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팬덤을 이식받은 중국 민족주의 네티즌 '소분홍'..그들의 최애 아이돌은 '국가'[책과 삶]
아이돌이 된 국가
류하이룽 편저·김태연 외 2인 옮김 | 갈무리 | 320쪽 | 2만원
2015년 11월, 아이돌 그룹 트와이스의 멤버 쯔위가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출연해 대만과 한국 국기를 함께 흔들었다. 한 중국 가수가 자신의 웨이보에 ‘대만 독립 분자로 의심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중국 누리꾼’들은 분노했다. 한국 연예인들의 중국 방송 출연이 줄줄이 취소됐고, 트와이스뿐 아니라 한국 아이돌에 대한 보이콧도 이어졌다. 대만 독립파 지도자인 차이잉원이 당선되자 불길은 더욱 커졌다. 인터넷 커뮤니티 ‘디바’를 중심으로 모인 중국의 누리꾼들은 ‘출정’을 기획했다. 차이잉원을 비롯한 친독립 성향 언론사들의 페이스북을 습격했다.
<아이돌이 된 국가>는 이른바 ‘디바 출정’으로 불린 이 사건에 참여하는 등 인터넷에서 중국 민족주의 운동을 펼치는 중국 누리꾼들을 분석한 책이다. 1990년대부터 등장한 분노청년, 우마오당 등 중국 누리꾼의 민족주의적 색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저자들은 오늘날 활동하는 ‘소분홍’(小粉紅)은 이전 세대의 활동과 다른 양상을 띤다고 말한다. 궈샤오안 충칭대 언론학부 교수, 리훙메이 마이애미대 전략커뮤니케이션 전공 부교수, 리스민 베이징인쇄학원 조교수 등 학자 11명이 쓰고 류하이룽 중국 인민대 언론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가 엮었다.
류하이룽 교수는 “국가는 더는 경애하는 부모 혹은 숭고한 대상이 아닌 평등한 관계 속에서 이들의 지지와 사랑을 필요로 하는 아이돌로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2011년 중국에서 유행한 웹툰 <그해, 그 토끼, 그 일들>이 중국을 귀여운 토끼로 묘사한 것을 예로 든다. 이전의 예술 작품에서 중국을 형상화한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홍콩 송환법 반대 운동에 반대하는 ‘출정’에서는 ‘아중(중국을 의미함) 오빠 파이팅’을 구호로 내세우기도 했다. 저자들은 이전의 누리꾼들이 ‘분노’를 동력으로 전쟁에 참여했다면 소분홍은 ‘재미’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고 본다.
의견을 개진하는 방식과 속도도 완전히 바뀌었다. ‘까르푸 불매운동’ 등을 전개한 1990~2000년대 중국의 누리꾼들은 외교관계에서 마찰을 겪을 때 인터넷에서 상대 국가를 비난하고, 오프라인 시위와 결합해 민족주의 이슈에 적극 개입했다. 그러나 ‘디바 출정’ 때 ‘소분홍’이 채팅방을 열고, 이모티콘을 만들고, 규칙과 방식을 공유해 대만 인사들의 SNS를 공격하는 데는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밀레니얼 세대인 소분홍은 디지털 네이티브로서, 온라인 게임과 팬 커뮤니티 등을 통해 디지털 문화가 몸에 깊숙이 밴 세대다.
이들은 어디서 왔을까. 소분홍은 젊은 여성 유저가 많은 웹소설 사이트 ‘진장문학성’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TV 드라마로도 제작된 웹소설 <보보경심>이 탄생한 이곳의 자유게시판 배경색은 분홍색이다. 자유게시판에서 민족주의적 게시물을 올려 비난받던 이들이 독립해 다른 커뮤니티를 만들었고, 이 커뮤니티가 포털사이트 바이두의 인터넷 커뮤니티 ‘디바’와 합쳐지면서 소분홍이 알려지고, 널리 활동하게 되었다는 것이 다수의 해석이다.
책은 이들 개개인을 만난다. 디바 출정에 참가한 이들의 SNS를 추적하고, 대면과 온라인으로 인터뷰한다. ‘디바 출정’ 이전에 참가자들의 SNS는 정치적인 것과 전혀 관련이 없었으며, 대중문화와 스타에 대한 토론으로 가득했다. 리더의 계정은 게임과 온라인 소설 관련 계정이었다. 책은 이들이 한국 아이돌 팬덤이 활동하는 방식을 ‘이식받았다’는 분석을 도출해냈다. 한국 대중문화를 소비하며 기존의 한국 팬들이 다른 팬덤과 경쟁하거나 스캔들에 대처하는 방식 등을 보고 체득하는 한편 VPN 우회 접속을 통해 다른 나라 사이트에 접속하는 법, 번역기 활용법 등 해외 팬으로서의 기술도 익혔다는 것이다.
소분홍이 이토록 활개를 치는 배경에는 정치권의 인정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중국에서 다른 형태의 대중 시위는 제압당할 가능성이 높지만 민족주의 시위만은 가능하다”며 중국 정부의 인터넷 규제가 극심해진 와중에 소분홍만이 활발하게 뭉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한다.
책은 ‘중국 누리꾼’ 정도로 타자화됐던 이들의 동기와 양식을 깊이 들여다본다. 단순히 ‘요즘 애들’로 치부하거나 인터넷에 빠져 사는 ‘키보드 워리어’ 정도로 취급하지 않는다. 자세히 보니 닮은 점이 더 많다. 영웅주의에 취해 반대 세력을 조직적으로 공격하는 이들이나 이를 묵인 혹은 이용하는 정치권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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