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쇼핑백에 맞고 있는' 여성들의 공포로 빚은 서늘함.. 소설가 이종산의 신작[플랫]

플랫팀 여성 서사 아카이브 twitter.com/flatflat38 2022. 6. 30.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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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빈 쇼핑백에 맞아 죽은 남자의 얼굴을 잊지 못하고 자꾸만 떠올리는 여자, 스토커 때문에 일가족을 잃은 여자의 집에서 밤마다 흔들리는 거울, 자신을 미워하고 학대했던 어머니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딸에게 커튼 뒤로 보이는 발….

이종산의 신작 소설집 <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은행나무)은 공포 소설이면서도 공포 소설이 아니다. 일상 속에서 여성과 소수자가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그려냈으며, 그 공포가 매우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사회문제와 직결된 소재로 쓴 일본의 추리소설을 ‘사회파 추리소설’이라고 한다면, 이종산의 공포소설을 일컬어 소설가 정보라는 ‘여성주의 공포소설’이라고 명명한다.

지난 17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여성과 퀴어가 느끼는 일상의 공포와 불안을 그린 소설집 <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을 펴낸 소설가 이종산을 만났다. 이준헌 기자

표제작 ‘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은 버스 안에서 취객이 휘두른 빈 쇼핑백에 맞아 죽은 남자의 모습을 목격한 진아의 이야기다. 지방대 출신으로 정규직이 되지 못해 계약직으로 일하던 진아는 현실도피적 선택으로 군인인 남자친구와 결혼한다. 강원도 외딴 관사에서 진아는 남편의 권위적인 태도에 눈치를 보며 집안일을 한다. 물리적·심리적으로 고립된 진아는 출구를 찾지 못한다. 진아는 사망한 남자의 얼굴을 잊지 못해 공포를 느끼지만, 남편은 무관심하다. 불안에 잠 못 드는 밤, 잠든 남편을 깨우려 하자 남편은 숨진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진아는 그에게 애정마저 느낀다.

“버스에서 분노에 가득 찬 사람이 빈 쇼핑백으로 누군가를 내리치는 상황과 그 생각을 떨치지 않는 여자의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소설 속 진아도 ‘빈 쇼핑백에 맞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했어요. 물리적 폭력이나 학대는 없지만 자신이 죽어가는 느낌과 우울감에 시달리는 진아의 모습이 겹쳐보였죠. 그래서 진아는 죽은 남자의 모습에 동질감을 느낀 게 아닐까요.” 소설가 이종산을 지난 17일 서울 마포구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만났다.

‘흔들리는 거울’에는 스토킹 범죄 피해자가 나온다. 스토커의 협박에 시달리는 ‘나’는 경찰에 신고하지만, 경찰은 “과잉반응을 한다”며 “해줄 수 있는 것이 딱히 없다”고 말한다. 주인공이 외출한 사이, 스토커는 집에 침입해 가족을 살해한다. ‘흔들리는 거울’은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트라우마의 원인은 스토킹이란 범죄와 그 피해에 무관심한 사회다.

‘여성주의 공포소설’이라는 평에 대해 이종산은 “특별히 여성·소수자 이야기를 한다고 의식한 것은 아닙니다. 내가 여성이니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주로 다루고자 했던 것은 ‘관계’입니다. 다양한 관계에서 오는 공포에 대해 써보고 싶었어요.”

소설집엔 모녀간의 관계, 여성과 여성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공포가 그려진다. ‘커튼 아래 발’은 모녀관계의 애증을 그린 소설이다. 오빠에게 집착하고 자신을 학대하고 미워하던 어머니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딸의 심리가 잘 그려진다. 이종산은 “가정폭력 가운데서도 모녀관계는 차이가 있다고 느꼈다. 엄마에게 학대를 당한 딸들은 학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 엄마에게 죄책감을 갖는 경우가 많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언니’는 여성과 여성의 관계를 다뤘다. 퀴어로맨스로도 읽히지만, 여성이 갖고 있는 여성혐오에 대해 다룬다. ‘여성적’인 것과 거리가 먼 희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화려한 외모를 지닌 모란을 알게 돼 만난다. 과장된 여성성을 지닌 모란과 희수는 가까워지지만, 돌연 모란은 희수에게 집착하며 희수와 가까운 사람들을 위협한다. 이종산은 “여성이 여성에게서 느끼는 공포에 대해 써보고 싶었다. 모란이 스토커일 수도 있지만 희수의 여성혐오가 만들어낸 공포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희수가 가진 여성혐오는 내 안에서 발견한 것이다. 희수는 (여성이면서도) 스스로 정상적 여성성을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희수는 여자들에게 끌리고 사랑을 주고받길 원하지만, 자신에게 내재된 여성혐오 때문에 사랑에 실패하고 영원한 고독에 갇힌다”고 ‘작가의 말’에 적었다.

이종산은 국내에 ‘커밍아웃’한 몇 안 되는 여성 작가다. 그는 퀴어로맨스를 다룬 장편소설 <커스터머>를 발표하면서 자신이 양성애자라고 밝혔다. 그는 올해 초 퀴어 창작자 모임(큐연)을 주도적으로 만들었다.

“<커스터머>를 펴낸 지 5년이 지났는데도 퀴어문학을 이야기하는 자리에 나가는 여성 작가가 저 말고 거의 없었어요. 최근에는 조금 늘었죠. 저는 저의 퀴어 작품을 쓰는 것이지 모든 퀴어를 대표해서 말할 수는 없어요. 퀴어 작품과 작가 수가 더 늘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남이 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큐연을 만들어 함께할 사람을 모았어요. 퀴어 작품에 대해 퀴어 당사자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고, 안전이 보장된 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열린 커뮤니티를 지향하고 있어요.”

이종산은 “일반적으로 퀴어 소설에 대해 피드백을 받기 힘든 면이 있다. 합평을 할 때 작품 자체가 아니라 ‘퀴어성 자체’를 이야기하거나, 말 실수라도 할까봐 ‘잘 모른다’며 말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커밍아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퀴어 작품을 쓰길 주저하는 사람도 있다”며 “큐연에서는 퀴어 창작자들이 경험을 공유하고, 작품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 나눌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17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공포 소설집 <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을 펴낸 소설가 이종산을 만났다. 이준헌 기자

‘퀴어’로서 현재 이종산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성별이분법에 속하지 않는 논바이너리, 성별을 구분짓지 않고 사람 자체에게 끌리는 범성애자에 가까운 것 같아요. 젠더 스펙트럼에 대해 알면 알수록 내 정체성이나 성지향성이 ‘라벨링’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퀴어’면 족할 것 같아요. 모든 개인은 지문처럼 고유한 성정체성과 지향성을 갖고 있다고 느껴요. 분류라는 게 저에게 큰 의미가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판타지와 SF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던 이종산에게 공포소설은 이번이 처음이다. 스스로 불안과 공포가 많다는 이종산은 “소설을 쓰면서 자신의 공포와 불안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있었다”며 “일종의 심리치료 같았다”고 말했다.

이야기 7편은 일상 속 마주할 수 있는 불안과 공포를 그럴싸하게 그려낸다. 잘 만들어진 공포영화나 소설이 그렇듯, 발목부터 휘어감고 올라오는 공포에 뒷덜미가 서늘해지면서도 다음 이야기 읽기를 멈출 수 없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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