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정은혜, 그의 그림은 외로움이 아닌 사람 속에서 자랐다[플랫]
“안녕하세요. 은혜 왔어요~” “대배우님 오셨네!”
정은혜씨가 지난달 20일 경기 양평군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일터’ 사무실에 도착하자 사무실이 떠들썩해진다. 함께 그림을 그리는 장애인 동료들, 어머니 장차현실씨, 보조강사들이 그를 반긴다. 정씨와 11명의 발달장애인 동료들이 이곳에서 함께 그림을 그린다. 정해진 시간에 그림을 그리고 월급을 받는 직장이다.
정씨 자리는 가장 안쪽에 있다. 아크릴 물감과 붓, 연필로 책상이 빼곡하다. 좋아하는 노래 가사를 옮겨적은 노트, 어머니와 함께 적은 동시집이 쌓여있다. 책상 한편에는 얼마 전 출연한 tvN <우리들의 블루스> 대본이 놓여있다. 그가 맡은 역인 ‘영희’의 이름이 적혀있다. 그는 해녀 영옥(한지민)의 발달장애인 쌍둥이 언니 역을 맡았다.
정씨는 텀블러와 어젯밤 집에서 그린 작품을 꺼내 놓는다. 그는 출근을 좋아하는 드문 직장인이다. 그는 “동료들과 같이 그림 그리면서, 좋다”며 “제가 여기 들어오면 동료들이 좋아한다. 신이 나고. ‘은혜 작가님 오셨다~’ 하면서. 절 좋아하니까”라고 말했다. 자신을 반기는 동료들을 따라하며 손을 양 옆으로 쭉 뻗어보였다.
그렇게나 좋아하는 사무실이지만 요즘은 자주 못 온다. 스타가 됐기 때문이다. 그는 “피곤하다. 길에서도 알아본다. ‘<우리들의 블루스>다!’ 그런다. 막 사진도 찍고, 사인도 받으려 하고, 그렇다”며 “근데 괜찮다. 저는 뭐 많이 자니까”라고 했다. <우리들의 블루스> 인기에 더해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니얼굴>은 6월 23일 개봉했다. 인터뷰 일정이 빽빽하지만 그는 담담하다.
<니얼굴>은 그림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정씨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양평 문호리 리버마켓에서 정씨는 2000명 가까운 사람들의 캐리커처를 그렸다. 정씨의 아버지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서동일씨가 연출을, 어머니 장차씨가 프로듀서를 맡았다. 서씨는 지난 14일 영화 시사 뒤에 이어진 기자간담회에서 “은혜씨가 가진 담담함, 위트, 자존감, 매력을 녹여내서 관객이 영화를 보고 기분 좋게 나올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며 “은혜씨의 주체적인 모습이 잘 드러나게 편집했다”고 했다.
그는 “다운증후군이 특징적인 외모, 표정이나 말투, 행동이 예전에는 이상하고 낯설게 보이고, 사람들이 은혜씨에게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은혜씨도 그 불편한 시선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다”며 “<우리들의 블루스> 출연 이후 은혜씨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지만 그의 표정과 말투를 사랑스럽고, 귀엽고, 매력적인 요소로 보고 계시는 것 같아 반갑고 기분이 좋다. (그동안은) 우리가 부모로서 은혜씨의 부양의무자였는데, (인기 덕에) ‘로드매니저’라는 또 다른 직책이 생겼다. 은혜씨가 저와 아내의 부양의무자가 된 것 같은 굉장히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고 했다. 정씨와 둘이 살던 장차씨는 2008년 서씨와 ‘가족식’을 올렸다.
정씨는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그림 실력이 출중한 발달장애인 영희 역으로 출연했다. 영희가 시설로 돌아간 뒤, 동생 영옥은 이렇게 독백한다. “나중에 영희에게 물었다. 너는 어쩌다 그렇게 그림을 잘 그리게 됐냐고. 영희가 말했다. 내가 보고싶을 때마다, 외로울 때마다 그림을 그리다 보니 그렇게 잘 그리게 됐다고.”
