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도박중독자의 가족', 왜 고통은 똑똑한 여성의 몫인가[위근우의 리플레이]

위근우 칼럼니스트 입력 2022. 7. 1. 16:15 수정 2022. 7. 1.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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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을 수 없다는 걸 아는 건 '고통' 그럼에도 '고군분투' 할 수 밖에
불편한 진실을 말하지만 듣지 않는 가족들..실수를 지적받을 때 우리는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나
이하진 작가의 웹툰 <도박중독자의 가족>은 작품 정보란을 통해 난생처음 ‘도박중독’이라는 병에 맞닥뜨린 가족의 삶을 지켜보며 함께 싸웠던 ‘여성의 기록’을 그린다고 소개하고 있다. 카카오웹툰 제공

트로이 공주 카산드라는 미래에 대한 예지 능력을 지녔지만, 정작 누구도 그의 말을 믿지 않는 저주를 받았다. 그는 동생인 파리스를 스파르타에 보내면 트로이에 재앙이 올 것이라 예언했지만 파리스가 헬레네를 데려오며 트로이 전쟁이 벌어지는 걸 봐야만 했고, 그리스군이 남긴 거대한 목마를 들이면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 예언했지만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아 트로이는 불타오르고 만다. 만약 카산드라의 말을 경청했더라면 트로이는 그리스의 침략으로부터 자유롭거나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카산드라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일리아스>를 재해석한 걸작 웹툰 <카산드라>의 작가 이하진의 말을 경청했더라면 남편을 비롯한 그의 가족들은 지옥 같은 나날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웠을지도 모른다. 최근 카카오 웹툰에서 모든 에피소드가 무료로 공개된 이하진 작가의 <도박중독자의 가족> 이야기다.

남편의 셋째 동생이 주식 중독에 빠지면서 남편 형제들과 시어머니, 그리고 작가 본인까지 끝이 안 보이는 절망에 헤맨 자전적 경험을 담아낸 이 작품에서, 작가 본인을 반영한 주인공은 주식으로 형제들의 돈과 어머니의 아파트를 잃은 남편의 셋째 동생에게서 처음부터 도박중독의 가능성을 읽고 가족에게 경고하지만 누구도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도박중독자에게 빚을 갚으라고 돈을 빌려주면 다시 그 돈으로 주식을 할 거라는 경고를 하지만 오히려 비난 섞인 반응을 경험한다. 심지어 그의 경고대로 둘째는 명의도용 피해를, 넷째는 부동산 사기를 당한 상황에서도 가족들은 첫째 며느리인 주인공이 자신들을 구제하지 않는다고 원망한다.

세상엔 두 가지 고통이 있다. 하나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어 막연한 기대를 품지만 끊임없이 배신당하는 고통. 그것이 <도박중독자의 가족>에서 셋째와 혈연인 가족들이 겪는 고통이다. 다른 하나는 저 길은 다 같이 망하는 길이라는 걸 뻔히 알지만 또한 결과는 바뀌지 않으리란 걸 아는 고통이다. 망국의 예언자 카산드라가, 도박중독자의 가족 이하진 작가가 겪은 고통이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신화 캐릭터에 덧입힌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카산드라>의 카산드라는 <도박중독자의 가족>의 본인 캐릭터와 닮았다. 그가 각색한 카산드라는 광기의 예언자가 아닌 불편한 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지성과 용기로 뭉쳐진 존재다. 그는 친구이자 아마존의 공주인 펜테실레이아가 자신의 조언을 듣지 않고 함정에 빠질 뻔한 것에 대해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바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 회상한다. 바로 그 이유로 카산드라의 통찰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여기엔 불편함의 이중적 차원이 작동한다. 카산드라가 제기하는 불편한 진실은 합리적 근거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통념과 어긋나는 것이기에 외면당한다. 또한 그의 통찰이 맞았다는 것이 밝혀질 때 그의 말을 흘려들은 이들은 자신들이 틀렸다는 또 하나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 작중 맞수로 설정된 헬레네가 그리스 남자 영웅들을 교묘히 조종하되 자신들이 틀릴 리 없다는 그들의 오만함을 만족시켜 영향력을 유지한다면, 카산드라는 트로이 남성들이 본인들의 실책을 직면케 해 오히려 정치적으로 소외된다. 물론 그것은 카산드라의 책임이 아니다. 그는 당대의 지략가로서 남들의 머리 꼭대기 위에 선 인물로 설정되었지만, 자기편을 기만하지 않는다. 혹은 못한다. 그는 스승의 흉계로 동생인 파리스가 왕가로부터 버림받았던 것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어떤 순간에도 파리스를 버리지 못한다. 그의 고군분투가 영웅적이라면 초월적이라서가 아니라 인간적 연민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도박중독자의 가족>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분명 <도박중독자의 가족>은 주식이나 코인 등에 중독된 가족, 지인을 어떻게 대하고 또한 자신의 삶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탁월한 교과서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홀로 옳은 방향을 가리키는 주인공의 관점을 중심으로, 그의 말을 듣지 않는 남편 식구들의 무능함과 아집에 혀를 차는 것에 그쳐선 안 된다는 뜻이다. <카산드라>에서 작가 개인의 경험을 읽어낼 수 있다면, <도박중독자의 가족>에선 <일리아스>의 흔적을 읽어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결점이 있는 인물을 묘사할 때도 성격의 훌륭함을 부여해야 한다며 <일리아스>를 예로 든다. 좋은 성품과 능력을 지닌 인물이 악의가 아닌 중대한 착오로 불행에 빠질 때, 비로소 독자는 캐릭터에게 연민을 느끼고 운명의 힘에 대해 두려움과 겸손함을 배운다. <도박중독자의 가족>은 비교적 단순한 그림체와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고전적 인물과 플롯에 의외로 충실하다.

