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농담(籠談)]1964년 요코하마 프리올림픽

2022. 6. 30.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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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기의 『갈채와의 밀어』 다시 읽기㉚
▲김영기가 캐나다 주장 리치맨의 수비를 받으며 공격하고 있다. 1964 프리올림픽.

김영기가 출전한 두 번째 올림픽은 1964년에 도쿄에서 열렸다. 대한민국 남자농구 대표 팀이 참가한 세 번째 대회이기도 하다. 우리 대표팀은 1964년 9월 25일부터 10월 4일까지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프리올림픽을 거쳐 본선 무대를 밟았다. 프리올림픽에는 대한민국을 비롯해 멕시코, 호주, 캐나다, 쿠바, 필리핀, 태국, 중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지역예선을 통과하지 못한 10개국이 출전했다. 프리올림픽 참가 팀의 전적은 다음과 같다.

멕시코 8승1패
호주 8승1패
캐나다 7승2패
대한민국 5승4패
쿠바 5승4패
필리핀 4승5패
태국 3승6패
자유중국 3승6패
인도네시아 1승8패
말레이시아 1승8패

대한민국은 9월 25일 쿠바, 26일 호주, 27일 태국, 28일 캐나다, 30일 인도네시아, 10월 1일 멕시코, 2일 말레이시아, 3일 자유중국, 4일 필리핀과 잇달아 경기했다. 강행군이었다. 우리 대표 팀은 열린 쿠바와의 첫 경기에서 파란을 일으켰다. 이 승리의 의미는 엄청나게 컸다. 대한민국은 쿠바와 5승4패로 동률을 이뤘지만 승자승 원칙에 따라(당시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공방률, 즉 동률 팀 간의 골득실에서 앞서. 그러나 단판 경기를 했으므로 두 설명 모두 틀리지 않는다.) 4위를 차지해 도쿄 행 티켓을 손에 넣었던 것이다. 대체로 쿠바의 우세를 예상했지만 결과는 대한민국의 3골차(67-61) 승리. 전반을 25-32로 빼앗겼으나 후반 반격에 성공했다. 당시 신문의 보도를 비교해서 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 팀은 전반에는 25-32로 쿠바에 리드 당했으나 후반 들어서 전력을 정비, 김영기와 김인건의 콤비가 눈부신 활약을 보여 아슬아슬한 접전 끝에 전세를 완전히 만회하여 67-61로 역전, 첫 승리의 개가를 올린 것이다.” (조선일보 9월 26일자 1면)
“한국 팀은 장신의 쿠바에게 전반전을 리드 당했으나 후반에 접어들면서 올 라운드 맨투맨으로 쿠바의 공격을 저지시켜 5분 만에 38-38 타이, 28분 만에 49-48로 전세를 바꾼 후 아슬아슬한 리드를 지켜 개가를 올렸다.” (동아일보 9월 26일자 1면)

장신의 호주는 어려운 상대였다. 대한민국은 26일 요코하마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2차전에서 호주에 53-71로 져 1승1패가 됐다. 재일동포 응원단의 뜨거운 성원 속에 김영기의 활약으로 전반 10분까지 14-9로 앞섰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호주의 높이가 위력을 발휘했다. 전반 17분 24-25로 첫 역전을 허용했고, 이후 시소게임을 거듭하면서 32-33으로 뒤진 채 전반을 마쳤다. 후반 들어 우리 대표 팀에 악재가 겹쳤다. 팀의 리더인 동시에 주득점원인 김영기가 12분에, 포인트 가드 김인건이 15분에 5반칙 퇴장당한 것이다. 조직력과 외곽 슛으로 호주에 맞서던 대표 팀은 동력을 상실하고 패배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대한민국은 27일 태국을 제압했으나 28일 캐나다에 져 2승2패를 기록했다. 조선일보가 9월 29일자 5면에 비교적 자세히 두 경기의 내용을 보도했다. 태국에는 74-62로 역전승했는데, 전반은 33-40으로 뒤졌다. 후반 들어 방열의 수비력이 빛났다. 방열은 후반 8분쯤부터 태국의 패스 길을 번번이 차단해 노 마크 레이업슛으로 연결함으로써 순식간에 경기의 흐름을 뒤집었다. 주도권을 빼앗긴 태국 선수들은 거친 플레이로 맞서다 무려 7명이 5반칙으로 물러나 대세를 그르쳤다. 이 무렵 태국 선수들의 거친 플레이는 동남아시아에 명성(?)이 자자했는데, 우리 남자농구는 2년 뒤 1966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홈팀 태국의 거친 플레이 때문에 아시아 정상에 오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1970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리스트인 유희형의 회고록에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1966년 당시 유희형은 고등학생이었으므로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방콕의 코트폭력은 훗날 대한민국 농구사에 한 획을 긋는 유망청년의 기억에도 선명한 이미지로 남은 것이다. 