그러나 실제 정씨의 실력은 외로움 속에서 자라지 않았다. 정씨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얼굴을 보고, 껴안으며 그림을 그렸다. 어머니 장차씨는 그의 재능을 처음 발견했을 때를 기억한다. 2013년 2월27일, 그가 운영하는 화실에서였다. 장차씨는 화실을 열고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정씨가 집에서 혼자만 있으니 화실에 불러서 청소를 시켰다. 어느 날 정씨가 자기도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장차씨는 잡지 하나를 찢어서 건넸다. 정씨는 혼자 구석에서 그림을 그렸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장차씨는 결과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배운 적도 없으면서 훌륭한 그림을 그려냈다. 정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애들이 데생을 많이 하니까, 샘나죠. 샘나니까 구석이 앉아서 저도 그리게 된 거죠.”
그 후에도 정씨는 화실에서 혼자 그림을 그렸다. 장차씨는 어스름 속에 불 켜는 것도 잊어버리고 웅크린 채 그림을 그리는 정씨를 봤다. 재능을 발견했지만 여전히 외롭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정씨를 데리고 2016년, 문호리 리버마켓으로 나왔다. 사람들과 소통하길 바라는 마음에 장르도 캐리커처로 정했다. 정씨는 단번에 인기 작가가 됐다. 장차씨는 리버마켓에서 이전 삶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자신에 대한 존중, 따듯한 시선, 평등한 관계를 경험하는 정씨를 보았다.
“은혜가 손님이 없는 겨울 날, 막걸리를 한잔 마시고 몸을 흔들면서 노래를 한 적이 있어요. 그 장면이 잊히지 않아요. 눈이 막 내리는 날이었어요. 막걸리에 취해서, 모자 쓰고 장갑을 끼고 흔들흔들하는 은혜의 모습을 지울 수가 없어요. 은혜는 가족의 사랑만으로는 견딜 수 없는 나이가 됐어요. 엄마가 아무리 사랑해도, 아빠가 아무리 아껴줘도 스무살이 넘은 발달장애인은 동료들이 훨씬 중요한 존재예요. 그런 걸 실현할 수 있던 곳이 문호리 리버마켓이고요.”
주문이 쏟아져 일감이 밀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실력은 갈수록 늘었다. 정씨는 전시회도 열고 지역사회와 연계하며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장차씨는 경기도의 지원을 받아 지난해 발달장애인들의 예술 노동을 지원하는 사무실을 열어 12명의 발달장애인을 고용했다. 정씨도 그 중 한 명이다.
그는 “기존에도 장애인 일자리가 있긴 했지만 능력별, 효율별로 선별해서 하는 일자리”라며 “우리는 이분들의 예술 활동과 노동권을 향한 인식 개선 캠페인 등을 노동으로 인정하고 급여를 준다”고 설명했다. 장차씨네 부부는 언어 사용에 어려움을 겪는 발달장애인에게 비언어 예술이 세상과 소통하고 의사를 표현하는 데 가장 좋은 영역이라고 봤다. 이들의 예술이 노동으로 인정받는다면 장애인 자립의 기반이자 지역사회에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성인이 된 뒤 오랜 기간 집에서 혼자 뜨개질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는 정씨는 이제 그림으로 세상에 우뚝 섰다. 그는 그림의 모든 면면을 사랑한다. 좋아하는 색도 꼽기 어렵고, 샤프로 그리는 캐리커처도,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리는 그림도 좋단다. 개를 그리는 것도, 풍경을 그리는 것도, 사람을 그리는 것도 다 좋다. 더 좋아하는 걸 물어도 “다르죠. 다 좋아요”라고 답한다.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부르고, 시도 잘 쓰고 연기도 잘하지만 그림이 가장 좋단다. 왜냐고 물으면 “중요하니까”라고 답한다.
영화를 볼 관객들에게는 이런 말을 전했다. “많이 와주세요. 감사하고요…미워하지만, 그래도 사랑해주세요.” 영화는 지난달 23일 개봉했다. 8월23일부터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포옹’을 주제로 한 채색 그림 전시도 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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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민 기자 5km@khan.kr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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