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의 티키타카(31화)[연재 소설]

에린 2022. 7. 1.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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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가 집안에 들어섰을 때 시위대는 흩어졌다. 정임은 다행히 일행들과 함께 시위대 대열에서 벗어나 시계탑 아래로 피해 있었다.

세라는 팔에 통증을 느꼈다. 팔을 털며 소매 끝을 걷어 올렸다. 시퍼런 멍 자국이 짙게 배어 있었다. 시위대 틈에서 세라가 휘청거릴 때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 남자가 아니었다면 넘어질 뻔했었다. 세라는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묵례했다. 남자는 세라에게 조심하라고 말을 건네면서도 눈은 멀어져 가는 일행을 쫓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김형! 같이 가요.”

남자는 일행을 따라갔다. 앞선 일행은 전부 카메라를 들고 있었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뭔가 떨어져 있었다. 세라는 그것을 주웠다. 검은 모자를 쓴 남자가 카메라를 메고 경찰을 향해 뛰어가는 모습을 한참 쳐다봤다. 사람들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집으로 돌아갔다.

세라는 베란다에서 공원을 바라봤다. 시위대는 보이지 않고 여느 때처럼 운동하거나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보였다. 바지 주머니에서 작은 플라스틱 조각을 꺼냈다. 검은색 플라스틱 조각에는 ‘라이카’라는 카메라 브랜드가 새겨져 있었다.

세라는 블로그로 들어 온 주문을 보고 화장품 재고를 확인했다. 번역해 놓은 오사카 사람들의 사용 후기와 꼼꼼한 제품 설명은 고객의 주문으로 이어졌다. 코스모 뷰티 박람회에 가져갈 제품들을 캐리어에 넣었다. 동종 업계의 회사와 참신하고 독특한 제품 생산을 타깃으로 하는 벤처 기업까지 많은 회사가 참가하는 행사여서 긴장됐다. 하루마가 보내 준 원료와 첨가물별 제품의 안내서도 함께 챙겼다. 규모가 큰 박람회의 한 부스에 자신의 제품을 내놓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박람회장에는 주말이라 그런지 가족 단위의 사람들도 눈에 많이 뜨였다.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요시메의 화장품 부스가 자리 잡았다. 하루마가 이메일로 얘기한 대로 젊은 여자가 미리 와서 제품을 진열하고 있었다. 여자는 화장을 옅게 해서 민낯으로 착각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하얀 얼굴에 잡티 하나 없는 피부에 광채가 일었다. 반 머리를 하고 큐빅이 박힌 네일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반짝거렸다.

세라는 여자와 인사를 나눈 뒤 캐리어에서 제품을 꺼내 진열했다. 경품으로 사용할 제품과 시연할 제품을 구분해 놓고 고객들의 정보를 적을 방문록도 꼼꼼히 살폈다.

뷰티에 대한 관심은 남자들 사이에서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제품 테스트에 참여해 경품도 받아 가며 적극적으로 박람회를 즐겼다. 옆의 부스에서 시연 중인 선패치를 붙이고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날 무렵 세라는 원료와 첨가물을 가지고 간단하게 화장수를 만드는 방법을 시연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카메라로 동영상을 찍는 여자가 있는가 하면, 샘플은 없냐고 묻는 남자 손님도 있었다. 작은 용기에 샘플을 만들어 직접 소분해서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첫 번째 시연이 끝나자 사람들이 조금씩 빠져나갔다. 세라는 참았던 화장실을 갔다. 한 부스 앞에서 제품을 테스트하고 있는 여자에게 눈이 갔다. 순간 세라는 놀란 표정으로 여자를 쳐다봤다. 누구도 그녀가 업계 1위의 엘라 화장품의 총괄 상무라는 걸 알지 못했다.

흰 운동화를 신고 베이지색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모습은 그동안 쌓인 채 상무의 이미지와는 상반됐다. 그녀는 세련되고 정갈한 세미 정장 차림에 명품 구두와 백으로 스타일을 완성시키는 사람이었다. 주말이라는 특정된 시간을 고려한다면 이상한 것도 없지만, 세라는 채 상무의 이면을 들추어낸 기분이었다.

세라는 채 상무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상무님, 뭐 새로운 게 있나요?”

“유 팀장! 여기서 보네.”

“오사카 정리하고 들어왔어요.”

채 상무는 말하면서도 시연 중이던 화장품을 손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그때 한 남자아이가 뛰어와 채 상무의 셔츠가 늘어지도록 허리를 잡았다.

“엄마. 저기 다트판이 있어. 그거 하면 선물 준대. 가자.”

아이가 채 상무를 엄마라고 불렀다. 세라는 귀를 의심했다.

‘엄마라고?’

“그래. 지금은 엄마가 손님하고 얘기 중이니까. 좀 기다릴래?”

채 상무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어색했다. 세라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상무님… 아들이….”

아이가 채 상무 뒤로 숨었다.

“지우야, 인사해야지. 엄마랑 같이 일했던 분이야.”

“안녕하세요.”

아이는 주뼛거리며 여전히 채 상무 뒤에 있었다.

