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화끈한 여자들이 몰려온다

김은형 2022. 7. 1.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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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 작가 새 소설집 '여자들의 왕'
공주, 기사, 용..판타지 캐릭터 비틀기
생존·권력 위해 싸우는 여성주의 서사
"어떤 과정 거친 어떤 해피 엔딩인가"
새 소설집 <여자들의 왕>을 발표한 정보라 작가. 아작 제공

여자들의 왕
정보라 지음 l 아작 l 1만6800원

“남자를 죽이는 여자들의 이야기”. 지난 4월 소설집 <저주토끼>가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뒤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정보라 작가가 이렇게 소개했던 차기작이 <여자들의 왕>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수록작들을 보면 “남자를 죽이는 여자들의 이야기”의 구체적 의미는 “어떻게든 도망치지 않고 싸우다 죽을 결심”을 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표제작에서 ‘나’는 남자들과 싸우고 죽이기도 하지만 이는 “경멸과 조롱의 웃음”을 띠고 목숨을 위협하는 그들에게 응전을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사실 여자와 남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목 그대로 여자들의 이야기다. ‘여자들의 첫번째 왕’이 지배하는 어느 나라에 왕자비로 들어가게 된 나는 남편이 될 남자로부터 “자신의 어머니가 나를 죽일 것”이라는 경고를 반복해 듣는다. 자신의 권력이 도전받을까 경계하는 왕과 왕의 자리를 노리는 남자의 누이 간 팽팽한 권력투쟁 한복판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특히 누이는 ‘나’를 자극하고 유혹하는 등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한 계략을 짜는 데 거침없다. 작가의 말에서 저자는 “아주 농염하고 화끈한 여자들의 관능적 권력투쟁을 써보고 싶어서 시도했다”고 썼다.

작품 앞 부분에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좋아하므로”라는 구약성경 ‘사무엘상’의 일부가 적혀 있다. 작가는 성경 속 이 왕들의 성별을 여자로 바꿨다. 이처럼 전통적 이야기 속 여성과 남성의 역할 뒤집기는 3개의 연작 ‘높은 탑에 공주와’ ‘달빛 아래 기사와’ ‘사랑하는 그대와’에서도 이어진다.

공주와 기사와 용. 이 캐릭터들은 서구에서 면면히 내려온 판타지 소설의 기본 요소다. 불을 내뿜는 사악한 용이 연약한 공주를 납치해 뾰족한 탑 꼭대기에 가두고 용감한 기사는 목숨을 걸고 공주를 구출한다. 소설은 질문한다. 이야기 속 그 많은 공주들은 하나같이 연약하기만 했을까? 기사들이라고 다 정의롭기만 하겠어? 용도 나름 자기 생각이 있을 것이고 막무가내로 불만 내뿜기야 하겠느냐는 반문으로 이어진다.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에서도 용감한 공주라거나 겁 많은 용, 비겁한 기사 등 이런 전형성을 비틀어온 시도가 있었지만 이 연작 소설에서는 더 전면적이고 유머러스하다.

“구출 좋아하네.”

탑에 갇힌 공주를 찾아온 기사에게 공주는 말한다. “아아 기사님을 기다렸습니다, 라든가, 이렇게 위험한 곳까지 찾아오시다니, 라든가, 뭐 이런 종류의 대사를 기대”했던 “기사의 표정이 구겨”질 수밖에 없다. 공주가 그냥 무례한 건 아니다. “아버지랑 어머니가 각각 서로 대대손손 못 잡아먹어 안달인 두 나라의 왕자 공주 출신이라 세계 평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결혼은 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얼굴이라도 마주쳤다간 전쟁 날까 봐 서로 말도 안 하고 눈도 안 마주쳐서 도대체 애는 어떻게 낳았는지 신기할 지경인 집구석에서 태어나” 옛날이야기를 해주기는커녕 잠만 자는 유모 손에서 “이 유모 믿다간 되는 일이 없겠다는 자력갱생의 의지를” 키우며 자란 탓에 공주는 일찍부터 ‘믿을 건 나 자신’이라는 깨달음을 일찍 터득한 인물. 게다가 기사는 나쁜 왕비의 마술 또는 유혹에 넘어가 공주와의 약조를 까맣게 잊고 그를 죽이려고 했으니-그것도 두번이나-공주가 그를 믿을 수 없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공주, 기사, 용 연작 3편도 ‘여자들의 왕’처럼 결국 여자들의 이야기다. 공주는 나라 금고가 바닥나 정략결혼에 팔려가는 신세까지는 거부하지는 못했지만 왕비의 계속되는 끈질긴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한다. 둘 사이에는 우왕좌왕하다가 “옛정을 생각해서, 살려주시면 안 됩니까?” 구차하게 애원하는 기사와 “집에 안가! 공주 미워!” 소리지르며 우는 몸뚱아리만 큰 청소년 왕자가 있다. 하지만 두 남성이 납작하게만 사용되는 건 아니다. 기사와 왕자, 나쁜 왕비까지 각자의 입장에서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선택들을 작가는 재치 있게 연결한다. 공주와 철든 왕자는 “아마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라는 해피 엔딩의 규칙을 따라가면서도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종류의 해피 엔딩이 되는지”가 더 중요한 여성주의 서사다.

마지막에 실린 ‘어두운 입맞춤’은 흡혈귀 이야기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판타지이지만 지금 한국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부유한 집에서 ‘개차반’으로 살아온 30대 남성 ‘김인혁’의 사망 신고를 받은 경찰은 납득할 수 없는 부검 결과를 받아들고 혼란에 빠진다. 유력한 용의자였던 아내 ‘내’가 했다기에는 지나치게 강한 공격의 흔적들과 몸 속에 거의 안 남은 혈액 등 의문투성이다. 경찰은 사건 직후 사라진 운전기사 ‘온’과 ‘나’의 관계를 의심하며 온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와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내 멋대로 적당히 섞어서 만들었다”는 작가의 말대로 온은 오갈 데 없고 추한 외모의 소유자이며 김인혁에게 폭력을 당하지만 같은 처지의 ‘나’를 연민한다. 반전은 ‘내’가 흡혈귀라는 것. 김인혁의 목을 물고 나서 그의 아내가 된 나는 그가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감상’한다. 남편이 온이나 ‘나’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현장은 ‘나’에게는 피냄새가 진동하는 짜릿한 순간이다. 작가는 현실을 배경으로 가져온 만큼 칼을 들고 맞서 싸우는 여성 캐릭터를 가져다 놓지는 않았지만 대신 이 모든 장면들을 설계하고 지켜보는 여성(흡혈귀)을 통해 가부장제의 권력구도를 전복한다.

이 밖에 중앙아시아 사막을 배경으로 동서양의 다른 종교와 문화가 갈등하지 않고 아름답게 만나는 서정적 이야기 ‘사막의 빛’, 작가가 석사과정에서 공부했던 동슬라브 역사 ‘원초연대기’의 유일한 여성 군사령관 올가 이야기를 한국의 나이 들고 강인한 여성들과 교차시키는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가 담겼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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