미 끝난 상황이었기에 나는 그들에게 연락할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서울에서 집수리를 시작한 언니가 “원래 그 동네 좋은 인부는 판매상들이 가장 잘 안다. 전기와 목공은 같이 다니기 때문에 한 사람만 찾으면 나머지는 해결된다”는 조언을 주었다. 마침 집 조명이 시도 때도 없이 깜빡여서 전기도 점검이 필요했다. 전화로 상황을 들은 전기 기술자는 이틀 후 목수 친구를 데리고 내가 사는 섬으로 건너왔다. 배관은 자신이 직접 손볼 거라고 했다. 업무 연락에 즉각 가타부타 응답을 하고 약속한 날짜에 나타나는 사람이라니, 이게 현실이란 말인가.

목재가 휘어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접이식 창을 수리 중이다.

전기 기술자 겸 배관공은 집을 휙 둘러보더니 그간 여러 인부들이 들여다보고도 해결하지 못한 모든 문제의 답을 내놓았다. 샤워기가 막힌 건 혼합기 내부 실링 처리가 잘못되어서고 펌프 문제는 해당 기종에서 흔한 증상으로 어떤 부품을 갈면 해결이 될 것이며 전기 깜빡임은 두 가지 원인을 의심해볼 수 있는데 하나는 외부적인 것이고 하나는 내부적인 것이라 진단과 수리에 얼마간의 시간이 소요되리라는 식이었다.

목수는 출입문부터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돈을 뜯어내려고 트집을 잡는 게 아니라 성격 꼼꼼한 사람이 자기 기준에 못 미치는 작업을 볼 때 갖는 본능적 불편함에 가까워 보였다. 구멍 나고 뒤틀려서 제대로 닫히지 않는 문짝들, 목재 접합부와 다보들이 훤히 보이는 문틀, 수성 스테인리스를 사용해 습기 먹고 썩어가는 외부 목재들, 덧댐목 대신 실리콘을 발라서 틈을 메운 차양 등을 보며 그는 한숨과 헛웃음을 번갈아 지었다. 애써 말을 고르는 그에게 “욕해도 됩니다. 내가 직접 목공을 한 건 아니니까요”라고 하자 그가 말했다. “이 작업을 한 사람은 목수라고 부를 수도 없어요.”

새 목수는 문짝과 창문을 다 해체해서 수리하고, 가구까지 수리해 설치한 다음 모든 목재들의 색을 균일하게 맞추고 방수처리하는 데 인부 세 명과 8일간의 시간이 소요될 거라고 했다. 나는 기초부터 바로잡겠다는 그의 대범한 계획이 마음에 들었다.

집 상태를 확인하고 좋은 커피를 대접받은 그들은 우리의 스트레스를 짐작한다며 “친구 할인가”로 견적을 주겠다고 농담을 했다. 그 순간 나와 애인은 같은 상념에 잠겼다. “친구라서 실비만 받고 일을 해줬는데 감사할 줄 모른다”며 공사를 중단하고 달아나버린 시공업자 생각이 난 것이다. 인도네시아어에 능한 애인이 심각한 얼굴로 설명을 했다.

“우리가 원하는 건 할인이 아니라 확실한 가격입니다. 저렴한 인부들을 고용하면 시간이 훨씬 많이 소요되고 일을 두 번 해야 해서 오히려 지출이 커지지 않습니까. 일단 싸게 불러놓고 이게 빠졌다 저게 빠졌다 하면서 금액을 키우는 업자도 있지요. 그게 이 집을 지으면서 벌어진 일들입니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겪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모든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데 필요한 현실적인 견적을 주세요. 그게 안 맞으면 우리는 다른 대안을 찾을 겁니다. 이 점을 시공업자에게도 설명했는데 나중에 딴소리를 하더군요. 이번엔 확실히 말해두고 싶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마나 무시무시한 견적을 받게 될까 하루 동안 마음을 졸였다. 다행히 그들의 견적은 중간 업자가 낀 가격에 비해 저렴했고, 나를 이 고립무원의 실내 캠핑장에서 구해주는 대가로는 자비롭기까지 했다.

그 결과 집은 다시 공사판이 되었다. 나무를 갈아낸 분진이 모든 짐과 벽과 천장을 뒤덮었다. 인부들이 집에 머물러서 생활이 부자유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일이 제대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1년 동안 묵은 체증이 가시는 기분이다. 전기 기술자 겸 배관공은 주방 누수를 해결하는 김에 싱크대 배관을 다시 정리했는데 감탄이 나올 정도로 깔끔하고 아름다웠다. 다만 남은 문제가 골치 아프다. 전등이 깜빡거리고 청소기나 전기주전자를 쓰면 다른 부위 전력이 감소하는 게 내부 배선 문제로 밝혀진 것이다. 전기공사를 담당한 작업반장과 통화를 한 결과, 우리가 시공 초반 부탁한 대지 접지를 비롯해 몇몇 안전장치들이 누락되거나 찾기 힘들게 되어 있었다. 전선이 연결 안 된 스위치도 있었다. 펌프는 부품을 새로 조달하느라 수리가 미뤄졌다. 전기 기술자에게 슬슬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목공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맞춤 가구들을 설치하려다 보니 생각보다 사이즈 오차가 크고 부품도 누락되어서 중간에 작업이 지연되긴 했다. 공사 초반 인부들이 고장 난 수평계를 쓰는 바람에 벽이며 문틀이며 곧은 데가 없어서 뭐 하나 설치할 때마다 애를 먹기도 한다. 새 목수가 침착하고 참을성 많은 사람이라 다행이다.

그전 인부들은 일하면서 결코 손을 씻거나 뭘 치우는 법이 없어서 스치는 자리마다 얼룩을 남기고 부품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번 인부들이 작업 첫날 손대는 것마다 닦고 쓸고 치우는 것을 보며 또 한 번 감동을 느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온 애인에게 그 얘기를 전했다.

“너는 다이빙 장비를 어떻게 다루는지만 봐도 그 사람이 좋은 다이버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잖아. 그거랑 마찬가지 같아. 이 사람들은 진짜야.”

발리가 이렇다. 분명 좋은 물건들이나 어디 내놔도 안 꿇리는 실력자들이 있다. 그 정보에 닿기까지가 너무 힘들 뿐이다.

집을 짓기 시작할 때 상상한 결말과는 완전히 달라졌고 앞으로 갈 길도 멀지만 나는 오랜만에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바질과 토마토가 아니면 어떠랴. 이 결말이 나의 파파야인 것이다.

▲이숙명

영화잡지 ‘프리미어’, 패션지 ‘엘르’ ‘싱글즈’ 등에서 일했다. 27년차 프로 독거인으로서 <혼자서 완전하게>라는 책을 썼으며, 2017년 한국을 떠나며 짐정리를 하느라 고군분투한 얘기를 <사물의 중력>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현재 발리 인근 누사프니다에 살면서 가끔 글을 쓰고 요가와 스쿠버다이빙을 한다.

이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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