“애가 낮을 좀 가려. 시간 괜찮나. 어디 가서 얘기 좀 할까?”

세라가 아이스 커피를 들고 부스로 돌아왔다. 여자는 고객들을 모아놓고 손등과 자신의 눈가에 화장솜을 붙여가며 제품을 설명하고 있었다.

“여기에 주름이 2주 후면 감쪽같이 없어져요. 노화가 진행된 사람도 이거 바르면 재생 효과가 뛰어나요. 여기 보시면 아시겠지만, 오사카에서 이미 입소문이 난 제품이거든요.”

여자의 말투가 호객하는 느낌이 들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목을 끄는 수안은 좋은 편이었다. 세라는 여자에게 눈짓하며 커피를 건넸다. 여자는 빈 테이블로 가서 한숨 돌리며 커피를 마셨다.

세라는 오사카에서 채 상무를 만난 이후로 다시 만날 줄은 몰랐다. 손님을 응대하면서도 채 상무와 남자아이가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채 상무는 자신이 미혼모였으며 혼자서 지우를 키웠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녀의 경력에 3년의 공백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그 사이에 해외 근무나 유학 중이라 생각했었다. 그녀에게 아이가 있다니. 수년 동안 함께 일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흘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란 건 알았지만, 출산이나 아이에 관해 철저하게 비밀로 한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아이는 세라와 채 상무가 얘기하는 동안 테이블 위에 있는 냅킨을 접어 아주 작게 만들고 있었다. 다섯 개를 만들고 몸을 비틀어 댔다. 그런 아이 옆에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대하는 채 상무에게 세라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녀도 엄마였다.

세라는 병이 진행되기 전에 아이를 갖고 싶어 강호에게 아기의 아빠가 돼 달라고 무리하게 요구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랬다면 자신에게도 저런 아이가 생겼을까. 채 상무가 아이와 손을 잡고 박람회장을 나가는 뒷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밝아 보였다. 세라는 그녀의 삶에 들어갈 틈이 조금씩 열리는 것 같았다.

부스를 정리하고 캐리어에 제품들을 다시 담았다. 고객리스트에 담긴 정보만 해도 백 명이 넘어가고 있었다. 내일은 좀 더 많은 증정품을 가져와 홍보하기로 했다. 여자는 피곤해 보였지만, 아침에 본 얼굴처럼 반질반질했다.

세라는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거울 앞에 섰다. 순간 뒷걸음치고 한 발찍 물러났다. 눈가에 움푹 들어간 주름과 흘러내린 턱살이 두 눈을 끌어내린 힘없는 얼굴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여자의 말처럼 이걸 바르면 내 병의 흔적이 감쪽같이 없어질까. 세라는 자신도 모르게 화장 솜에 화장수를 묻혀 얼굴에 톡톡 두드렸다.


박람회의 마지막 날은 평일이어도 많은 사람이 방문했다. 고객명단은 오백 명을 넘어갔고 약속한 대로 샘플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우편으로 배송하기로 했다. 세라는 다리가 붓고 피곤했지만, 제품을 홍보하는 면에서는 만족하는 결과를 얻었다. 집에 돌아가는 대로 증정용 샘플을 만들어야 했지만, 행복한 잔업이라고 생각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일곱 시가 다 돼 가고 있었고 도로 위 차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덕분에 세라는 낯익은 거리 풍경을 천천히 볼 수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삼삼오오 나와서 수다 떨던 회사 공원 벤치와 카페 월든이 보였다. 세라는 갑자기 가방을 챙겼다.

“기사님, 여기서 내릴게요.”

캐리어를 끌고 월든으로 들어갔다. 항상 앉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빌딩 정문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보며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핸드폰을 열어 문자를 확인했다. 얼마 전 강호에게 문자를 받은 게 전부였다. 강호와 영지의 전화번호를 검색하고 화면 위에 덩그러니 올려놓고만 있었다.

고객명단이 늘어가는 것도 월든 안에서는 위안이 되지 못했다. 세라는 출입문에 달린 종이 울릴 때마다 시선을 보냈다. 종소리가 날 때마다 자신을 과거로 데리고 갔다. 김선형과 오수아가 사원증을 목에 걸고 불쑥 들어올 것 같았다. 일곱 시가 되면 강호와 영지가 시간 약속 좀 지키라며 서로에게 입을 내밀며 말싸움할 것만 같았다.

핸드폰에서 새로운 이메일이 수신됐다는 알람이 떴다. 하루마가 여자에게 얘기를 들었다며 제품 홍보가 잘 마무리돼서 축하한다는 내용이었다. 세라는 출입문 종소리가 연거푸 울리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하루마의 격려에 입꼬리를 올리며 답신하는 데 열심이었다.

“유세라!”

세라는 이메일을 쓰다 말고 테이블 앞에서 지켜 서 있는 그림자를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에린은 누구?

본명은 조선희다. 2020년 단편소설 ‘해시태그, 스타북스’를 한국문예에 발표했으며, 2021년 ‘바오밥 나무’를 동 문예지에 발표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소설 아카데미와 동인회 청맥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에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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