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왕좌왕 '쿠바 미사일 위기' 돌아보면..바로 지금이 '핵전쟁 위기'다[책과 삶]
세르히 플로히 지음·허승철 옮김
삼인 | 463쪽 | 2만4000원
1962년 전 세계를 핵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쿠바 미사일 위기’의 씨앗은 한가로운 흑해 해변에서 잉태됐다. 1961년 10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니키타 흐루쇼프는 불가리아 바르나의 해변 공원을 산책하다 문득 ‘유레카’의 순간을 맞이했다.
흐루쇼프는 여러모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의 집권 이후 ‘피그스만 침공’(1961년 4월) 등으로 쿠바를 시시각각 위협하던 미국에 맞서 공산주의 정부를 보호해야 했다. 미국이 튀르키예(터키)에 설치한 주피터 미사일이 모스크바를 사거리에 두고 있다는 점도 신경쓰였다. 공격용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부재로 미국과의 핵무기 경쟁에서 열세에 처한 소련의 현실을 어떻게든 타개해야 한다는 압박도 컸다.
해변의 그를 스친 아이디어는 “쿠바 해안에 소련 핵 미사일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으로 느껴졌다. 이것이 극도로 위험한 핵 벼랑 끝 전술이라는 점은, 흐루쇼프 특유의 낙관적인 성격으로 쉽게 잊혔다. 혹여 핵전쟁이 날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긴 했다. 그러나 어떻게든 벗어날 길이 있다고 믿었다.
당시의 흐루쇼프는 몰랐지만, 역사는 이제 안다. 그 ‘길’은 결코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와 흐루쇼프는 좌충우돌 실수 대행진 속에서 가까스로 핵전쟁의 위기를 피했다.
<핵전쟁 위기>는 ‘핵 어리석음(Nuclear Folly)’이라는 원제가 시사하듯 케네디와 흐루쇼프를 비롯한 미·소 양측 수뇌부가 저지른 판단 실수와 오독, 오해와 자만 등 갖가지 잘못들을 여실히 드러낸 논픽션이다. 오랫동안 ‘케네디와 그 참모들의 용감한 위기 해결’이라는 말끔한 서사로 해석돼온 쿠바 미사일 위기를 한심하기 짝이 없는 ‘우왕좌왕 버전’으로 다시 썼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하버드대 역사학과 교수이자 냉전 연구의 석학으로 꼽히는 세르히 플로히가 썼다. 플로히는 최근 발굴된 소련 문서고 자료와 우크라이나 KGB 자료를 활용해 당시 크렘린의 의사 결정 과정을 비롯해 소련의 미사일 전략 동원·파견 과정을 다각적이고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플로히는 무엇보다 당시의 핵전쟁을 막아낸 것이 양측 지도자의 특출난 결단력도, 집단지성도 아닌 “핵전쟁에 대한 두려움”이었음을 강조한다. 어느새 그 두려움을 잊고, 다시금 핵전쟁을 향해 내달리는 지금의 세계를 멈춰 세우기 위해서다. 책은 과거의 교훈을 잊은 지금 우리야말로 “냉전 시대보다 더 위험하고 예측할 수 없는” “두 번째 핵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경고를 전한다.
책은 케네디 정부의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의 ‘벙 찐’ 표정으로 시작된다. 때는 1992년, 75세의 맥나마라는 아바나에서 열린 쿠바 미사일 위기 관련 학술대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1962년 소련이 무려 4만3000명의 병력을 쿠바에 배치했던 사실을 ‘처음’ 알게 된다. 그뿐이 아니다. 당시 쿠바에는 미국이 우려했던 중거리탄도미사일(MRBM) 외에도 핵탄두가 장착된 미사일 9기가 설치돼 있었다는 사실 역시 처음 접한다.
냉전 시대 미·소가 서로의 전력을 꿰뚫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할리우드 영화가 부추긴 환상일 뿐이다. 1962년 미국은 쿠바에 소련의 핵탄두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고, 전력상 열세인 소련이 쉽게 굴복하리라 믿었다. 만약 미국이 계획대로 쿠바 침공을 감행했다면, 99%의 확률로 핵전쟁이 발발했을 것이다. 인류 공멸에 가까운 재난이, 황당한 정보 부족으로 일어날 뻔했다는 얘기다.
예나 지금이나 핵무기 통제권은 소수 개인의 손에 들려 있다. 세계의 나머지 사람들은 이들의 지도력과 정치력, 올바른 판단, 과감함에 의존한다. 책은 1962년의 위기를 세밀하게 복원하며 이렇게 묻는다. 이래도 괜찮은가? 정말?
