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집 말고, 살기 위한 집' 어디서 답을 찾을까[책과 삶]

김종목 기자 2022. 7. 1.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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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보다 국가
문수현 지음│이음│388쪽│2만5000원
“인간을 도끼로 죽일 수 있는 것만큼이나 집으로도 죽일 수 있다”고 말한 사진가이자 삽화가인 하인리히 칠레의 1919년 삽화. 당시 열악한 주택과 복지 상황을 보여준다.
“인간을 도끼로 죽일 수 있는 것만큼이나 집으로도 죽일 수 있다.”

독일의 사진가이자 삽화가 하인리히 칠레(1858~1929)의 말이다. 이 말엔 당시 주택 상황에 대한 통찰이 들어있다.

베를린 인구는 1850년 40만명에서 1900년 200만명으로 급증했다. 급작스러운 도시화 탓에 주거 여건은 열악했다. 좁고 어두운 골목, 무너져가는 건물, 채광·환풍이 거의 안 되는 노동자용 임대 숙소가 즐비했다. 이 같은 주거 환경이 신생아 사망률을 높였다. 1871년 자료에 따르면, 베를린 주택 중 75%가 ‘임대병영’이라 불리며 투기 대상이 된 대단지 주택이었고, 10%는 지하주택이었다.

중간계급 자유주의자들이 심각한 주택난과 만연한 투기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인류애 같은 선의는 아니었다. 이들은 “주거 상황이 좌파 정치에의 경도와 도덕적인 타락을 낳는다”고 진단했다. 부르주아 사회개혁가 단체인 사회정책협회는 1866년 주택 문제의 핵심이 노동자 주택 문제라고 규정했다. 1887년 출간한 <주택 문제에 대한 경고>에선 “대도시의 사회 하층이 그들의 주거 상황으로 말미암아 야만적이고 짐승 같은 존재”로 떨어지는 것을 멈출 조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좌파의 생각은 달랐다. 1872년 발간된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주택 문제에 관하여>는 주택 소유가 노동자들의 투쟁력을 약화할 것이라고 봤다. 주거난 해결은 혁명 이후에 가능하다고 봤다.

“주택 문제는 사회 문제가 전혀 아니다. 주택 문제는 임차인의 욕망과 인색함에서 유래하는 것일 뿐이고, 주택시장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사회주의로의 행보에 불과하다.” 지금 한국에서도 익숙하게 들릴 이 입장은 19세기 후반 ‘독일주택토지소유자협회중앙회’가 내놓은 것이다. 이들은 노동자를 위한 저가 주택 공급을 위한 주택 건설도 반대했다.

사민당 정치인들이 엥겔스에서 벗어나 수정주의적, 실용적 견해를 내놓기 시작했다. 베를린 시의원이던 파울 히르쉬는 위생적이고 적합한 가격의 주택 여러 채를 지방정부 지원으로 건설하자고 했다. 그는 임대인 특권을 없애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고도 했다. 라인라트 지역의 도시계획가 요제프 슈튀벤은 “주택 문제는 결국 권력 문제”라며 국가개입을 강조했다.

이런 논의 끝에 구체적 법안 개요가 나왔다. 1898년 독일 제국 차원의 주택 법안을 마련하기 위해 조직한 제국주택법협회는 슬럼 철거, 주택 구조 개선, 노동자 주택 건축 확대, 저렴한 주거를 위한 지방정부의 택지 조성, 교통체계 개편 등을 낸 법안 내용을 제시했다. 주택 소유자 단체 등의 반대로 법안 마련엔 실패했다.

