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과 칼, 폭력 속에 성장한 소녀는 어떻게 됐을까..애나 번스의 '노 본스'[책과 삶]

이영경 기자 2022. 7. 1.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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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본스
애나 번스|홍한별 옮김|창비|472쪽|1만7000원
‘트러블’ 기간인 1971년, 아일랜드 공화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아일랜드 영국령 도시 런던데리에서 영국에 맞서 아일랜드와의 통합을 지지하는 가톨릭계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출처 Public Record Office of Northern Ireland

2018년 <밀크맨>으로 맨부커상(현 부커상)을 수상한 아일랜드 출신 소설가 애나 번스의 데뷔작이다. <밀크맨>의 부커상 수상은 당시 커다란 화제가 됐다. 성폭력 고발 운동인 ‘미투’로 스웨덴 한림원이 파문에 휩싸이면서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하지 못한 해였다. 맨부커상은 보란 듯이 애나 번스의 <밀크맨>을 수상작으로 발표하며 “ ‘#Me Too’와 관련된 논의들에 깊고 섬세하며 도전적인 화두를 제시한다”는 심사평을 내놨다.

<밀크맨>은 북아일랜드의 분쟁지역 벨파스트에서 영국을 지지하는 개신교 세력과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아일랜드에 합병하려는 무장세력(IRA)이 대립하던 ‘트러블’ 시기에 한 소녀가 반군 지도자로부터 은밀한 성적 스토킹에 시달리며 내면까지 서서히 파괴되는 과정을 그려냈다.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작가 애나 번스는 일약 세계적 작가가 됐다. <밀크맨>이 애나 번스의 작가적 기량이 꽃피운 작품이라면 <노 본스>는 <밀크맨> 탄생을 예고하는 작품이다.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선 북아일랜드 지역의 역사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세계지도를 보면 영국 서쪽의 커다란 섬 아일랜드의 북동쪽 끝만 다른 색으로 칠해져 있다. 영국과 같은 색이다. 하나의 섬에서 다른 색깔로 나눠진 명백한 경계, 이것이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지역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한다.

아일랜드섬의 지도. 영국 영토인 북아일랜드는 갈색으로 표시돼 있다.

북아일랜드는 오랫동안 분쟁 지역이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영국편인 개신교계 세력과 아일랜드편인 가톨릭계 세력이 30년 동안 죽고 죽이는 일을 반복했다. 이 시기를 일컬어 ‘트러블’이라 부른다. 30년이면 한 세대가 교체되는 시기다. 누군가 길에서 총에 맞거나 죽는 일이 하룻밤만 지나면 잊혀지는 곳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어떤 몸과 정신을 갖게 될까. <노 본스>는 그런 이야기를 다룬다.

벨파스트 출신 애나 번스는 맨부커상 수상 당시 “폭력과 불신, 피해망상이 만연하고 사람들이 가능한 한 최대로 스스로 알아서 생존해야 하는 곳에서 성장했다”고 말했다. 소설은 ‘트러블’ 시기에 나고 성장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에나 번스가 <밀크맨>으로 2018년 맨부커상을 수상하던 당시의 모습. 게티이미지

소설의 주 무대인 아도인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안전 구역’과 ‘위험한 구역’이 나뉘는 곳이다. 벨파스트 북부의 구역으로 대부분 주민이 친아일랜드계 가톨릭이자 노동계급이고, 길 건너편엔 개신교도 지역인 샨킬이 있다. 이 거리에 사는 가톨릭계 러빗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서사의 중심으로, 1969년 ‘트러블’이 시작되던 해부터 평화협상으로 종료되던 1994년까지의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서술한다.

“트러블은 목요일에 시작됐다. 저녁 6시에.”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때 러빗 가족의 둘째 딸 어밀리아는 일곱 살이다. 친구들과 애벌레를 장난감 삼아 갖고 놀던 어밀리아는 앞으로 길에서 친구들과 놀 수 없을 거란 말을 듣고 “길 어귀에서 못 놀 정도로 나쁜 일이 뭐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날 밤, 어밀리아 가족은 온 집 안의 창문에 널판을 덧대고 문을 걸어 잠근다. 침입자들이 유리창을 깨고 침입을 시도하자 널판을 하나 더 덧대며 그 밤을 버텨낸다. 이것이 ‘트러블’의 첫날 밤이었다.