1962년 10월15일, 미국이 모르는 사이 쿠바에 배치된 소련 MRBM 사진을 건네받은 케네디의 반응을 떠올려보자. 그는 “빌어먹을 거짓말쟁이” “비열한 깡패” 등 흐루쇼프를 향한 분노를 토해냈지만 정작 그의 의도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 본토를 사거리에 두는 ICBM을 개발하지 못한 소련은 차선책으로 쿠바에 MRBM을 배치했다. 그에 앞선 1958년 미국이 튀르키예에 주피터 MRBM을 배치하면서 품은 속내와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케네디는 그 의중을 알아채지 못했다. 당시 소련이 주로 거론하던 서베를린 문제가 갈등의 핵심이라 오판해 오랫동안 협상을 제대로 이끌지 못했다. 외교적 방법 대신 케네디와 참모들이 검토한 것은 쿠바 선제 공습이었다. 소련의 탄도미사일이 이미 전투태세를 갖춰, 공습은 곧 핵전쟁으로 번지게 된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로 말이다. 다행히도 케네디는 공습에 앞서 해상 봉쇄를 먼저 결정했다.
안일한 건 흐루쇼프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주피터 미사일을 생각했다. 당시 소련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처럼, 미국도 쿠바의 미사일을 받아들일 것이라 믿었다. 전쟁은 없을 것이며, 외교로 갈등을 풀 수 있으리라 낙관했다. 물론 오판이었다.
10월23일 카리브해에서는 소련 선박과 미국 항공기가 대치하는 “눈싸움(eyeball to eyeball)”이 벌어졌다. 케네디는 고심 끝에 선박에 대한 격침을 결정했으나, 때마침 배들이 방향을 틀어 쿠바를 떠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다. 참모 중 한 명이 “저쪽에서 먼저 눈을 깜박거린 것 같군”이라고 속삭였고, 격침 명령은 취소됐다.
그런데 여기 우스운 뒷얘기가 있다. 소련의 선박들이 진로를 바꿔 되돌아간 것은 24시간도 더 지난 일이었다. 시대적 한계로 정보 전달이 느린 탓에, 케네디는 불완전한 정보에 휘둘리고 있었다. 저자는 “그들은 상대의 눈동자는커녕 눈언저리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면서 “기만과 상호 의심의 어두운 방은 믿을 만하고 시의적절한 정보 부족으로 더욱 어두워졌다”고 당시 상황을 냉소한다.
전쟁의 기운은 한없이 고조됐다. 미국의 쿠바 침공은 기정사실화돼가고, 뒤늦게나마 핵전쟁의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흐루쇼프와 케네디가 서둘러 편지를 주고받는 동안, 병사들은 이 같은 상황을 모른 채 전쟁 준비에 한창이었다. 미·소 수뇌부는 군사력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가고 있었다. 10월27일 쿠바 상공에 있던 미국 정찰기 U-2를 소련군이 지대공미사일로 격추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케네디는 소련 미사일 기지를 제거하기로 결정했다는 최후통첩이나 다름없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다음날인 28일 일요일, 잘 알려진 대로 전쟁은 가까스로 저지됐다. 워싱턴 시간으로 이날 오전 9시, 케네디의 TV 연설이 예정돼 있다는 첩보를 접한 흐루쇼프는 이를 공격 개시로 예감하고 부랴부랴 케네디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라디오로 송출했다. 쿠바에 배치된 미사일을 즉각 제거하고 철수 과정에서 유엔의 감시를 받겠다는 내용으로, 케네디의 제안을 모두 수용한 것이었다. 책은 여기서 또 한번의 우스운 오해를 소개하는데, 이날 오전 9시에 예정된 것은 케네디 연설의 재방송이었다는 사실이다. 미국 수뇌부 대부분은 교회에서 흐루쇼프의 메시지를 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날을 기점으로 케네디를 ‘승자’, 흐루쇼프를 ‘패자’로 기억한다. 그러나 사실 이날 흐루쇼프의 선언 배경에는 쿠바에 대한 침공 금지와 튀르키예의 MRBM 제거를 약속한 케네디의 공작이 있었다. 훗날 역사는 누구의 승리를 선언할까? 케네디와 흐루쇼프,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치 무대에서 사라졌다. 케네디는 1963년 암살당했고, 흐루쇼프는 1964년 부하들에 의해 권좌에서 제거됐다.
저자는 책의 머리말과 에필로그에서 2019년 8월2일, 미국과 러시아가 1987년 서명한 중거리핵전력조약 탈퇴를 선언했음을 강조한다. 냉전 시대 마지막 무기 통제 합의가 사라지면서, 저자의 말처럼 “이제 우리는 공식적으로 규제 없는 핵무기 경쟁이 시작되는 시점에 있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핵무기 사용 가능성이 거론되고, 북한의 핵전력이 나날이 위협적으로 변해가는 상황 속에서 저자가 복원한 1962년의 상황은 섬뜩한 현실처럼 느껴진다.
책의 제목인 ‘핵전쟁 위기’는 1962년이 아닌 2022년을 가리키는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시민으로서 우리는 핵무기 역사와 핵무기가 제기한 위험에 대해 다시 공부해야 한다”며 “그래야 새로운 군비 통제가 협상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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