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스토리] 신라에 터번 쓴 서역인이? '토우'로 보는 신라의 국제교류

이세영 2022. 7. 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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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재발견 ⑩ 진취적이고 개방적이었던 신라의 외교 흔적

(경주=연합뉴스) 이세영 기자 = 신라의 옛 궁궐터가 위치한 월성의 성곽 주변 연못인 해자에서 신라의 국제교류에 대해 시사하는 귀한 유적이 발견됐다. 1천600년 전쯤 것으로 보이는 터번을 쓴 서역인 모습의 흙 인형, 토우(土偶)가 그것이다.

토우는 흙으로 빚은 작은 크기(2~10cm 내외)의 인형으로서 토기 뚜껑이나 항아리 등에 장식적인 기능으로 부착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의 고대 토우는 신라지역에서 가장 많이 확인되고 있는데, 장식 목적뿐 아니라 풍요를 기원하거나 제의의 대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부터 진행돼온 월성 해자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토우는 약 30여 점인데 그중 가장 큰 관심을 끈 토우가 바로 이 '터번 쓴 서역인 토우'다.

서역인 토우는 정면을 바라보고 서 있는데 머리에는 띠와 오른쪽 팔뚝까지 내려오는 천을 덧댄 터번을 두르고 있다. 팔 부분의 소매가 좁은 카프탄(지중해 동부 사람들이 입는 셔츠 모양의 기다란 상의)을 입고 있어 기마 민족의 복식 특징을 보인다.

고대 서아시아나 당나라에서 호복(胡服)으로 불리던 소그드인(중앙아시아 소그디아나를 근거지로 하는 현재 이란계 주민)의 옷과 유사하다.

토우뿐 아니라 서역인의 모습을 한 다양한 유적 또는 서역 제품들이 왕릉에서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왕릉에 부장된 로만 글라스(로마제국에서 제작되어 삼국시대 우리나라에 유입된 유리 제품), 왕의 무덤을 지키는 서역인 모습의 무인 석상 등을 보건대, 당시 서역과의 교류는 우연이 아닌 국가적 차원에서 이뤄진 적극적인 신라 외교의 일면이라 할 수 있다.

터번 쓴 서역인 토우는 괘릉의 호인 상(8세기), 용강동 고분 출토 호인 상(7~8세기) 등보다 이른 6세기대 서역인의 형상이므로, 이 무렵부터 신라가 서역과 국제교류를 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 밖에도 월성에선 성기가 강조된 남성, 말을 탄 사람, 춤추는 사람 등의 토우 등도 출토돼 당시 신라인들의 세계관과 희로애락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춤을 추는 듯 양팔을 옆으로 쫙 펴고 있는 토우는 길고 좁은 소매와 목을 높게 감싸는 깃의 의상이 인상적이다. 긴 형태의 모자를 착용하고 있어 의식적인 행위를 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토우들은 신라인들의 주술적 의식에도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다른 문화권과는 차별화된 신라인만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신라의 국제교류 흔적을 보여주는 또 다른 유적은 아주까리(피마자) 씨앗이다. 월성에서 출토된 아주까리 씨앗은 머릿기름이나 약용, 식용 혹은 등잔용 기름 등으로 이용됐다.

중요한 사실은 이 아주까리는 그 씨앗이 한반도 자생종이 아니라 인도 및 아프리카가 원산지라는 것. 길이 9mm, 폭 7mm의 이 작은 씨앗은 아프리카에서 인도로 전해졌고, 실크로드를 거쳐 우리나라로 온 것으로 추정된다.

서역과 인적 교류뿐 아니라 물적 교류도 이뤄졌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처럼 6세기 신라에서는 다양한 국제 교류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3국 가운데 가장 늦게 고대국가 체계를 갖췄지만 3국을 통일하며 맹위를 떨친 천년왕국 신라.

그 발전의 밑바탕엔 이런 개방적이고도 진취적인 문화가 한몫한 건 아닐까.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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