150년 동안 진화해온 제도 덕분에
애써서 집을 사지 않아도 되는 독일
‘세입자’ 메르켈은 상직적 사례

“한국 임차인, 임대인 걱정 왜 하나”
끝없는 문제 제기와 집단적 분노가
균형 이룬 주택체제를 이끌 수 있다

이 같은 내용은 바이마르 공화국 때 법제화되며 독일 주택 정책의 근간을 이룬다. 바이마르 헌법 15조가 “모든 독일인에게 건강한 주택을 제공하며 모든 독일 가족들, 특히 다자녀 가족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주거 및 경제적 공간을 보장하고, 남용을 막도록 하고자, 토지의 분배와 사용이 국가에 의해 감시된다”이다. 1920년 주택 소유자가 새로운 임차인을 선택할 권리를 거의 박탈하는 ‘주택부족법’, 1923년 매우 예외적인 경우라야 얻을 수 있는 법원 허가가 있어야 임차인을 퇴거시킬 수 있도록 한 ‘임차인 보호법’이 제정됐다. 저자는 “이러한 ‘주택 강제 경제’조치는, 서독의 경우 1960년대 말까지, 동독은 통일 될 때까지 지속했다”고 했다.

저자는 ‘주택을 누가 획득할 것인가’라는 관점으로 150년 독일 주택 정책 역사를 살핀다. 이 문제는 주택시장과 국가 간 역학 관계에서 결정된다. 저자는 개별 국가들의 구체적인 주택정책을 고려하는 선을 넘어 이를 ‘주택체제(Housing Regime)’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 보수주의, 사회민주주의 등 다양한 이데올로기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계급 갈등, 국민국가 건설 조합주의, 부의 재분배 등 권력 관계들과 폭넓은 관련 속에서 바라본다는 의미”라고 했다.

19세기 후반, 베를린 아파트의 75%를 차지한, ‘임대병영 아파트Mietskasernes’라고 부른 사진.

저자는 지금 독일 주택체제의 특징으로 자가 보유와 임대가 균형을 이룬다는 점을 꼽았다. 2019~2020년 통계를 보면, 자가 비율은 헝가리 91.3%, 노르웨이 80.3%, 이탈리아 72.4%, 아일랜드 68.7%, 영국 65.2%인데 독일은 50.4%. 유럽 국가 중 독일보다 낮은 나라는 스위스로 41.6%다. 다수의 독일인은 굳이 집을 사려고 하지 않는다. 제도 덕분이다.

한국에선 당연한 임대차 계약 해지는 1971년 이래 법적으로 금지됐다. 임대료 인상은 3년간 과거 임대료의 20%(도시는 15%) 이내로만 허용된다. 전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이 2005년 기준 ㎡당 임대료가 20유로(약 2만7000원)인 것으로 알려진 베를린의 한 건물 임차인으로 계속 거주하는 점도 상징적인 사례로 제시한다. 저자가 독일 유학 시절 5년간 세든 방도 월세 20만원 미만이었다.

공공성을 지금까지 유지한 건 아니다. 1990년 사회주택 건설 주체이던 공익기업에 대한 정부 지원이 철폐됐다. 부패 스캔들도 작용했다. 저자는 “현재 다시 주거난을 겪고 있는 독일의 상황에서 시곗바늘을 거꾸로 되돌이킬 수 있다면, 누구도 150년 동안 진화, 발전해온 이 주택 공공성 철폐의 순간을 빠뜨릴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독일의 주택정책사에서 한국 사회가 참고할 정책은 무엇인가? 저자는 자문하며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한다. 독일의 ‘역사적 주택체제’를 이루는 여러 요소는 150년간 누적, 진화 발전해온 결과로 만들어진 지층이기 때문이다. 한 단면을 잘라내 시공간적인 맥락이 전혀 다른 사회에 그대로 이식할 수 없다는 취지의 말이다.

저자가 이 ‘역사적 주택체제’를 두고 주목하려는 건 다음과 같다. “ ‘주택이란 무엇이라야 하는가’라는 본질적 문제 제기가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담론 문화이며, 주택이 상품이기만 하게 내버려둘 수 없다는 집단적 분노다.” 저자는 ‘주택 가격의 폭락적 손해’나 ‘주택 보유세 부담’ 등 임차인에게 미리 임대인 입장에서 생각하기를 강요하는 한국 언론 보도를 두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접근은 임차인인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맞는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을 저해한다. 주택 소유자를 연민하는 시선은 사회 전체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는 정신적 성숙에의 도달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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