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수의마음치유] 슬픔에 잠길 자유

2022. 6. 30.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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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동안 사연을 듣고 났더니 '우울할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지켜보다가 증상이 나빠지면 그때 약을 처방해 드릴게요"라고 했더니 그녀는 "지금 제가 슬픔에 빠져 있을 상황이 못 돼요. 항우울제라도 먹고 빨리 활기를 되찾아서 더 열심히 일해야 해요"라고 말했다.

슬픔에 푹 잠길 자유마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항우울제를 찾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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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혼자 오지 않고 언제나 지혜 품고 와
우울은 삶의 목적·의미 재정비하라는 신호
한참 동안 사연을 듣고 났더니 ‘우울할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생 아들은 학교를 무단결석하고 늦은 밤까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데 도대체 무얼 하고 오는지 알 수 없어 불안에 떨며 잠을 못 이뤘다.

각방 쓰는 남편에게 아들 문제를 상의하면 “그냥 내버려 둬”라고 단칼에 잘라버리니 말 꺼내기도 싫었다. 몇 년째 부부 사이에 대화다운 대화도 없었다.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서 나름 잘나가는 직장인이었는데 마흔을 훌쩍 넘긴 지금은 하루 종일 집안일만 하는 자신이 초라해서 거울 보기도 싫다고 했다. 아들이 저렇게 된 게 다 자기 탓이라며 울었다. 도통 입맛이 없고 의욕도 사라졌다. 자기 인생은 실패작이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녀가 호소하는 고통을 하나하나 따져 보면 우울장애라고 진단 내리기에 충분했다. 그렇다고 “당신은 우울증에 걸렸어요. 항우울제를 먹어야 해요”라고 해버리면 그녀가 처한 상황을 너무 쉽게 질병화해버린다고 느낄 수 있으니 진단과 치료에 대해 말하기가 조심스러웠다. 그녀에게 건넨 내 이야기는 이랬다. “엄마라는 섬이 있고, 아들이라는 섬이 있는 데 둘 사이를 이어줄 다리가 필요해요. 그런데 엄마 섬의 땅이 너무 물러서 지금은 다리를 놓을 수가 없어요. 땅이 단단히 굳을 때까지만 약을 드시면 좋겠어요.”

이십대 후반의 직장인 여성이 우울하다며 찾아왔다. “한 달 전에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힘들었는데 며칠 전에는 내 실적이 기대에 못 미친다며 직장상사에게 질책까지 들었어요.” 기운이 없고 기분도 저조했지만 겉으로 보면 평소와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지켜보다가 증상이 나빠지면 그때 약을 처방해 드릴게요”라고 했더니 그녀는 “지금 제가 슬픔에 빠져 있을 상황이 못 돼요. 항우울제라도 먹고 빨리 활기를 되찾아서 더 열심히 일해야 해요”라고 말했다.

우울장애라고 판단하려면 진단 매뉴얼에 기술된 9가지 우울 증상 중 적어도 5개가 2주 이상 지속되어야 한다. 정상적 슬픔과 병리적 우울을 구분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 기준이 약을 꼭 먹어야 하는지, 저절로 치유될 가능성은 없는지, 그냥 내버려두면 마음에 후유증이 남을지를 정확히 예측해주지 못할 때가 적지 않다.

낮은 용량의 항우울제를 처방하고 삼사 주쯤 지났을 무렵 다시 찾아온 그녀는 “그동안 설거지 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지금은 한결 가뿐해졌어요”라고 했다. 플라세보 효과였을까?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치유된 것일까? 어쩌면 약을 먹어야 할 정도로 증상이 심했는데 의사인 내가 그녀의 고통을 처음에는 충분히 살피지 못한 채 과소평가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심적 고통이 크다고 해서 그것을 질병의 징후로 단정해서도 안 된다.

괴롭기는 해도 슬픔에 젖어 있을 시간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우울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재정비하라고 촉구한다. 고통은 혼자 오지 않고 그 안에 언제나 지혜를 품고 온다. 마음의 바탕이 단단히 다져지기 위해서는 슬픔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마냥 늪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다. 의욕이 떨어져도 돈 벌기 위해 출근해야 하고, 슬퍼도 설거지는 해야 하며, 기운 없어도 가족을 위해 밥을 지어야 한다. 슬픔에 푹 잠길 자유마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항우울제를 찾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김병수 정신건강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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