이후 벌어지는 사건은 그야말로 온갖 폭력의 연속이다. 경찰과 군대의 폭력, 반군의 폭력, 가정 폭력, 성폭력, 학교 교사의 폭력, 친구들 사이의 폭력…. 어떤 논리보다 ‘이쪽 편’인지 ‘저쪽 편’인지가 중요하고, 그날 밤 목숨이 붙어 있을지 말지가 순전히 운에 달린 지역에서 어른들도 일상 속에서 폭력을 일삼고, 아이들은 이를 학습하며 성장한다. 어밀리아의 가족은 ‘트러블’ 시기의 폭력과 혼란을 집약시켜놓은 모습이다.

30년간 죽고 죽이는 일이 반복된
북아일랜드 분쟁지역 이야기

여성성과 자신의 몸을 죽임으로
소녀 어밀리아는 폭력에 대응

전쟁 속 어린이·여성 등 소수자가 당하는
잔인한 폭력을 블랙유머로 다뤄내
북아일랜드 ‘트러블’ 기간이었던 1977년 군인이 지나가던 행인을 검문하고 있다. 1977년 사진과 2019년 같은 거리의 사진을 합성한 사진. 출처 Public Record Office of Northern Ireland

소설은 영국군과 경찰, IRA 반군 세력의 전쟁과 대립을 공들여 서술하는 대신, 어밀리아와 친구들 등 여성과 어린이, 장애인 등 소수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폭력적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이 어떻게 파괴되어 가는지를 낱낱이 그려낸다. 10대 소년들은 총을 빌려와 ‘러시안 룰렛’ 게임을 흉내내다 목숨을 잃고, 반군들은 심심해서 ‘자경단’ 행세를 한 비행소년들을 불러모아 총으로 ‘무릎 쏘기’를 벌칙으로 가한다. 이 동네의 룰은 ‘싸움’과 ‘폭력’이다. 전쟁과 폭력은 목소리 낼 곳 없는 여성과 아이들, 약자에게 더 많은 흔적을 남긴다. 어밀리아의 친구이자 정신장애를 앓는 메리는 아빠의 성폭력으로 임신하고, 죽은 아기를 봉지에 담아 유아차에 태우고 다닌다. 오빠 밋은 아내 미나와 어밀리아를 폭행하고, 이를 다 지켜본 네 살배기 딸 올라는 인형들의 목을 매다는 놀이를 하며 논다.

모든 죽음은 이 한마디로 요약된다.

“다들 처참한 일이다, 끔찍한 일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영영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 모든 일이, 언제나 그렇듯, 그 다음의, 새로운, 과격한 죽음에 묻혔다.”

어밀리아는 주인공들 가운데 결이 다른 존재다. ‘트러블’이 시작된 밤, 언니 리지와 ‘뭐가 폭탄에 맞았는지’를 맞히는 게임이 ‘누가 총에 맞았는지’ 게임으로 변하자 이상하게도 답을 생각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던 어밀리아는 싸움을 걸고 폭력을 행사하는 데 익숙지 않다. 어밀리아는 대신 자신의 몸을 ‘죽이는’ 방식으로 폭력적 세상에 대응한다. 거식증을 앓는 어밀리아는 자신의 섹슈얼리티와 몸을 거의 ‘없는 것’처럼 만드는데, 이것은 전쟁과 폭력적 상황에서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가 오히려 ‘위험한 것’으로 여겨지는 상황에 대한 나름의 방어책으로 보이기도 한다. 어밀리아의 몸과 마음은 폭력적 세상 속에서 병들어간다. 거식증에 알코올중독, 나중엔 조현병과 같은 정신질환에 시달린다.

놀라운 것은 애나 번스가 이 잔인하고 폭력적인 이야기를 아주 능청스럽게, 유머러스하게 써낸다는 것이다. 소설 문장 하나하나에 칼과 총알, 피가 묻어나지만 애나 번스는 시치미를 떼고 블랙유머를 능란하게 구사하며 소설을 써내려간다. 반복되는 폭력의 서술 속에 넌덜머리가 나고 실소를 하다가도, 문득 이것이 실제로 일어났던 이야기에 가깝다는 것을 떠올리면 웃음을 거두게 된다. 폭력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이렇게 위험한 일이다. 1960~1980년대 한국사회 역시 독재와 폭력, 죽음의 어두운 역사를 갖고 있다. 30년 동안의 ‘트러블’ 이야기가 마냥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 건 그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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