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 아들의 귀환'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 취임
21년 집권 끝에 민중혁명으로 축출된 필리핀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인 마르코스 주니어(64)가 30일(현지시간) 17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필리핀은 국민의 힘 혁명 36년 만에 다시 마르코스 가문의 통치를 받게 됐다.
AFP, AP통신 등에 따르면 취임식은 마닐라 국립박물관 계단에서 열렸다. 선친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은 “아버지는 독립 후 아무것도 없던 나라에서 큰 성과를 낸 인물”이라며 “전임자들보다 더 많은 도로를 건설하고 식량 증산을 이뤄냈다”고 말했다. 그는 “아들인 나도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편의 대통령 재직 시절 명품 구두와 보석 등을 잔뜩 사들여 ‘사치의 여왕’으로 불렸던 이멜다 여사(92)가 취임식장에서 아들의 취임을 지켜봤다. 취임식에는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의 남편 더그 엠호프와 왕치산 중국 국가 부주석이 취임식에 참석했다.
취임식장 밖에서는 아버지 마르코스의 계엄령 시대를 겪었던 희생자들과 운동가들은 항의 시위를 벌였다. 취임식이 열린 베이사이드 관광 지구에는 폭동 진압 부대, 경찰특공대, 저격수 등 경찰과 군인 1만5000명이 보안을 위해 배치됐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지난달 9일 치른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 차로 경쟁자인 레니 로브레도 전 부통령(57)을 누르고 당선됐다. 6년 동안 필리핀을 통치했던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딸 사라 두테르테(44)도 부통령에 당선됐다.
아버지 마르코스는 1965~1986년 21년 동안 집권하며 인권 탄압으로 악명을 떨쳤다. 필리핀은 6·25전쟁 특수를 발판 삼아 1960년대 동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잘사는 나라였고 아버지 마르코스는 필리핀 현대 역사상 처음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재선 이후 독재자의 길을 걸었다. 1972년 계엄령을 선포한 뒤로 야당과 소수민족, 무슬림 등 반대파 수천 명을 체포돼 고문, 살해했다. 아버지 마르코스는 1986년 국민의 힘 혁명으로 축출돼 3년 뒤 하와이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사망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선거 기간 아버지 시대 초반기의 고도성장을 부각했다. 인권유린 등은 반대파의 거짓말로 몰아붙였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당선 후 인터뷰에서 ‘SNS트롤’로 불리는 이들을 고용해 온라인에서 여론전을 펼친 것이 사실이라며 “주류 언론이 나의 이야기를 다루지 않았고, 심지어 독립 매체 래플러는 항상 나를 공격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마르코스 대통령 앞에는 험난한 과제가 놓여 있다. 필리핀은 코로나19로 관광객이 끊기면서 심각한 불황에 빠졌다. 실업, 빈곤, 불평등이 악화했으며 올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전 세계적 물가 상승과 맞물려 식량 부족에 대한 두려움도 촉발됐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지난주 자신이 농업장관을 겸해 식량 가격 급등 사태에 대비하겠다고 밝혔다.
필리핀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분열돼 있다. 마르코스 대통령의 당선 자체도 분열을 부추기고 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아버지 시절의 인권유린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 시절에 구금돼 고문을 당했다고 한 70세 시민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면서 “나와 같은 계엄 치하의 피해자들에게 이것은 한마디로 악몽”이라고 AFP통신에 전했다. 무슬림과 공산주의자들의 반란과 만연한 범죄, 폭력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마르코스 가문의 재산 환수 작업이 제대로 이뤄질지 관심거리이다. 1986년 설립된 대통령 직속 바른정부위원회(PCGG)는 지금까지 마르코스 일가를 상대로 1710억 페소(4조원)를 환수했고, 현재 추가로 1250억 페소(3조원)를 되돌려받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벌인 ‘마약과의 전쟁’도 역사적 짐으로 물려받았다. 국제형사재판소는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범죄 행위를 조사하고 있는데 마르코스 대통령이 여기에 협조할 경우 부통령인 사라 두테르테와의 갈등이 불가피하다.
대외환경도 녹록지 않다. 필리핀을 포함한 남중국해 일대는 미·중 갈등의 첨예한 전장이 됐다. 친중 노선을 펼쳤던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필리핀 배타적경제수역(EEZ) 내 암초에 중국어선 수백 척이 정박했을 때에도 중국에 강경한 태도를 보이지 않아 비난 여론이 일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친중 정책 기조를 이어가면서도 미국과의 전통적인 동맹 관계를 유지하는 실리 외교 노선을 걸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이날 취임 선서를 마친 후 “나를 위해 모두 기도해 달라. 대통령이 잘돼야 나라가 잘될 것”이라고 말하며 아무 질문도 받지 않았다고 AP통신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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