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도 위안부 뮤지엄·아카이브 만들자던 '소망' 이어갈게요"

한겨레 입력 2022. 6. 30. 21:00 수정 2022. 7. 1.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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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가신이의 발자취] 고 이동우 워싱턴 정신대대책위 초대 회장 영전에
지난 2019년 10월 미국 워싱턴디시에서 제막한 ‘평화의 소녀상’과 함께 선 고 이동우 초대회장. 워싱턴정신대대책위 제공

지난 봄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친정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러 잠시 귀국한 사이 또 한번 가슴 아픈 소식을 들어야 했다. 14 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을 동지로 함께 풀뿌리 운동을 해왔던 고 이동우 선배님이 하늘나라로 이사를 하셨다. 몸이 불편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왔기에, 미국 돌아가면 플로리다주 탬 파 자택으로 찾아뵈려 했는데 시간은 나의 편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선배님을 만난 것은 2019 년 10월 워싱턴의 한인타운 애넌데일에서 ‘평화의 소녀상’ 제막 기념식을 열었을 때였다. 많은 후배 운동가들을 대견해 하시며, 지팡이를 집고 축사를 하시던 모습이 생생하 다. 2017 년에는 선배님이 자신의 활동 기록들을 모아놓은 ‘ 미니 아카이브’( 그렇게 부르셨다) 를 보러 자택으로 갔 었다. 그때만해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인터뷰 테이프 등을 정리해 제대로 된 영상물을 만들겠다는 열정의 의지를 보여주셨다.

이 선배님의 활동은 개인사를 넘어 미주 한인 사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선배님이 사비를 들여 창립한 ‘워싱턴 정신대 대책위원회’는 미 전역에 퍼져있는 한인 동포들이 협력해서 이뤄 낸 최초의 성공적인 시민 운동으로서 중대한 역사적 의미가 있 다.

이 선배님은 세 자녀의 어머니로서 가정도 소중하게 일구시고, 이민 1 세대로서 유리 천장을 뚫고 월드뱅크(세계은행)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교회의 장로로서 사역에도 헌신하셨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의미있는 헌신은 환갑 직접 뛰어든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안정된 노후 연금을 기꺼이 포기한 채, 세계은행을 조기 은퇴해 그 퇴직금을 위안부 문제 해결에 쏟았다.

1992년 8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인권소위원회에 참석한 황금주(왼쪽) 할머니와 이효재(오른쪽) 정대협 공동대표. 황 할머니는 그해 11월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일본의 위안부 만행’을 증언했다. 사진 정의기억연대 제공

미국의 위안부 인권 운동은 1992년 11월 황금주(1922~2013) 할머니의 미국 방문에서 비롯되었다. 황 할머니는 워싱턴 한인감리교회에서 열린 ‘증언의 밤’에 나섰고, 이 증언이 <팍스5 뉴스>에서 방영됨에 따라, 위안부 역사는 선배님의 표현대로 “폭탄처럼” 워싱턴 지역을 강타했다.

그때 황 할머니의 방문은 한인감리교회 여전도회와 정의기억연대(옛 정대협) 창립 대표인 이화여대 이효재·윤정옥 교수의 제자들이 주도했다. 1920~30년대 이화학당에서 뿌린 여성권리에 대한 자각의 씨앗이 태평양 건너에서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셈이었다. 황 할머니의 증언 한달 뒤인 그해 12월12일 한인 동포들이 워싱턴 정신대문제 대책위원회(이하 정대위·WCCW)를 창립했고, 미 연방정부에 비영리 단체로 등록했다. 창립회원들은 여성으로서 영어와 한국어 그리고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이동우 선배를 초대 회장으로 추대했다.

1993년 미국 워싱턴 정신대 대책위 이동우(앞줄 왼쪽 둘째) 초대회장과 한인 회원들이 백악관 앞에서 일본의 위안부 범죄를 고발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워싱턴정신대대책위 제공

선배님은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되면서, 1950 년대 한국에서 보고 듣고 자란, 일제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 만이 지닐 수 있는 절실한 부름 같은 것을 느끼셨다고 했다. 한국의 가부장적인 사회 불평등과 일본 제국주의·식민주의· 군국주의의 편견은, 미국 내 유색인종 이민자들이 격어온 차별과 억울함과 겹쳐 더 공감이 됐던 것이다.

이동우 초대 회장의 첫번째 사명은 위안부 문제를 미국 사회에 널리 알리는 일이었다. 그것도 영향력있는 사람들, 일본 정부에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 즉 연방 의원과 법무부·국무부 등 의 관료들에게 이 역사를 알리는 것이었다. 풀뿌리 운동의 방법으로 알려진 모든 수단들, 즉 국회의원들에게 편지쓰기, 방문하기, 포럼이나 전시 기획하기, 대규모 시위와 집회 조직하기, 출판하기, 기자회견 등 을 통해서 유권자로서 권리 행사를 하고자 주동했다. 피해자 할머니들을 초청해서 전 미국 순회 증언회를 하 고, 인터뷰 비디오, 책자, 아카이브 자료 개발도 했 다. 법무부의 전범 조사 대표인 일라이 로젠바움은 정대위 제출 자료를 근거로 16 명의 일본 전쟁 범죄자를 지명하고 미국 입국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지난 2000년 미국 연방의회에서 인권상을 수상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앞줄 맨오른쪽부터 이용수·황금주·김상희·김은례 할머니, 뒷줄 왼쪽 둘째 이동우 초대회장, 한 사람 건너 김순덕 할머니 등이다. 워싱턴정신대대책위 제공

무엇보다 큰 성과는 2007 년 미하원에서 ‘ 위안부 결의안 121’ 이 통과된 것이다. 위안부 결의안은 1992년부터 15 년간의 풀뿌리 운동의 결과이고, 정대위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응집된 성과였 다. 그 결실 의 첫 씨앗을 뿌린 이를 감히 이동우 초대 회장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피해자 할머니들의 용기와 큰 결단이 선행되었고, 정의기억연대 등 한국 위안부 운동의 깃발을 든 이들이 있었다.

이제는 미국을 넘어 국제사회로 확산된 위안부 문제는 인권 운동이자 여권 운동이고,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와 평등한 사회를 향한 염원에서 나온 운동이다. 미국에서 외친 위안부 운동의 역사는 새로운 장을 열었고 각양 각색의 모습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 누군가 시작했기에 가능했던 일이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기대해본다.

지난 6월 16일(현지시각)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한인연합감리교회에서 고 이동우 초대회장의 장례식이 열렸다. (故 이동우 장로 천국환송예배 - YouTube) 사진 이인홍 목사 제공

2016 년 뉴욕의 홀로코스트 뮤지엄 초대를 받았을 때 선배님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함께 여행하던 기차 안에서 미국에도 위안부 뮤지엄과 아카이브를 만들어야 한다고 설파하시던 그 목소리는 그때 정대위 회장을 맡고 있던 내게 큰 사명으로 울렸다. 하지만 상근자 한명 없이 모두 자원봉사하는 우리 단체의 힘 만으로는 요원한 일이었다. 겨우 ‘ 미국 위안부 운동사’ 책을 한 권 기록할 수 있었고, 다 큐멘터리 영화 한편을 만들 수 있었다. 선배님의 소망 이고, 나의 과제였 던 그 프로젝트를 후배 운동가들이 이뤄 주기를 기대해 볼 뿐이다.

이정실/ 워싱턴 정대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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