1966년 아시안게임 준결승에서 우리나라는 주최국 태국에 패했다. 심지어 한국의 선수, 임원, 응원단이 집단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중략) 농구 경기가 아니라 마치 격투기를 방불케 했다. 전반에는 우리나라 선수가 자제했지만, 후반에도 계속 얻어맞고 있을 수 없었다. 두 대 맞으면 한 대 때렸다.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고 경기가 중단되었다. 우리나라 선수 중 김철갑은 치아 2개가 부러졌고, 이병국은 팔뚝이 찢어져 피를 흘렸다. 어이없는 것은 말리고 제지해야 할 경찰까지 합세하여 우리 선수단에 폭행을 가한 것이다. 이병희 대한농구협회장도 얻어맞았다. 경기 중단이 선언되었다. 당시 점수로 우리나라는 패했다. 그럼에도 태국은 우승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이 태국을 대파하며 손쉽게 우승했고, 우리나라는 일본을 꺾고 동메달을 차지했다. (유희형, 「나의 삶 나의 농구」, 점프볼 2021년 7월 5일)

캐나다와의 경기를 보도한 상보(詳報)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기사를 인용하되 맞춤법을 염두에 두고 옮기자면, “대한민국은 캐나다의 장신에 눌려 전반 7분까지 4-18로 크게 리드 당했으나 하의건이 사이드에서 점프슛을 계속 성공시켜 13분에 14-16으로 추격, 시소를 벌였다. 그러나 캐나다 팀은 장신을 이용, 공수의 리바운드를 거의 독점하면서 자신 있는 투사와 탭슛 등으로 다시 점수 차를 벌려 전반을 34-26으로 앞섰다. 후반에 들어서면서 한국 팀은 체력소모가 많은데다가 연전(連戰)의 피로까지 겹쳐 백코트가 느려지면서 캐나다 팀의 속공을 막지 못해 6분에는 35-47로 크게 뒤졌다. 한국 팀은 12분쯤 김종선과 정진봉이 리바운드를 잡아내면서 55-57, 1골 차로 쫓아가 보았으나 15분 정진봉, 17분에는 김인건이 각각 5반칙으로 퇴장까지 당해 마지막 2분을 남기고 딜레이드 플레이로 나온 캐나다 팀에 끝내 65-73으로 분루를 삼키고 말았다.”


조선일보의 보도는 우리 선수들의 득점 기록을 표로 정리해 기사에 덧붙였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다. 쿠바와의 경기를 보도할 때는 전·후반 득점과 반칙 수를 표로 정리했다. 전반-후반 득점(반칙 수)의 차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김영일 2-11(3), 김영기 13-16(3), 문현장 2-0(4), 김인건 6-5(1), 정진봉 2-4(3), 김종선 0-0(4), 김무현 0-6(2), 방열 0-0(1). 태국과의 경기에서는 김영기 23, 김종선 12, 방열 10, 김영일 4, 김인건 14, 하의건 4, 문현장 3, 김무현 4 득점을 기록했다. 캐나다와의 경기 기록은 득점과 반칙 수를 보여준다. 여기서는 괄호 안에 반칙 수를 정리하겠다. 하의건 18(5), 김영기 12(2), 김종선 3(1), 문현장 4(2), 신동파 2(0), 방열 4(1), 김인건 12(5), 김영일 2(2), 정진봉 4(5), 김무현 4(0). 특기할 일은 김영기 이후 대한민국 남자농구 최고의 스타 자리를 이어받는 신동파가 대표 팀 경기에 이름을 올려놓았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은 1964년 9월 30일에 벌어진 인도네시아와의 경기에서 103-85로 크게 이겼다. 경기는 요코하마 문화체육관에서 오후 1시30분에 시작되었다. 김영기는 이 경기에서 경기 막판 리딩 가드로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대한민국은 김영기가 첫 골을 성공시켜 리드를 잡으면서 슛 컨디션이 좋지 않은 인도네시아를 처음부터 제압, 전반 5분 만에 11-4로 앞섰다. 방심을 했는지 갑작스럽게 패스 미스가 잦아진 15분쯤엔 인도네시아의 속공에 말리면서 31-31로 이날 처음이자 마지막 동점을 허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동파와 김인건의 슛이 불을 뿜으면서 고비를 벗어났고, 전반을 45-37로 앞선 채 마쳤다. 김영기는 전반에만 4반칙을 기록해 후반에는 벤치에서 경기를 시작했다. 우리 팀은 신장 면에서 인도네시아를 압도했기에 센터 김영일이 골밑에서 많은 득점 기회를 만들었다. 후반 12분, 점수 차는 79-63으로 벌어졌다. 13분쯤 포인트가드 김인건이 5반칙으로 물러나자 김영기가 1번 자리에 투입됐다. 김영기 25(4), 신동파 15(3), 김종선 2(4), 김무현 8(3), 김인건 12(5), 방열 3(0), 정진봉 0(1), 하의건 14(1), 김영일 20(1), 문현장 0(1), 이병구 2(1), 김승규 2(1).

