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이대암은 한국에선 왜 상을 못받았을까?

조성관 작가 2022. 6. 3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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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소니언 천체물리관측소에서 수여한 '에드가 윌슨 상'을 들고 있는 이대암 박사. 조성관 작가 제공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1960년대 후반 충남 대전. 까까머리 중학생은 아버지로부터 생일선물로 쌍안경을 받았다.

셋집을 전전하던 중 슬래브 옥상 집으로 이사했다. 밤마다 옥상에 올라가 쌍안경으로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보름에 쌍안경으로 휘영청 밝은 달을 들여다보는 게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쌍안경으로 유성(流星)을 목격하게 되었다. 감전된 것 같았다. 충격이었다. 그날 이후 소년은 신앙처럼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아주대 산업공학과에 입학한 그는 대학아마추어 천문학회에 들어가 동아리 활동을 했다.

어느날 종로 헌책방에서 우연히 일본에서 나온 천문학책을 발견했다. 책에는 온통 일본인이 발견한 혜성 이야기뿐이었다.

일본인이 이미 1919년에 혜성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스무 살 언저리 대학생은 당돌한 꿈을 품게 된다. '내가 혜성을 발견하고 말겠다.' 1975년이다.

홍익대 대학원에서 건축을 공부한 그는 김수근 설계사무소 '공간'(空間)을 거쳐 대우건설에 들어가 김종성 건축사 밑에서 설계를 배웠고, 싱가포르 건축 현장에서 근무했다.

서른여섯 살에 호주로 유학해 시드니대학에서 건축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세경대 교수가 됐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별 생각뿐이었다. 밥벌이하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별 관찰에 노력을 쏟아부었다.

밤이 긴 겨울에는 7~8시간 이상 밤하늘을 관찰했다. 여름밤은 관찰 시간이 짧다. 그렇게 35년이 흘렀다. 2009년 3월 26일 혜성을 발견했다.

"혜성은 얼음덩어리다. 밤하늘에 전혀 보이지 않다가 어느 순간 태양광을 받아 확 나타난다. 꼬리가 길어야 잘 보인다. '혜성같이 나타났다'라는 말은 일본식 표현인데, 여기서 나온 거다. 꼬리가 긴 혜성은 길이가 지구에서 목성까지나 된다."

확인 과정이 필요했다. 그는 일본의 천문학 박사에게 혜성 관측 사실을 궤도 예측, 증빙 사진과 함께 이메일로 보냈다. 보내고 나서도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그가 발견한 혜성이 일주일 후에 미 항공우주국(NASA) 인공위성에도 찍혔다.

그때부터 세계 천문대에서 그의 이메일로 축하 메시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조선조 이후 한국에서 최초로 발견한 혜성으로 공인을 받았다.

'혜성 c/2009 F6(Yi Swan)'

2009년 9월, 일본 교토를 방문했다. 일본 동아천문학회가 수여하는 '신천체 발견 특별상'을 받기 위해서였다.

미국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같은 해 11월, 스미스소니언 천체물리관측소(SAO)에서 '2009 에드가 윌슨 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상금 1000만원과 함께.

"상을 받으러 일본에 갔는데, 부끄럽더라. 일본인을 이겨보겠다고 별 관측을 시작했는데, 가장 먼저 일본인에게서 인정받게 됐으니 안 그렇겠나."

'장수하늘소 날개를 펴다' 책 표지

그의 관심은 하나 더 있었다. 나비, 즉 곤충이었다.

낮에는 건축을 가르치고 밤에는 별을 보고, 주말에는 나비 채집에 모든 걸 쏟아부었다. 그렇게 주말마다 산과 들을 헤매며 20년간 곤충을 채집했다.

그 결실이 2002년 동강 옆 버려진 폐교에 등장한 곤충박물관이다. 한국 최초다. 그게 현재의 영월곤충박물관이다. 이 곤충박물관에서 전시물을 한 시간만 둘러보면 인간의 집념과 노력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절감하게 된다.

그는 고려대에서 곤충학 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영월천연기념물연구센터는 2012년 남한에서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장수하늘소 인공증식에 성공했다. 세계 최초다. 그 지난한 과정을 쓴 책이 '장수하늘소 날개를 펴다'(2021)이다.

1957년 발행된 비사리온 벨린스키 기념 우표.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무명 작가를 극찬한 당대의 비평가 벨린스키

시공(時空)을 1840년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본다.

1843년부터 공병 장교로 근무 중이던 스물세 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1821~1881)는 지방 발령이 나자 1844년 10월 사표를 낸다.