주인공은 가족 중 유일하게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다른 이들의 반복되는 실수를 확인하지만, 그들을 경멸하진 않는다. 주인공은 사태의 원흉인 셋째에 대해서도 “가족들을 위해 주식을 했다는 것도 믿”는다 말하며, 셋째에게 명의를 도용당해 사채 빚을 떠안아 정신이 반쯤 나간 둘째에게도 “혹시라도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조언한다. 그는 작품 안에서 이 모든 일이 끔찍한 악의나 멍청함으로 비롯된 게 아니라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무너지는 일상 앞에서 어떻게든 이성을 유지하려 발버둥 치는 주인공이 연민의 대상이라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남편 식구들을 통해선 이 불행이 언제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닥칠 수 있다는 강한 두려움을 남긴다. 두려움 앞에서만 우리는 겸손해진다. 이것은 사건의 힘이 아닌 서사의 힘이다.

물론 <도박중독자의 가족>이 가장 두려운 순간은 주인공이 며느리이자 큰형수로서 겪게 되는 한국 ‘시월드’의 폭력성이 드러날 때다. 시도 때도 없이 주인공의 사과와 전향을 요구하는 시어머니의 전화는 호러이며, 큰형이 빚 갚는 데 동참하지 않는 건 형수 때문이라며 “집안에 여자가 잘 들어와야 하는데”라 흉보는 셋째와 넷째는 어떤 의미로든 한국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끔찍한 머저리다. 상당수 독자들에게 이 작품이 가족의 도박중독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시월드’로의 편입에 대한 경고로 읽힌 건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도박중독자의 가족>은 다시 한번 <카산드라>와 조우한다. <카산드라>에서 트로이를 지키는 양대 희망인 카산드라와 헥토르 남매는, 신화적 영웅보단 장남 콤플렉스를 지닌 남편과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건 막아야 한다는 강박에 빠진 똑똑한 아내에 더 가까워 보인다. 헥토르는 책임감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고비마다 카산드라의 조언을 듣지 않고, 여성인 카산드라의 목소리는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하진 작가의 관점에서 트로이의 멸망은 아킬레우스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집안의 잘난 여성 말을 듣지 않아 벌어진 일이다. 여기서 고전적 비극의 플롯은 새롭게 해석될 수 있다. 가부장제의 단단한 구조 안에서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그 반복 안에서 비극은 역사를 뛰어넘는 보편성을 얻는다고.

칼럼니스트 위근우

다행히 <도박중독자의 가족> 결말에서 가족은 조금씩 일상을 회복하고 희망을 기약하며, 이하진 작가는 <카산드라>의 새 시즌을 연재할 계획이다. 작품 속 상담사의 장담처럼 끝이 없을 것 같던 고통의 시기도 언젠가는 끝날 수밖에 없는 걸까. 알 수 없다. 카산드라도 이하진 작가도 다 같이 망하는 길로 가는 걸 홀로 지켜봐야 했다. 뛰어난 지성으로도 막을 수 없는 건 막을 수 없다. 그걸 아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알면서도 그것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가장 똑똑한 이들이 가장 바보스럽게 발버둥 칠 수밖에 없는 역설. 이러한 부조리에 대한 비판적 전망을 유지할 때, 비로소 희망은 무책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질문해야 할 건, 왜 누구도 카산드라의 말을 듣지 않느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카산드라를 통해 우리의 실수가 밝혀졌을 때 직시할 용기가 있느냐는 것이다. 당장 불타는 건 트로이의 성벽이 아닌 우리의 일상일 것이므로.

위근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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