대한민국은 10월 1일 요코하마에서 멕시코에게 역사에 길이 남을 역전패를 당한다. 요즘 흔한 표현대로라면 버저비터를 맞고 무너진 것이다. 75-76. 다 이긴 줄 알았지만 역시 승부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것이다. 우리 팀은 전반을 38-30으로 앞섰다. 멕시코는 우리의 1-3-1 지역수비를 깨뜨리지 못했고, 외곽슛으로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멕시코의 공격 실패는 대한민국의 속공으로 이어졌다. 후반 11분 김영기와 김영일이 5반칙 퇴장당할 때까지 한국은 60-46으로 리드했다. 주포와 골밑의 기둥을 잃은 뒤에도 김인건-신동파의 슛이 잇달아 터졌다. 16분쯤 스코어는 71-60. 멕시코는 이때부터 전면 강압수비로 승부를 걸었다. 한국은 상대의 파울로 자유투를 많이 얻었으나 불행히도 성공률이 낮았다. 포워드 문현장이 75-73으로 쫓긴 경기 종료 30초 전과 75-74로 앞선 종료 8초 전 얻어낸 자유투를 모두 실패했다.

 

 

▲우리 대표 팀의 본선 진출을 알리는 동아일보의 호외.

결승점이 터지는 장면은 기록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다. 동아일보는 1964년 10월 1일자 1면에 “최후 순간까지 경기를 리드했으나 마지막 2초를 남기고 전세를 역전당해 75-76, 1포인트 차로 승리의 문전에서 안타까운 고배를 들었다.”라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10월 2일자 3면에서 “버저 소리와 함께 멕시코 팀의 필드 골이 극적으로 성공함으로써 완전히 이겼던 게임을 통분하게 놓치고 말았다.”고 설명했다. 김영기는 다르게 기억했다. 대한민국은 77-76으로 앞서고 있었고, 타임아웃을 알리는 버저가 울렸으며 우리 팀 벤치와 재일동포 응원단은 만세를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멕시코의 ‘8번 선수’가 훅 슛을 날렸는데 공이 날아가는 궤적을 바라보는 우리 선수들은 직감적으로 노골을 예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은 림 위를 맴돌다가 그물을 휘감으며 떨어져 내렸다. 김영기는 『갈채와의 밀어』에 한국이 77-78로 졌다고 기록했다. 필자는 김영기가 스코어를 잘못 기억했지만 경기의 내용과 역전의 순간은 정확하게 표현했다고 판단한다.

대한민국 선수들은 모두 코트 바닥에 주저앉았다. 우루과이 심판이 골을 선언하려는 순간, 심판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 선수가 있었다. 방열이었다. 그는 높이 올린 두 손을 꽉 붙잡고 심판을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흐느끼며 울부짖었다. “안 돼요! 안 돼요!” 우리말을 모르는 심판도 딱한 표정을 지었다. 희비가 교차하는 코트 한가운데서 우루과이 심판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방열의 몸부림은 대한민국 선수단과 응원단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다음 경기의 운영을 맡은 헝가리 심판이 방열을 달래기 위해 다가갔다. 방열은 그 심판마저 끌어안았다. 대한민국 선수단이 퇴장할 때, 김영기의 눈에 끝까지 관중석을 지키는 한 여인이 들어왔다. 재일동포 여성의 곱게 화장한 얼굴은 눈물로 뒤범벅돼 있었다. 이 패배로 대한민국은 3승3패를 기록, 본선 진출을 장담하기 어려운 처지가 됐다. 김영기 18(5), 하의건 12(3), 신동파 17(3), 김영일 14(5), 김종선 3(2), 문현장 0(0), 김무현 2(0), 방열 3(0), 김인건 6(5).

말레이시아는 쉽게 이겼다. 10월 2일 열린 경기에서 118-80으로 승리, 4승3패로 쿠바와 동률을 이뤘다. 쿠바와 대한민국이 도쿄로 가는 마지막 티켓 한 장을 겨루는 형국이었다. 김영기 29(0), 신동파 24(0), 하의건 0(4), 이병구 2(0), 김종선 14(2), 문현장 1(1), 김무현 4(4), 방열 1(1), 김인건 10(2), 김영일 14(4), 정진봉 19(2). 3일에는 자유중국을 93-71로 격파했다. 5승3패. 쿠바도 태국을 83-56으로 누르고 한국과 승패를 맞췄다. 김영기 28(0), 하의건 15(2), 김무현 2(1), 신동파 16(3), 방열 2(0), 김인건 10(3), 김영일 20(1), 김종선 0(1). 10월 4일, 우리 대표 팀은 오랜 라이벌 필리핀에 58-90으로 참패했다. 한국의 패배는 먼저 열린 경기에서 쿠바가 캐나다에 63-72로 져 본선진출을 확정한 이후여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데 원인이 있다. 동아일보는 1964년 10월 5일자로 호외를 발행해 대한민국의 올림픽 본선 진출을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10월 6일자 5면 머리기사로 보도하면서 우리 선수들의 득점과 반칙 수는 보도하지 않았다.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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