그리고 평소 꿈꿔왔던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7개월 뒤인 1845년 5월 첫 장편소설 '가난한 사람들'을 발표했다.

당대의 비평가 비사리온 벨린스키가 '가난한 사람들'을 접했다. 벨린스키는 한 번도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학력도 변변치 않은 무명 작가가 쓴 작품을 꼼꼼히 읽었다. 비평가는 무명작가에게 전갈을 보낸다. 벨린스키는 집으로 찾아온 도스토옙스키를 보고 말했다.

"자네가 쓴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고 있는가. 스물네 살의 자네 나이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을 텐데."

러시아 문단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비평가는 무명 작가의 작품을 아무런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없이 있는 그대로 읽고 평가했다. 그리고 여러 곳에다 그에 대한 평가를 남겼다. 그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저 사람은 고골을 능가할 것이오. 지하실과 다락방을 사랑하는 이 젊은 작가에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1849년 도스토옙스키는 반역 혐의로 몰려 시베리아 유형(流刑)을 갔다. 그는 족쇄를 찬 채 인간성의 밑창에서 죄수들과 4년여를 보냈다.

그가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았던 것은 반드시 살아 돌아가 글을 쓰겠다는 정신력 때문이었다.

그 밑바탕에 벨린스키의 아낌없는 격려가 반석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30년이 흘러 문호로 추앙받게 된 후에도 도스토옙스키는 벨린스키와의 첫 만남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내 생애에서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1791년의 프란츠 요셉 하이든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하이든, 거친 천재를 알아보다

이번에는 그보다 70년 전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빈(Wien)으로 가보자. 중세의 도시 잘츠부르크에서 '음악의 수도' 빈으로 온 스물다섯 프리랜서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

그때 빈에서는 안토니오 살리에리, 크리스토프 글루크, 요제프 하이든 등

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음악가는 그보다 수준이 아래였다.

그들은 모차르트를 평가할 안목이 부족했다. 모차르트의 가치를 알아보고 제대로 인정한 사람은 딱 한 사람, 스물네 살 연상 요제프 하이든이었다. 하이든은 글로 남겼다.

"…위대한 모차르트가 간신히 다른 누군가 도와서 하는 많은 일들을 내가 감히 할 수 있을까.… 여러 국가는 그런 보물을 자기 담 안에 소유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할 것이다. 프라하는 이 귀중한 남자를 꽉 붙들어야 한다. 그럴 가치가 충분하다. 유일무이한 존재 모차르트가 아직 황제나 왕의 궁정에서 일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분노하게 한다. 미안하지만 상도에서 벗어난 말을 해보자. 나는 그 남자가 무척 마음에 든다.…"

하이든이라고 모차르트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왜 없었겠는가. 하이든도 사람인데. 그러나 하이든은 모든 사사로운 감정을 접고 거칠어 보이는 천재를 품었다. 모차르트는 아버지뻘인 하이든과 교유하며 음악적으로 하이든을 뛰어넘었다.

이대암 박사가 2009년 일본 동아천문학회에서 받은 표창장. 조성관 작가 제공

"김정호나 이순신의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지난 6월 중순, 나는 '지니어스 테이블' 회원들과 함께 영월곤충박물관에서 이대암 박사를 만났다. 2018년 여름에도 만났으니 4년 만이다.

이대암 박사는 한국의 천재로 불린다. 남들은 하나도 힘들다는 박사를 두 개나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배가 고프다.

그는 현재 해발 770m의 영월 봉래산에 관측소를 만들고 있다. 관측소 이름은 'Bigstone지구접근천체감시센터'. 또한 천문학 박사 과정을 알아보는 중이다.

이대암 박사는 전시관 2층 강의실에서 혜성을 발견하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회원들과의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한 회원이 물었다.

'한국천문학회에서는 아직까지 혜성 발견을 인정해주지 않고 있는데 섭섭하지 않으냐'고.

그랬더니 "전혀 그렇지 않다. 대동여지도를 완성한 김정호 선생과 이순신 장군 같은 사람도 있는데 이까짓 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건축일 20년, 곤충 연구 20년, 별 보기 20년을 보냈다.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다. 앞으로의 인생은 보너스다. 별 보는 데 남은 인생을 살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하늘에서 뭘 발견하고 싶은가'라는 물음엔 "소행성을 발견하고 싶다. 그래서 소행성에 김정호나 이순신 같은 인물의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그리고 한국전쟁 때 스무 살 나이로 참전해 전사해 부산UN기념공원에 잠든 호주 병사의 이름도 소행성에 붙여주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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